제54장. 드래곤 (2)
영화 ‘사랑길’ 시사회 무대에 오르자, 사람들의 환호성이 쏟아졌다.
나와 아이리스, 그리고 오세평 감독은 손을 흔들어 보이면서 여유롭게 오늘 현장을 찾은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우리 드라마가 많은 영화 팬들에게 관심을 받고 있다는 건 잘 안다.
그래서인지 오늘 상당한 인파가 몰려들었다.
영화 팬들뿐만 아니라 기자들의 취재 전쟁 역시 뜨겁다.
MC가 우리에게 마이크를 넘기면서 차례대로 자기소개를 요청했다.
“먼저 태오 씨부터 자기소개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사랑길에서 유세온 역할을 맡은 배우 강태오입니다. 반갑습니다.”
팬들의 환호성이 다시 한번 현장에 울려 퍼졌다.
보니까 HTB 팬들도 이 자리를 찾은 듯했다.
다음으로 아이리스의 차례였다.
“클레이 역할을 맡은 아이리스입니다. 이렇게 영광스러운 자리에 함께하게 되어서 정말 기쁩니다. 잘 부탁드려요.”
오늘 무대의 홍일점이라 할 수 있는 아이리스의 인사에 사람들은 아까보다도 더 뜨거운 호응으로 보답했다.
아이리스가 나보다 더 인기가 많은 거 같은데.
나처럼 특별히 가수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럼에도 아이리스의 인기는 대한민국 내에서 가히 신드롬이라 불릴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우리 회사 소속 아티스트가 수많은 팬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하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른 관계를 떠나서 내 소중한 후배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물론 영화에서만큼은 후배가 아니라 연인이 되었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오세평 감독이 마이크를 들었다.
“오세평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두 배우와 같이 작품을 만들게 되어 너무나도 기쁩니다. 오늘 시사회, 아무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진행자가 오세평 감독의 자기소개를 인용해서 바로 질문 타임에 들어갔다.
“사실 영화에 캐스팅된 배우들의 명단이 공개되었을 때, 사람들이 많이 의아해했거든요. 오 감독님은 주연 역할에 항상 경력이 많은 배우들을 기용하셨잖아요. 그런데 이번에는 태오 씨, 아이리스 씨, 두 분 다 그렇게까지 연기 경험이 많은 편이 아니었는데. 이 두 분의 어떤 매력을 보고 캐스팅하시게 되었나요?”
캐스팅에 대한 비화는 나도, 아이리스도 굉장히 궁금했다.
이전에도 여러 번 듣긴 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정식으로 질문을 받고 대답하는 자리에서는 또 말이 달라질 수 있으니까.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오 감독의 대답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오 감독이 어색한 웃음소리를 흘리면서 말했다.
“요즘 두 분의 커플링에 꽂혔거든요. 사실 ‘사랑길’ 시놉시스가 나오게 된 것도, 태오 씨와 아이리스 씨가 서로 같은 투 샷으로 나오는 장면을 보고 영감을 받아서 작성하게 된 거였습니다. 그렇다 보니까 캐릭터를 연기할 배우들도 자연스럽게 태오 씨, 아이리스 씨가 될 수밖에 없었죠.”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다.
역시, 계속 파고 파다 보면 뭔가 우리들한테 말하지 않은 새로운 이유들이 계속해서 발굴된다.
원래 사람이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한꺼번에 속마음을 오픈하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다.
“태오 씨도 이걸 알고 있었나요?”
MC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이 이유는 처음 들었습니다.”
“감독님께서 두 분을 캐스팅하신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으셨나 보네요.”
“그만큼 주연은 중요한 자리니까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우리 두 사람에게 이렇게 중요한 배역을 덥석 맡기진 않았을 거다.
오히려 나는 이걸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 *
짧은 토크 타임을 마치고, 드디어 처음으로 우리 영화가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스크린을 통해서 영화 ‘사랑길’을 보는 건 처음이었기에 감회가 새로웠다.
‘확실히 영화는 이렇게 영화관에서 보는 맛이 있다니까.’
큰 화면도 그렇지만, 특히나 사운드 효과는 집에서 아무리 좋은 음향 장비를 설치해도 영화관의 느낌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작품을 보면서 같은 장면에서 같은 감정을 한자리에서 공유한다는 이 느낌이 정말 좋다.
이래서 배우들이 영화를 찍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살짝 들었다.
거의 2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이 끝난 뒤.
스태프롤이 올라가면서 사람들의 박수갈채가 우리의 머리 뒤로 쏟아졌다.
나와 아이리스 그리고 오 감독은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돌아서 사람들에게 고개를 여러 차례 숙이고 일일이 감사의 뜻을 전했다.
영화 감상이 끝나고, 다시 짧은 토크가 이어졌다.
이전에는 영화를 보기 전이었기에 토크에 많은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었지만, 이번에는 다들 영화를 봤기 때문에 마음껏 스포일러를 해도 괜찮아졌다.
그래서인지 나도 아까보다는 입이 더 풀렸다는 느낌을 받았다.
MC가 이번에는 관객들을 향해 마이크를 기울였다.
“이쯤에서 질문 한번 받아 볼까요?”
질문이라는 말에 기자들과 영화 평론가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우수수 손을 들기 시작했다.
어느 미디어에서 나온 누구누구 기자라고 짧게 소개를 한 뒤, 영화에 관련된 질문을 꺼내고. 거기에 우리들이 대답하는 형식으로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졌다.
이 중에서 한 기자가 재미있는 질문을 던졌다.
“태오 씨하고 아이리스 씨 키스신 장면에서 NG가 몇 번 정도 나왔습니까?”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반대로 아이리스는 웃기보다는 부끄러운 감정이 먼저 들었는지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오 감독은 내게 마이크를 넘겼다.
