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장. 지원사격 (2)
HTB가 막 데뷔했을 때, 아니면 좀 더 넓게 잡아서 두 번째 앨범을 발표했을 때까지 확장을 시켜 생각해 보면, 그 시기에는 우리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열심히 알리는 게 최우선 목표였다.
이제 막 데뷔한 신인 그룹이니까.
홍보가 주된 목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당시에는 방송 프로그램 일정을 하루 단위로 꽉꽉 채워서 했던 적도 수두룩했다.
그러나 이제 세 번째 앨범쯤 되니까 스케줄이 예전보다 많이 널널해졌다.
나는 이 여유를 허투루 쓸 생각이 없었다.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만 축내고 있으면 너무 아까우니까. 그래서 이걸 살려서 니암의 지원사격에 나서기로 했다.
2차 본선 무대는 바로 다음 주.
일주일 남짓 남은 상황 속에서 심사위원들, 그리고 청중평가단에게 선보일 경연곡을 완성해야 한다.
기존에 있는 곡을 커버해도 된다고 했지만, 기왕이면 나와 니암의 무대니까 새로운 곡으로 청중평가단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생각이었다.
원래는 나하고 니암, 이렇게 둘만 참가하려고 했었는데.
‘여기에 한 명 더, 지원자가 생겼지.’
바로 준서였다.
니암과 내가 의기투합하기로 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준서도 같이 뭉치고 싶다는 뜻을 먼저 밝혀 온 거였다.
그래서 알아서 하라고 했다.
HTB 멤버들이 많이 도와주면 도와줄수록 니암에게는 많은 득이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최고의 시나리오는 HTB 완전체가 뭉치는 것이겠지만.
각자의 스케줄이 있다 보니, 이건 아무래도 많이 힘들어 보였다.
어쩔 수 없다. 데이브하고 딜런한테까지 이런 부담을 강요하는 것은 리더로서 너무 억지를 부리는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모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은 리더가 되고 싶은 거지, 수직 관계를 유지하면서 강압적으로 멤버들을 이리 끌고 다니고 저리 끌고 다니고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다.
내가 이런 마인드이기 때문에 우리 멤버들도 나를 많이 따르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데이브는 제외하고.
데이브는 고독한 늑대 같은 녀석이라서, 혼자 알아서 잘하겠지 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
그래도 데이브가 아예 우리들과 담을 쌓고 지내는 건 아니니까.
아무튼, 이렇게 해서 정해진 것들을 최용하 프로듀서에게 그대로 전달했다.
“경연곡 만들 거라는 말까진 들었는데, 준서까지 가세할 줄은 몰랐네요.”
“죄송합니다, 최 프로듀서님.”
“아니요, 아닙니다. 대표님이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그리고 제가 싫어하는 티를 내고 싶어서 이런 말을 한 것도 아니고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최 프로듀서가 노트북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면서 말했다.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가수들이 많으면 많아질수록 그만큼 구사할 수 있는 사운드가 풍부해지니까요. 대표님도 제 스타일 아시잖아요.”
“잘 알죠.”
최용하 프로듀서는 단조롭고 심플하기보다는 화려하고, 강한 이미지를 지닌 곡들을 좋아한다.
물론 그렇다고 앞서 언급했던 취향의 노래들을 아예 작곡할 줄 모른다는 뜻은 아니다.
할 줄은 안다.
심지어 곡들도 괜찮게 잘 뽑아낸다.
단지 선호도의 차이만 날 뿐이다.
“경연 프로그램이니까, 화려하게 가는 게 좋겠죠?”
“네, 그래야죠.”
그래서 일부러 최용하 프로듀서에게 이번 곡 의뢰를 맡길 생각이었다.
“안 그래도 대표님이 저한테 오시기 전에 니암 씨가 자기가 찍은 비트 몇 개가 있다면서 저한테 먼저 들려줬었습니다.”
“그래요?”
“네. 한번 들어 보실래요?”
최용하 프로듀서가 노트북을 통해서 들려준 소리는 나도 들어 본 적 없는 멜로디였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해당이 안 되는데, 이상하게도 니암은 같은 멤버들한테는 자기가 만든 곡이 어떤지 물어보는 것을 꽤나 부끄러워했다.
