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장. 간만에 본업 (1)
요즘 하도 방송 활동에 매진하다 보니 가끔씩은 우리들이 헌터라는 사실을 까먹을 때가 있었다.
예전의 경우에는 그래도 훈련소에 왔다 갔다 하면서 가끔씩 몸도 풀고.
실전 감각을 아예 잊어버리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노력은 기울이는 추세였는데.
요즘은 이러지도 못했다.
우리가 단순히 게을러져서 그런 건 절대로 아니다.
헌터 일을 접으려고 하는 이유는 더더욱 아니고.
그렇다면 대체 왜?
답은 하나밖에 없다.
‘바빴으니까.’
진짜 이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다.
그러나 몬스터들은 우리들의 바쁜 스케줄을 일일이 고려하면서 나타나지 않는다.
만약에 이런 인정머리를 가진 녀석들이었다면, 녀석들이 사는 차원과 우리 지구가 있는 차원의 문이 서로 열렸을 때 게이트를 넘어오거나 하진 않았을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 녀석들이다.
이 녀석들을 퇴치하는 것이 바로 헌터들이 해야 할 일이다.
“가자.”
“네, 형!”
막 출동하려던 그때 마침 승훈이 형한테서 연락이 왔다.
-얘들아! 미안하다! 내가 지금 너희 숙소로 가고 있던 길이었는데! 무슨 연락이 왔냐 하면…….
“알고 있어. 몬스터들 등장했다면서?”
-어? 어떻게 아냐?
“방금 재난문자 왔으니까.”
승훈이 형이 우리들에게 연락하는 것보다 재난문자 오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원래는 승훈이 형이나 재난문자보다 더 빨리 우리들한테 연락이 와야 하는 곳이 있다.
바로 헌터협회다.
그러나 헌터협회도 너무나 오랜만에 몬스터들이 나타나서 그런지 재난문자에게 간발의 차이로 첫 번째 순서를 빼앗기고 말았다.
어쨌든 그들도 우리들에게 몬스터가 나타났으니까 인근에 있는 헌터들은 출동 바란다는 내용을 늦게나마 보냈다.
‘나중에 인터넷에 글 좀 올라오겠네.’
헌터들이 왜 이렇게 늦게 출동했냐고 말이다.
뭐, 그래도 사정은 대충 알겠다.
거의 1년 만에 몬스터들이 나타나는 거니까.
그래서 헌터협회 측에서도 방심하고 있다가 이번에 크게 한 방 먹은 것 같다.
그렇다고 헌터들인 우리들마저 방심하면 절대로 안 된다.
레이드 시대가 끝나고 남은 몬스터들만 상대한다 치더라도, 몬스터는 몬스터다.
언제든 사람들에게 많은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출동 신호를 받으면 바로 현장으로 출발하는 게 좋다.
이렇게 재난문자가 오고 위급 상황 명령이 내려지면,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특권 같은 게 하나 생긴다.
바로 아이템 사용에 제한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건 원래부터도 있는 제도다.
다행히 숙소로 들어오기 전에 내가 아이템들을 몇 개 가져오긴 했었다.
방마다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나머지 멤버들을 독촉했다.
“자자! 스케줄 나가기 전에 몬스터부터 먼저 때려잡고 가자.”
“네, 알겠습니다.”
요즘 하도 스케줄에 시달려서 그런 걸까.
몬스터 관련 일로 출동한다고 하니까 멤버들의 표정이 굉장히 좋아 보이는데. 내 착각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 * *
우리는 현장으로 빠르게 출동했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보다 아이템을 이용해서 현장까지 이동하는 게 훨씬 더 빠르다.
몬스터가 나타났다고 한다면, 교통 체증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도로 한가운데에 차를 버리고 달아나는 민간인들이 있는가 하면, 사고가 나서 이도 저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차도 있다.
이런 것들이 여기저기서 뒤섞여 있으니, 당연히 교통 사정이 말이 아니게 될 수밖에 없다.
마치 영화에 나오는 모 거미 영웅처럼, 우리들은 빌딩 숲 사이를 이리저리 누비면서 빠르게 현장으로 나아갔다.
이번 몬스터 출몰 지점은 지방이 아닌 서울이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는 도시다 보니 서울에 몬스터들의 습격이 꽤 자주 벌어지는 편이었다.