“이건 태오 씨가 답변해 드리는 게 좋을 거 같네요.”
뭐지? 이게 그 유명한 수치 플레이라는 건가?
기억을 더듬어 본 나는 쓴 미소를 유지하면서 기자의 물음에 나름 성실히 답해 줬다.
“열 번은 넘었던 거 같습니다.”
그러자 질문을 한 기자는 역시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처음 키스신을 하는 남자 배우, 여자 배우들의 경우에는 대부분 이렇게 NG를 많이 내곤 한다고 들었다.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아는 동생과 마우스 투 마우스를 하려니까 굉장히 부끄럽긴 했다.
그것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이다.
MC가 다음 질문자를 찾기 위해 물었다.
“또 다른 분 계신가요?”
손을 드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았다.
그중에서 내 시선을 사로잡는 사람이 있었다.
낯이 익은 여성의 모습.
그녀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저 여자, 제이커와 같이 움직이던 그 여자 같은데.’
여성이 나를 향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잠시 뒤.
여성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내가 잘못 본 건가?’
귀신에 홀리기라도 했나?
찝찝한 기분이 잠깐 동안 계속 이어졌다.
* * *
마지막에 약간 신경 쓰이는 일이 벌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영화 시사회는 별 사고 없이 무사히 끝이 났다.
시사회 이후에 유난히도 길게 느껴졌던 세 번째 앨범 활동도 마침표를 찍었다.
체감상 왜 이렇게 길었나 싶더니만, 니암이 Hip to the Hop에서 우승한 덕분에 우리들의 앨범 활동 기간의 마지막이 스케줄로 빽빽하게 찬 채로 마무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예정했던 활동 기간보다 1주가량 더 늘었다.
그럼에도 딱히 힘들거나 피곤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보람을 느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발표했던 HTB 앨범들 중에서 이번 앨범이 가장 고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성적으로 따져도 세 번째 앨범 곡들이 가장 우수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음원이 공개된 이후로 지금까지 메이저 스트리밍 플랫폼 차트 1위 자리에서 내려온 적이 단 한 번도 없고.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아시아 등 각국의 차트에서도 우리의 노래가 당당하게 1위를 차지했다.
이렇다 보니 우리 HTB의 다음 앨범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대중의 기대가 기하급수적으로 오른 덕분에 최 프로듀서만 덩달아 큰 부담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우리야 뭐, 늘 해 오던 대로 하면 된다는 생각이니까, 부담감은 없었다.
최 프로듀서가 나를 보자마자 앓는 소리를 흘렸다.
“HTB 앨범 준비할 때마다 매번 제 자신과의 싸움인 거 같습니다.”
“좋은 현상 아닌가요? ‘어제보다 나은 오늘의 내가 되자’가 최 프로듀서님의 신념이었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어야죠. 매번 사람들의 기대가 갈수록 커지니까 제가 다 죽을 맛입니다.”
최 프로듀서처럼 오랜 경험과 뛰어난 실력을 가진 사람들도 부담감을 이겨 내기란 쉽지 않은 모양인가 보다.
이것도 다 기계가 아닌 사람이 하는 일들이니까.
당연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최 프로듀서는 크게 싫어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우리 HTB의 전담 프로듀서를 맡으면서 덩달아 최 프로듀서 역시 의도치 않은 인기몰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HT 엔터테인먼트에 들어오기 전에는 퇴물 소리까지 들을 정도였던 최 프로듀서였지만, 지금은 다시 완벽하게 부활했다 하더라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요즘 포텐이 장난이 아니다.
그래서 나도 다른 능력 있는 프로듀서가 많아도 굳이 최 프로듀서에게 일을 맡기는 걸 고집하고 있었다.
“다음 네 번째 앨범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열심히 해야죠. 이사님께서…… 아니지, 대표님께서 저 믿고 계속 곡 맡겨 주고 계시는데.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항상 노력하겠습니다.”
최 프로듀서의 이런 마음가짐은 늘 마음에 든다.
“근데 영화 쪽은 어떻습니까?”
“오 감독님 작품 말씀하시는 거죠?”
“네, 지난주에 개봉하지 않았습니까.”
마침내 첫선을 보이게 된 영화 ‘사랑길’.
시사회 때에도 굉장히 좋은 반응이었는데.
개봉 이후에도 이 반응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성적 잘 나오더라고요. 한국에서 개봉한 역대 로맨스 영화 중에서 가장 높은 관객 수를 기록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오, 진짜입니까? 이러다가 ‘천만 관객’ 돌파하는 거 아닙니까?”
“글쎄요. 요즘은 많이 힘들다고 하던데.”
레이드 시대 이전에는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가 심심치 않게 나오곤 했었다.
그러나 레이드 시대 이후, 인류의 삶의 기반 자체가 흔들리면서 사람들은 오락보다 생존에 더 무게감을 두기 시작했다.
덕분에 연예계, 예능 쪽의 타격이 컸다.
당장 내일 몬스터한테 언제 습격받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TV나 영화관에 가서 하하호호 웃을 정신머리가 어디 있을까.
지금이야 평화의 시대가 찾아오고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옛날에 비해서는 완벽하게 수복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영화 ‘그날, 우리’가 굉장히 선전한 편이었다.
이번 ‘사랑길’은 어떻게 될지.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분위기가 상당히 좋은 편이기도 해서, 나름 기대를 걸어 볼 만도 하지 않을까 하고 예상 중이다.
“다음에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최 프로듀서님.”
“최대한 열심히 노력해 보겠습니다.”
다음 앨범도, 그다음 앨범도.
최소한 1위는 찍고 시작해야지.
이미 나와 우리 HTB 멤버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하는 몸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