그래서 이 비트를 듣기 전에 만약 최용하 프로듀서가 ‘제가 작업한 겁니다.’라고 말을 했다면, 나는 그렇구나 하고 그냥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꽤나 본격적인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최용하 프로듀서가 니암을 칭찬했다.
“의외로 니암 씨가 작곡에도 소질이 좀 있나 보더라고요.”
“그 정도인가요?”
최용하 프로듀서가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실 비트 찍는 것도 제가 니암 씨한테 속성으로 알려 줬는데, 어느 순간 제가 알려 주지 않은 것들까지 다 마스터했더라고요. 1차 본선 때에도 본인이 작곡한 거 가지고 올라가서 부르지 않았습니까. 심사위원들은 혹평을 했지만, 하이라이트 영상 조회 수 확인해 보니까 니암 씨 영상이 가장 높더라고요.”
그건 나도 확인했다.
현재 니암이 참가하고 있는 랩 경연 프로그램, ‘Hip to the Hop’ 채널에 1차 본선에 참가했던 지원자들의 개인 무대 영상이 각각 풀로 올라온 적이 있었다.
당시에 심사위원들과 시청자들의 반응이 엇갈렸다.
심사위원들은 니암의 무대에 좋은 점수를 주지 않았지만, 시청자들이 단 댓글을 보면 ‘난 좋은데?’라든지, ‘이 정도면 최소 3패스는 받아야 하지 않았나?’ 하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니암은 1패스에 그치고 말았다.
그 1패스가 Hip to the Hop에 참가한 니암의 목숨을 연명할 수 있게 만들어 준 거였다.
그 심사위원 팀은 니암의 실력을 제대로 본 셈이었다.
나는 최용하 프로듀서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이번에도 우리 영상이 가장 조회 수 높게 나오게 만들 겁니다.”
“좋죠, 그거.”
최용하 프로듀서 입장에서도 본인이 작곡한 곡이 사람들에게 많은 반응을 이끌어 내면 여러모로 득이 될 것이다.
우리가 그걸 얼마만큼 잘 부르느냐.
여기에 따라 곡의 평가가 갈리게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도 간만에 실력 발휘 좀 하겠습니다.”
옷소매를 걷어 올리며 강한 의욕을 드러내는 최용하 프로듀서.
나도 그와 같은 마음이었다.
* * *
단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최용하 프로듀서한테 연락이 왔다.
목적은 이거였다.
곡 나왔습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나와 니암, 준서는 곧장 소속사로 걸음을 옮겼다.
니암이 찍은 비트를 기본 뼈대로 삼아서 거기에 살을 보태는 식으로 작업을 했다.
하기야, 뼈대만 있으면 작업은 금방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다고 곡이 그렇게 허술한 편도 아니었다.
흘러나오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던 니암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가장 먼저 소감을 말했다.
“너무 좋은데요! 역시 프로님은 다르시네요. 아마추어인 저는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아닙니다. 니암 씨가 기본 비트를 워낙 잘 뽑아내 주신 덕분에 저도 빠르게 작업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이제 가사만 얹으면 될 거 같은데. 가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가 쓰겠습니다.”
니암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본인이 하겠다고 적극 어필했다.
작곡도 할 줄 아는 니암이니까, 작사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회의 도중에 니암이 나와 준서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물었다.
“혹시 태오 형도 가사 한번 써 보실래요? 준서, 너는 어때?”
갑자기 나한테 턴이 넘어올 줄은 몰랐다.
가사라…….
“우리가 부를 파트만 쓰면 되는 거지?”
“네. 대신에 통일성은 있어야 하니까 전반적인 가사 주제는 하나로 정해서 써야 할 거 같아요.”
“그래야지.”
앞에서 누구는 사랑 이야기하고, 뒤에서 누구는 돈 이야기하고, 이러면 이게 한 곡이 맞나 하는 이질감이 들 수밖에 없으니까. 니암의 제안은 지극히 당연한 거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럼 주제는 뭐로 정할까?”