이번에 출연한 몬스터들은 크라겔.
슬라임 계통의 몬스터로, 어떻게 보면 하위 몬스터 계통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절대로 무시할 만한 몬스터는 아니다.
크라겔의 가장 무서운 점은 바로 자신의 신체를 자유자재로 변형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번에 우리가 상대했던 브리번과 굴루, 그리고 아리그 등 크라겔은 헌터들이 상대하기 까다롭다고 알려져 있는 각종 몬스터들의 모습으로 변한 채 민간인들을 습격하려 했다.
녀석의 몸 자체에 산성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공격하는 데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자칫 잘못 공격했다가 몬스터 피를 뒤집어쓰기라도 하면 심각한 부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HTB 멤버들과 함께 현장에 도착한 나는 혹시 몰라서 주의를 주기로 했다.
“거리를 두면서 싸워. 녀석들이 갑자기 산성액을 뿜어낼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절대로 먹히지 마라. 먹히면 생존율이 급속도로 떨어지니까. 알겠지?”
“예, 알겠습니다!”
“주의할게요, 형!”
멤버들이 기운차게 답했다.
데이브도 무기를 들고 크라겔들을 맞이했다.
지상에 있는 녀석들은 비교적 상대하기 쉽다.
문제는 공중에 떠다니는 녀석들이다.
외형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보니 비행 타입의 몬스터로 변할 경우에는 오리지널 녀석들과 마찬가지로 하늘을 나는 게 가능해진다.
단순히 겉모습만 바뀌는 게 아니라 그 몬스터가 가지고 있는 능력까지 전부 구사하는 게 가능하다 보니 주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들이 역으로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날아다니는 녀석들은 어떻게 처리할 거냐?”
데이브가 내게 계획을 물었다.
공중 담당 헌터 부대가 원래 있긴 했었는데.
몬스터들이 하도 출몰을 안 하니까 인원을 감축한다고 부대 자체를 해산시켜 버렸다.
‘이러니까 내가 헌터 부대는 돈이 많이 들어도 꾸준히 유지하는 게 좋다고 한 거였는데.’
협회장도 당연히 이런 것들을 주장했을 테지만, 요즘 높으신 분들이 한창 선거 기간이라고 이래저래 보여 주기식 쇼를 하려다 보니 본의 아니게 우리가 피해를 보게 되었다.
어쩔 수 없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깨물어 보는 수밖에.
“본부, 내 말 들리나?”
-예, 들립니다.
통신기를 통해 본부에 요청 사항을 알렸다.
“내 집에 슈드릭 보우 있거든. 그 아이템 좀 가져다주면 안 될까?”
-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승훈이 형한테 연락해 보면 돼. 잘 알려 줄 거야.”
승훈이 형은 내가 가수로 데뷔하기 이전에 헌터 매니저로 일을 했었다.
헌터 매니저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가 바로 담당하는 헌터의 지원이다.
전투에 차질이 없도록 매니저가 실시간으로 현장 근처에서 대기하며 지원을 해 줘야 한다.
물론 지금은 승훈이 형도 MML 버프 덕분에 은퇴를 번복하고 현장에서 직접 싸우는 게 가능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전방은 현역들에게 주로 맡기는 편이었다.
승훈이 형은 대부분 후방을 책임진다. 웬만한 급한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사이즈가 뭐라고 할까…… 승훈이 형이나 후방에서 대기 중인 예비 헌터들까지 부랴부랴 데리고 와서 크라겔들을 막을 만한 정도는 아니고.
지금 출동한 헌터들만으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게 다 MML 버프 덕분이지.’
작전 본부 측에서 아예 공식 채널로 우리 HTB, HTG의 노래를 틀어 주고 있기 때문에, 헌터들이 손쉽게 몬스터들을 제압해 나갈 수 있었다.
‘나중에 현장 정리 끝나면, 기자들한테 기사 몇 개 보내라고 해야겠어.’
이번에도 HTB, HTG의 노래들이 몬스터들과의 전투에 크나큰 도움을 줬다고.
1등 공신이라는 단어는 꼭 기사에 넣도록 주문해야겠다.
그래야 어그로도 좀 끌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20분 정도 지난 뒤.
