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장. 드래곤 (1)
드래곤이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는 말에 나를 제외하고 가장 관심을 많이 보일 만한 사람은 역시 이철민 소장이었다.
“일단은 드래곤의 형상을 한 또 다른 무언가였을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정말로 드래곤이 하나 더 남아 있는 건지 사실관계를 따져 보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이철민 소장다운 의견이었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거의 확실하다고 보고 있었다.
하지만 100퍼센트는 아니다.
아주 짧은 순간에 마주친 것 말고는 드래곤이 맞다는 확신을 받을 만한 명확한 근거를 확보하지 못했으니까.
믿을 만한 건 오직 내 목격담 하나뿐이다.
그래서 내가 드래곤을 봤다고 주장해 봤자 협회 측에서 내 말을 100퍼센트 믿고 움직이기에는 근거가 부족했다.
왜냐하면 일반 몬스터가 나타났다면 그렇다 칠 수 있어도, 드래곤은 이야기가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협회장이 이철민 소장의 편을 들어 줬다.
“이 소장의 말대로, 우선은 드래곤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부터 먼저 확보하는 쪽으로 합시다. 태오가 본 그대로 정말 드래곤이 아직 이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다면…….”
협회장은 잠시 말끝을 흐렸다.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기 때문에 그런 거였다.
드래곤이 게이트를 열기라도 했다가는 제2의 레이드 시대가 열릴 테니까 말이다.
“아무튼 이상으로 회의는 마치도록 하고, 드래곤에 관한 정보는 입수되는 대로 협회 측에도 공유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의 긴급회의가 막을 내렸다.
* * *
회의가 끝나자마자 데이브와 아이리스, 그리고 나빈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재차 물었다.
“선배님, 정말로 드래곤을 보신 거예요?”
“어. 증거는 없지만.”
물증이 없다 보니, 나도 이렇다 할 주장을 내세우기가 난처한 입장이었다.
혹시 모르지 않은가. 내가 본 드래곤이 크라겔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크라겔이 지금까지 변신한 몬스터들 목록 중에 드래곤은 존재하지 않았다.
드래곤과 일반 몬스터의 차이는 명확하게 존재한다.
그냥 종이 한 장 차이가 아니라, 거의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처럼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차이를 자랑한다.
그래서 드래곤은 다른 몬스터와 어울려 다니지 않는다.
자긍심이라고 해야 할까.
이전에도 나와 치고받고 싸웠던 드래곤 역시 살아 숨 쉬는 생물체의 정점으로서 우리 인간들을 깔보는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곤 했었다.
결과적으로는 내게 제거당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드래곤들의 그런 고압적인 태도가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했다.
놈들은 그만한 능력과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게이트를 열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가 없지 않은가.
협회장이 말한 대로, 일단은 드래곤의 존재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나올 때까지 우리들도 당분간은 사람들 앞에서 입조심하자고 신신당부했다.
그렇게 협회장의 사무실을 나서려던 순간.
“태오 씨.”
이철민 소장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따로 이야기 좀 나누시죠.”
“어디서요?”
“제 연구실이라면 아무도 엿들을 수 없을 겁니다. 제가 시끄러운 소리에 워낙 민감해서, 안이며 밖이며 방음장치를 아주 잘 해 뒀거든요.”
그렇다면 안 갈 이유가 없다.
이철민 소장의 뒤를 따라 그의 연구실로 이동했다.
그러자 이철민 소장이 내 앞에 두터운 서류철로 탑을 쌓기 시작했다.
“이게 다 뭡니까?”
“제이커가 어떻게 게이트를 열려고 했는지, 지난 몇 개월 동안 그의 흔적을 찾아다니면서 모아 본 데이터입니다.”
예전에는 단서랄 게 하나도 없어서 종이 몇 장으로도 충분히 요약이 가능할 정도였는데.
이철민 소장이 조사를 얼마나 열심히 했길래 종이 몇 장의 수준에서 서류철 탑으로 바뀌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 소장이 열심히 조사한 거니까.
일단은 자료를 먼저 살펴보기로 했다.
“어떤 것부터 보면 됩니까?”
“순서는 상관없습니다.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 것만 보시면 됩니다. 중요한 내용은 그걸로 다 체크해 뒀거든요.”
“네, 알겠습니다.”
이철민 소장의 센스 덕분에 내 시간이 많이 단축될 수 있었다.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 곳은 몇 군데 없었다.
서류철을 펼치자마자 이철민 소장이 왜 포스트잇으로 따로 표기해 둔 곳만 보라고 했는지, 그 이유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부분에 전부 다 요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간추려서 말하자면.
“드래곤의 힘을 빌려서 게이트를 열 생각을 했나 보군요.”
“네. 물론 그것도 태오 씨가 드래곤을 봤다는 목격담처럼 증거가 없어서 입증하기는 힘듭니다. 그런데도 저는 그 가설이 가장 타당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공교롭게도 나한테 있었다.
“태오 씨가 드래곤을 언급하자마자 ‘이거다!’ 하고 바로 촉이 오더군요.”
“저 때문이었군요.”
“‘저 덕분’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할 거 같네요.”
이철민 소장은 내 증언 덕분에 그동안 계속해서 막혀 있었던 것들이 모두 뚫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제이커가 드래곤과 접선한 거 같습니다. 그래서 그 드래곤과 딜을 했겠죠. 게이트를 열 수 있도록 자신을 도우라고.”
제이커의 목적은 세상에 혼돈을 다시 가져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게이트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을 것이다.
여기에 드래곤은 게이트를 열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두 존재의 이해관계가 서로 일치했으니, 협업을 안 할 이유가 없는 셈이었다.
드래곤과 접촉했던 제이커.