니암이 잠시 생각이 잠겨 있을 때, 준서가 손을 번쩍 들면서 말했다.
“이거 어때요? ‘이번 경연 대회는 내가 다 씹어 먹어 버리겠어!’라는 포부를 밝히는 식으로요. 그리고 여기에 내가 랩을 하는 이유 같은 거를 살짝 곁들여도 좋고요.”
최용하 프로듀서가 우리에게 준 곡 멜로디 자체가 상당히 빠르고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 주고 있었다.
여기에 맞게, 가사 역시 조금 세게 가도 괜찮을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준서가 이 느낌을 정확하게 짚어 줬다.
“나는 찬성. 니암, 너는?”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니암의 의견이 어떤지, 먼저 확인하고 넘어가야 한다.
본인이 싫다면 다른 쪽으로 방향성을 잡는 게 맞다.
나나 준서는 어디까지나 조력자일 뿐이니까.
주체인 니암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준서 말대로 하는 게 좋겠네요.”
“오케이. 그러면 각자 가사 쓰고. 오늘 저녁 안에 서로 맞춰 본 다음에 내일 바로 레코딩 들어가자. 그래야 무대 준비도 시작하지.”
“예, 알겠습니다!”
하나씩 차근차근 맞춰 가는 우리들.
이렇게 시간을 보내니까 뭐라고 해야 되나.
마치 HTB 데뷔 준비를 했을 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나쁘지 않네.’
가끔은 한 번씩 초심 찾는 것도 괜찮아 보인다.
* * *
Hip to the Hop 2차 본선 녹화가 있는 날.
예선 때와는 달리, 현장을 찾은 사람들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예선에는 경쟁률이 어마어마했다고 들었으니까.
그만큼 니암이 현재 참가하고 있는 이 힙합 경연 프로그램은 상당한 인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1위만 한다면 인생 역전이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영향력이 어마어마했다.
물론 니암은 이미 내 스카우트를 받고 HTB 멤버로 데뷔한 순간부터 인생 역전이 되었긴 했지만 말이다.
경쟁률이 센 만큼, 경쟁자들 역시 쟁쟁한 실력자들밖에 없었다.
이 사람들을 꺾고 우승한다면, 니암의 실력이 제대로 검증될 것이다.
그래서 나도, 그리고 준서도 니암의 다음 본선 진출을 응원하기 위해 전력투구를 할 생각이다.
PD가 2차 본선 무대를 가질 참가자들을 불러 모았다.
“차례대로 리허설을 해 볼 테니까 준비해 주세요.”
리허설 순서는 실제 무대처럼 돌아간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맨 마지막이겠네.’
턱걸이로 아슬아슬하게 2차 본선에 합격한 니암이었기에 성적순으로 순서를 정하는 방식에서는 꼴찌가 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꼴찌가 나을 수도 있다.
음방을 보면 인기가 많은 가수가 주로 뒤쪽 순서에 배치되곤 하니까.
그래서 크게 실망할 건 아니라고 생각 중이다.
그리고 순서가 어떻게 되었든간에 우리가 잘하면 되는 거니까.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하지만 아직 무대가 시작된 것도 아닌데, 니암이 너무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자, 잘되겠죠?”
니암답지 않게 목소리가 떨렸다.
이런 모습은 데뷔 때 이후로 거의 처음 보는 기분이다.
“잘될 거야. 그리고 아직 본무대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떨고 있으면 안 되잖아. 긴장 풀어. 알았지?”
“네! 알겠습니다!”
누가 보면 이제 막 전입한 신병과 이등병한테 은근히 압박 주는 병장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대기실에서 잠깐 시간을 보내는 사이.
순식간에 우리 차례가 다가왔다.
“니암 팀, 준비해 주세요.”
“잠시만요. 아직 준서가 화장실 갔다가 안 와서요…… 아, 저기 오네요.”
준서도 긴장하고 있는 모양인지 아까부터 화장실을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이 둘을 이끌고 어떻게 무대를 꾸미면 좋을지.
벌써부터 머리가 살짝 아파 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