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장. 지원사격 (6)
파이널로 향하는 3차 본선 녹화 날.
나와 준서는 2차 본선 당시에 니암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전부 다 해 줬기 때문에 이제는 얌전히 앉아서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니암이 혼자서 해내야 한다.
무사히 파이널 라운드에 진출하면, 그다음은 데이브하고 딜런이 지원사격을 나서 줄 테니까.
HTB 멤버들이 조금이라도 니암에게 힘을 보태면, 본인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니암에게 많은 안정감을 심어 주는 듯했다.
지난번 2차 본선 준비 당시에 이러한 점을 나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하기야, 나도 솔로로 한창 활동하다가 처음 그룹 활동에 들어서니까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는데.
니암이라고 그런 생각이 안 들 리 없을 것이다.
오늘 나는 데이브와 함께 누나가 진행하는 토크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데이브가 평소에 나한테 틱틱거리는 녀석이라 할지라도, 우리 누나에게까지 그런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잘 지내셨죠, 누님?”
“응. 데이브, 너는? 요즘 많이 바빠 보이던데.”
“그래도 레이드 시대에 바빴던 것보다는 지금 바쁜 게 더 좋으니까요.”
“하긴, 그때는 어딜 가도 흉흉한 분위기였으니까.”
이렇게 알아서 대화를 잘 나누는 편이었다.
누나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나는 데이브의 속내를 슬쩍 떠보기 위한 말을 던졌다.
“나한테는 그렇게 쌀쌀맞게 굴더니만, 우리 누나한테는 왜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 주냐.”
“레이디에게는 언제나 친절해야 한다는 것도 모르냐. 신사의 기본자세잖아.”
얼씨구, 젠틀맨 납셨네.
하긴, 데이브의 여동생 사랑을 생각한다면, 우리 누나한테 이렇게 살갑게 대하는 것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
그러고 보니 나빈이한테도 그렇게까지 모질게 대한 적은 없었다.
그럴 거면 그냥 모든 사람들한테 다 친절하게 굴 것이지. 하여간 일관성이 없는 녀석이다.
데이브와의 짧은 대화가 끝나갈 무렵, 스태프가 곧 촬영 시작할 테니까 우리들에게 준비해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알겠다고 말을 하면서 슬슬 자리를 이동하려고 하던 순간.
우리 근처에 있던 승훈이 형이 갑자기 전화벨 소리와 함께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가기 전에 승훈이 형이 누구한테 전화가 걸려 왔는지, 액정 화면을 확인하자마자 나와 데이브에게 살짝 스포일러를 흘렸다.
“3차 본선 결과 나왔나 봐.”
“진짜?”
생각보다 빠르다.
적어도 우리가 출연할 예정인 이 프로그램 녹화가 끝난 다음에서야 결과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나올 줄은 몰랐다.
승훈이 형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스태프가 다시 한번 우리들이 있는 대기실을 찾았다.
“스튜디오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하필이면 지금이라니.
타이밍이 영 아쉽다.
그렇다고 스태프한테 잠깐만 기다리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억지를 부리면 가능하긴 하지만, 내 고집 때문에 이 많은 스태프들의 시간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영화 촬영장에서도 한 번 NG를 낼 때마다 그렇게 미안할 수가 없는데, 토크 예능 프로그램이라고 특별히 다르진 않았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억지로 스튜디오를 향해 이동하는 사이, 데이브답지 않은 말을 흘렸다.
“니암이 파이널 라운드에 진출했는지 못했는지, 내기라도 할까?”
“내기? 너, 그런 것도 할 줄 알았냐?”
“헌터들끼리 자주 했었잖아.”
내기의 목적이 단순히 재미라고 하기에는 좀 그랬다.
전장에 있으면 맨정신을 유지하기 힘드니까. 그래서 소소한 내기 같은 거라도 걸면서 어떻게든 분위기를 밝게 만들어 보려고 노력하곤 했었다.
지금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좀 그랬다.