승훈이 형이 나를 불렀다.
“태오야! 이거 받아라!”
형이 직접 내게 슈드릭 보우를 건네줬다.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쥐고 마나를 주입하자, 슈드릭 보우가 철컹! 소리를 내면서 X 자로 펼쳐졌다.
헌터 훈련소에서는 단순히 검술만 교육을 받지 않는다.
맨손 격투를 비롯해서 창술, 궁술 등 다양한 무술을 배운다.
그래서 나도 활 정도는 충분히 쏠 줄 안다.
살짝 뒤에 위치한 나는 활시위를 당기기 전에 마음에 드는 노래로 바꾸기로 했다.
‘우리 노래는 좀 지겨우니까, 이번에 나온 HTG 거 들어 보면서 쏠까.’
시대가 많이 변하긴 했다. 정말로.
레이드 시대 때에는 누가 한가하게 노래 들으면서 전투할 생각을 다 했겠나.
물론 전투를 대충 하려고 노래를 듣는 게 아니라, 전투력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한 일종의 작전이긴 하지만, 그래도 신기한 건 여전했다.
귓가에 흘러나오는 HTG 멤버들의 귀여운 목소리 덕분인지, 한창 현역으로 활동할 때보다도 훨씬 더 활시위를 당기는 팔에 힘이 들어가는 거 같았다.
준비 완료.
조준…….
“Fire!”
내가 입으로 자체 발사 명령을 내렸다.
한 발의 마나 화살이 수십 갈래…… 아니, 수백 갈래로 갈라지면서 공중에 떠 있던 크라겔들의 몸을 순식간에 관통했다.
주로 날개를 노렸다.
복구 능력이 달리는 놈들은 그대로 아래로 추락하고. 복구 능력이 어느 정도 되는 녀석들은 구멍이 숭숭 뚫린 날개를 금세 새 날개로 교체해 버렸다.
이것도 엄밀히 말하면 분류 작업인 셈이었다.
크라겔은 신체 복구 능력과 외형 변화 속도에 따라 해당 몬스터가 강한지 약한지를 판별할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아래로 낙하한 녀석들은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떨어지는 놈들이고.
내 공격에도 아직도 건방지게 날갯짓을 하면서 우리들의 머리 위에 있는 놈들은 상위 전투력을 가지고 있는 몬스터들이라고 할 수 있다.
지상으로 떨어진 놈들은 A랭크 이하 헌터들만으로도 충분히 상대가 가능하다.
하지만 공중에 떠 있는 몬스터들은 S랭크 이상의 전투력을 지닌 헌터들로만 구성해서 공격하는 게 좋다.
“데이브! 너도 준비해라!”
“알고 있어!”
데이브도 헌터협회에서 준비한 거대한 장궁을 건네받았다.
데이브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몬스터들을 잡으려고 이리 휘두르고 저리 휘둘렀던 창을 화살 대신 끼워 넣었다.
활만 놓고 봤을 때에는 웬만한 일반 성인 남자보다도 더 커 보이는 장궁이었지만, 그럼에도 데이브는 힘들어하는 표정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데이브도 쏘기 전에 자체적으로 ‘Fire’라고 외치면서 지상의 헌터들에게 발사 여부를 알렸다.
아무것도 모른 채 갑자기 위에서 화살비가 쏟아지거나, 거대한 창이 지나가면 헌터들이 전투 도중에 크게 놀랄 수 있으니까.
심하면 우리들이 아니라 몬스터들이 가한 공격으로 착각하는 헌터가 존재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이렇게 입으로 직접 신호를 내 주는 거였다.
누가 보면 겉멋 들어서 그런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름의 목적과 이유가 있는 행동이었다.
데이브가 쏘아 보낸 창이 빠른 속도로 하늘을 가르면서 크라겔들의 몸통을 숭숭 꿰뚫기 시작했다.
위에서 아직도 떠다녔던 상급 크라겔들이 데이브의 일격까진 버티지 못한 모양인지 우수수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데이브가 내 쪽을 힐긋 돌아보더니, 이내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더 많이 떨어뜨렸다.”
“그래, 너 잘났다.”
내가 너무 많이 이기면 재미없으니까, 한 번쯤은 져 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