녀석은 드래곤이 있는지 없는지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죽이기 전에 심문이나 좀 할 걸 그랬네요.”
뒤늦은 후회를 느끼는 나를 보면서 이 소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쩔 수 없죠, 우리가 신도 아니고. 세상 모든 일들을 다 예견할 수는 없으니까요.”
이 소장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쉬움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일단은 협회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드래곤이 정말로 존재하는지부터 먼저 확인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괜히 사실 확인도 안 하고 드래곤이 실존한다는 발표를 하면, 혼란만 더 초래할 테니까요.”
만약에 민간인들이 아직 드래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엄청난 혼란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나도 그 일은 웬만하면 피하고 싶다.
차라리.
‘내가 잘못 봤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럼에도 불안감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 * *
내 연예계 활동은 일반 연예인들과는 다르게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다.
어제처럼 크라겔 사건이 터진 이후에는 여기저기서 많은 섭외 요청이 들어온다는 거였다.
뉴스뿐만 아니라 각종 예능 프로그램까지.
몬스터들을 직접 퇴치했던 나였기에 당시의 상황이 어땠는지, 내 입을 통해 생생한 현장감을 접하고 싶어서 그런 거 같다.
그리고 레이드 시대, 몬스터 같은 존재들은 아직도 일반인들에게 있어서 미지의 대상이니까.
궁금증 때문이라도 나를 프로그램에 섭외하고 싶어 하는 PD, 작가가 매우 많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MC가 나에게 크라겔 사건에 대해 물었다.
“굉장히 오랜만에 몬스터들이 출몰했다고 들었습니다만, 당시의 현장 분위기는 어땠나요? 태오 씨도 그곳에 계셨으니까 누구보다도 잘 아실 거 같아서요.”
“현장 분위기는 특별히 다른 건 없었습니다. 물론 오랜만에 실전 전투라서 다들 긴장하는 표정이 좀 보이긴 했는데, 그것 말고는 딱히 크게 변화된 점은 없었습니다. 레이드 시대에는 이런 게 거의 일상이었으니까요.”
농담이 아니라 진담으로 한 말이다.
몬스터들을 때려잡는 일이 우리들의 일상이다.
물론 지금의 MC라든지, 헌터가 아닌 일반 사람들이 들었을 때에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공감이 잘 안 될 것이다.
“나중에도 또 이런 일이 반복되겠죠?”
“네, 높은 확률로요. 그래도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크라겔 사건에서도 보셨다시피, 몬스터들이 갑자기 튀어나온다 할지라도 저희 헌터들이 바로바로 출동해서 제압할 수 있으니까요. 그만큼 여러 사람들의 지원이 필요하긴 하겠지만요.”
마지막의 이 말은 협회장이 내게 방송에 나가면 꼭 흘려 달라고 했던 멘트이기도 하다.
레이드 시대가 끝나고, 헌터들의 권한이 점점 축소되고 있었기 때문에 협회장은 이번에 다시 한번 그 권한을 확대하고자 정부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고위층을 만나고 다닐 거라고 했다.
그들을 만나서 다시 한번 헌터들과 헌터협회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이에 따른 지원을 약속받을 예정이라고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레이드 시대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완벽하게 평화가 돌아왔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줘야 한다.
그래서 방금처럼 ‘지원이 필요하다.’라고 말을 했던 것이다.
한순간의 방심만큼 위험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 * *
몬스터에 관한 일도 그렇지만, 연예계 관련 활동도 지금껏 열심히 해 왔으니까 등한시하면 안 된다.
오늘은 오세평 감독의 영화, 사랑길의 시사회가 있는 날이다.
오전 녹화를 끝내자마자 바로 시사회 현장으로 향한 나는 대기실로 향하던 도중에 몇몇 스태프들과 짧은 인사를 나눴다.
중간에 오 감독이 크라겔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도 저희 시사회 때 몬스터들이 출몰했다는 소식이 없어서 다행이군요.”
크라겔 사건이 벌어진 지 시간이 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사람들의 입에서 몬스터들에 관한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몬스터 사건이 오랜만에 벌어진 탓이다.
“만약에 몬스터가 나타났다면, 저는 시사회에 무조건 불참했을 테니까요.”
“그렇죠.”
중요한 날에 갑자기 불참을 선언하기도 좀 그랬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사람들은 충분히 양해해 줄 것이다.
민간인들의 목숨을 구하는 게 최우선이지, 시사회를 그보다 더 높은 우선순위에 둘 순 없으니까 말이다.
오히려 몬스터가 나타났는데 내가 시사회 무대에 서 있었다면, 더 욕을 먹었을 것이다.
연예계에 심취해서 헌터 본연으로서의 업무를 잊어버린 거냐고 말이다.
지난번 크라겔 사건 이후에 각종 방송에 출연하면서 헌터들과 헌터 협회를 향한 지원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열심히 말하고 다녔는데. 정작 내가 본업에 소홀히 하는 태도를 보이면 그에 따른 비난이 어마어마하게 쇄도할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오세평 감독의 말에 깊은 공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대기실로 들어서자, 아이리스가 짧은 원피스를 입고서 나를 반겼다.
“오빠, 늦으셨네요.”
“미안. 일이 좀 있어서. 그보다 오늘 예쁘네?”
“어머, 정말로요?”
아이리스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아이리스에게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이 아니라, 오늘따라 정말로 예뻐 보였다.
“시사회니까요. 힘을 많이 주긴 했어요. 새벽부터 샵에 들러서 준비했거든요.”
“잘했어.”
우리 영화가 오늘 사람들에게 첫선을 보이는 거니까.
신경을 많이 쓰는 건 당연하다.
나도 아이리스처럼 준비를 좀 하고 올 걸 그랬나.
갑자기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