아무튼, 데이브가 먼저 내기라는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
이전에도 내가 먼저 데이브를 설득할 일 없이 파이널 라운드에서 니암의 지원사격에 나서 주겠다고 흔쾌히 대답한 것도 그렇고.
연예계에 발을 들이고 나서부터 사람이 많이 밝아진 느낌이다.
뭐, 이런 데이브도 나쁘지 않다.
“넌 어느 쪽에 걸 건데?”
내가 먼저 데이브에게 의사를 물었다.
“떨어지는 쪽으로.”
“뭐야, 니암이랑 파이널 라운드 무대 같이 서 주기로 한 녀석이 그쪽으로 걸면 어떻게 하냐?”
“니가 파이널 무대 진출 쪽으로 걸 거 같아서 내가 일부러 반대로 걸어 준 거다.”
“아, 그래?”
하긴, 둘 다 어느 한쪽에 걸면 재미가 없으니까.
그래서 데이브는 스스로 악역을 자처했다.
데이브는 예전부터 악역은 익숙했으니까.
이런 걸 보면, 사람이 완전히 달라진 건 또 아닌가 보다.
데이브의 배려 아닌 배려로 인해 나는 파이널 라운드 진출 쪽에 걸기로 했다.
촬영 중간에 쉬는 시간을 가지면, 그때 승훈이 형한테 결과를 확인할 수 있으니까.
그 전까지 우리는 당분간 눈앞의 촬영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렇게 바로 녹화에 들어가게 된 우리들.
테이프를 가는 시간 동안, 한참 전에 통화를 마치고 현장으로 복귀한 승훈이 형이 우리들이 있는 쪽으로 먼저 다가왔다.
승훈이 형을 보자마자 아까 데이브와 했던 내기를 떠올리면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니암, 어떻게 됐어? 파이널 진출했대?”
나와 데이브에겐 이 사실이 초미의 관심사다.
승훈이 형이 한차례 어깨를 으쓱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 진출했대. 이번에는 무난무난하게.”
니암의 진출, 그리고 내기에서의 승리까지.
기쁜 소식이 두 배다.
“내가 이겼네.”
데이브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같은 멤버가 파이널 라운드에 진출했다는 소식 덕분인지, 데이브는 내기에서 졌음에도 크게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내기도 내기지만.
“파이널 무대 준비도 서둘러야겠네.”
데이브는 머릿속으로 벌써부터 일정 조율에 들어간 듯했다.
* * *
그렇게 어렵다는 Hip to the Hop 파이널 진출 명단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린 우리 HTB 랩 담당, 니암.
기자들은 벌써부터 니암의 파이널 라운드 진출 소식을 기사화해서 발 빠르게 전하고 있었다.
물론 니암의 파이널 라운드 진출 과정에 잡음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예선을 통과해 본선 진출을 확정 지었을 당시, 유명 그룹에 몸담고 있는 멤버니까 일부러 시청률 생각해서 합격시킨 거 아니냐는 볼멘소리도 여기저기서 나왔었다.
니암도 그 글들을 아마 봤을 것이다.
인터넷 정보라는 게 우리가 막는다고 100퍼센트 완벽하게 차단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니암은 이런 비난의 화살을 묵묵히 견뎌 내면서 결국 파이널 라운드 진출이라는 명예를 거머쥐게 되었다.
솔직히 예선 통과는 운도 어느 정도 작용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본선 무대에서부터는 운이 아니라 실력이다.
게다가 시청자들에게도 공식 채널을 통해 편집되지 않은 풀영상을 공개하면서, 니암의 본실력이 어떤지를 생생하게 보여 줬다.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인기 보이 그룹이라고 해서 몰래 혜택을 받은 거 아니냐는 불신의 소리도 니암은 실력으로 극복해 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실력의 정점을 보여 줄 날이 다가왔다.
“준비 다 됐어?”
“네!”
니암이 기운차게 답했다.
파이널 라운드 무대를 꾸미기 위해 니암은 데이브, 딜런과 함께 한발 먼저 녹화 현장으로 향할 예정이다.
“나하고 준서도 무대 시작하기 전에 객석에 가서 앉아 있을 테니까, 긴장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즐겨. 알았지?”
“형이 한 말, 가슴속에 깊게 새겨 넣을게요.”
“그래.”
니암의 탄탄한 가슴을 두세 차례 토닥여 줬다.
니암에게 용기를 심어 주기 위한 내 나름의 의식 같은 거였다.
니암이 먼저 현관문을 나선 뒤.
딜런과 같이 밖으로 따라나서려던 데이브를 잠깐 불러 세웠다.
“데이브.”
“왜?”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데이브는 내 말에 시큰둥한 반응으로 일관했다.
“애들 잘 부탁한다. 알았지?”
“그런 걱정은 하지도 마라. 내가 알아서 잘할 테니까.”
내가 없는 곳에선 데이브가 우리 HTB 멤버들을 이끌어야 한다.
이미 헌터로 활동할 때부터 부대를 이끄는 일 같은 건 데이브도 많이 해 봤을 테니까.
내가 이렇게 신신당부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할 거라고 생각은 하는데. 그래도 리더다 보니까 이렇게 육성으로 한 번쯤 직접 말을 하는 편이 나에게도 안심이 되는 편이었다.
‘잘할 수 있겠지.’
기왕 결승 무대까지 진출했으니까.
우승까지 따냈으면 좋겠다.
Hip to the Hop 우승자가 속해 있는 실력파 보이 그룹, HTB.
이런 타이틀 하나 붙어 있으면 좋을 거 같은데 말이다.
* * *
결승 무대는 지난번에 나와 준서가 니암의 지원사격을 하기 위해 참가했었던 2차 본선 스튜디오와 상당히 달랐다.
무엇보다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무대 규모였다.
현장 내부 크기부터가 달랐다.
준서가 주변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무슨 오페라 하우스인 줄 알겠네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마침 준서가 적절하게 해 줬다.
콘서트장답지 않게 내부 인테리어가 고풍스러우면서 어느 객석에 앉아 있든 무대가 잘 보일 수 있는 각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문득 이번 Hip to the Hop의 콘셉트가 떠올랐다.
이번이 시즌 7으로 알고 있는데,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의미에서 클래식이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방송을 만들어 갔다.
이 클래식이라는 단어를 어느 정도 강조하기 위함인지, 일부러 이런 인테리어로 꾸며진 장소를 무대로 섭외한 모양인 듯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 추측에 불과하고, 이게 정답인지 아닌지는 PD가 나중에 인터뷰를 통하든 아님 다른 경로를 통하든 밝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보단 니암이 과연 우승을 할 수 있을지, 어떨지가 더 큰 관심이었다.
객석에 앉은 나와 준서.
일반 객석과 따로 분리되어 있었기에 주변은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우리뿐만 아니라 다양한 VIP 손님들도 우리 근처에 놓여 있는 좌석들을 채우기 시작했다.
이 중에는 내가 아는 얼굴도 몇몇 있었다.
“엇, 태오 씨!”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태오 씨! 저, 기억나세요? 예전에 라디오 녹화 같이했었는데.”
“이번에 발표한 신곡 잘 들었습니다, 태오 씨.”
사방에서 먼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덕분에 나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일 틈이 없었다.
무대를 관람하러 온 건데, 이러다가 정작 우리 멤버의 공연은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 거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사람들도 오늘 이곳에 온 목적이 무대를 보기 위해서라는 것을 기억하는 모양인지, 방송이 시작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얌전히 본인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겨우 앉을 수 있게 된 나는 벌써부터 쌓인 피곤함을 깊은 한숨에 담았다.
옆자리에 앉은 준서가 나를 보면서 쓴 미소를 지었다.
“형, 엄청 바쁘시네요.”
“그러게 말이야.”
오늘 내가 주인공인 것도 아닌데.
이놈의 인기는 어딜 가든 사그라들지 않아서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