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라를 구한 톱스타-187화 (187/250)

제49장. 투잡 (1)

제작 발표회 현장은 벌써부터 뜨거웠다.

아직 우리들이 무대에 오르기 전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객석을 가득 채운 채 카메라를 쥐고서 언제든 셔터를 누를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잠시 뒤, 오늘 영화 ‘사랑길’ 제작 발표의 진행을 맡은 MC가 우리들을 소개했다.

“지금부터 배우분들과 감독님을 무대로 모셔 보도록 하겠습니다. 큰 박수 부탁드리겠습니다!”

무대로 향하는 계단에 올라섰다.

내가 먼저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이 내 쪽으로 집중되었다.

뒤이어 아이리스와 오세평 감독에게도 환호성이 쏟아졌다.

MC가 내게 차례를 넘겼다.

“태오 씨부터 자기소개 간략하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사랑길’에서 유세온을 연기하게 된 강태오입니다. 반갑습니다.”

마이크를 쥐고 있지 않은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주자, 사람들의 환호성이 다시 한번 커졌다.

뒤이어 아이리스의 차례.

“클레이 역을 맡은 아이리스라고 합니다. 이렇게 큰 무대에 서는 건 너무 오랜만이라서 많이 떨리고 긴장되는데요. 아무쪼록 예쁘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서 그런지, 예전에 아이리스와 대화를 하다 보면 조금씩 느껴지던 약간의 어눌함이 이젠 완벽히 사라진 상태였다.

지금은 겉모습만 미국인이지, 하는 행동이나 어투를 보면 토종의 향기가 물씬 풍길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오세평 감독의 차례다.

“새로운 작품으로 인사드리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감독을 맡은 오세평입니다.”

이런 자리를 많이 가져 봐서 그런지, 오세평 감독은 특별히 긴장을 많이 하고 있다는 티가 느껴지지 않았다.

유명 감독은 배우 못지않게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이 많을 테니까.

오세평 감독의 이런 여유로운 모습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짧은 자기소개를 마친 우리들은 MC의 지시에 따라 스태프들이 미리 가져다 둔 의자에 앉았다.

아이리스의 경우에는 치마 길이가 짧기 때문에 무릎 담요는 필수였다.

MC가 나를 먼저 가리켰다.

“태오 씨는 제작 발표회가 이번이 처음이신가요?”

“아니요. 처음은 아닙니다.”

“그래요? 어쩐지. 오세평 감독님처럼 긴장을 많이 안 하시고 계신 거 같아서요.”

“이렇게 보여도 속으로는 긴장 많이 하고 있습니다.”

객석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수 활동도 같이 겸하고 계시잖아요. 제가 알기로는 이번에 새롭게 앨범도 준비 중이시다던데.”

“맞습니다. 어제저녁에도 늦은 시간까지 멤버들과 같이 안무 연습하고, 그런 다음에 숙소에서 잠 좀 자고 이쪽으로 바로 넘어왔죠.”

“안 피곤하신가요?”

“네. 헌터로 일할 때보다는 훨씬 편합니다. 적어도 몬스터들한테 기습당해서 죽을 걱정은 없잖아요?”

어색한 웃음소리가 장내에 흘렀다.

진행자가 다른 이야깃거리를 내게 물었다.

“주연은 처음이시잖아요.”

“그렇죠.”

“어떻게 하다가 오세평 감독님의 작품에 출연하기로 결심했는지 궁금합니다. 아, 영화에 관한 스포일러는 신경 써 주시면서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면 오세평 감독님이 많이 난처해지실 거 같아서요.”

“네, 물론이죠.”

아직 영화 개봉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스포일러를 하고 다니는 배우가 있다면 큰일이지 않은가.

적어도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1차적으로는 대본이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을 정도였거든요. 제가 평소에도 오세평 감독님 작품을 많이 좋아하는 편인데, 이번 영화는 여태껏 제가 봐 왔던 오 감독님의 영화와는 많이 다르기도 하고. 남자와 여자 사이의 연애 감정에 대한 표현이 너무 참신해서 이번 제의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대본이 아니라 한 편의 소설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소설의 결말을 읽은 순간, 나는 결심했다.

내가 이 소설 속 주인공이 되고 싶다고.

그래서 이렇게 마이크를 들고 제작 발표회 무대에 서게 된 것이다.

“아이리스 씨도 비슷한가요?”

“네. 저도 태오 오빠…… 아니, 태오 씨하고 같은 느낌을 받아서 오 감독님의 캐스팅 제의에 응하기로 했어요.”

평소처럼 나한테 오빠라고 말을 하려고 했다가 급하게 말을 바꾸는 아이리스.

특별히 칭호에 대해서는 상관없다고 보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 앞이니까. 서로 반말을 하는 사이라 할지라도 이런 자리에서는 존댓말을 사용하면서 격식을 차리는 게 좋긴 하다.

아이리스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태오 씨’라고 말을 했는데, 평소의 아이리스를 잘 알고 있는 나여서 그런지 이 칭호가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지긴 했다.

마치 나를 보고 ‘야’라고 하던 데이브가 ‘태오 씨’라고 말하는 기분이랄까.

아무튼 그렇다.

이때, 진행자가 아이리스에게 살짝 짓궂은 질문 하나를 던졌다.

“출연하기로 결정짓기 전에, 혹시 상대 배역이 태오 씨라는 걸 알고 계셨나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진행자를 보면서 아이리스가 살짝 당황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 양반, 장난기 있는 성격이네.

그래도 크게 난처한 질문도 아니니까, 이 정도는 오케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리스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면서 말했다.

“아니요, 몰랐어요. 그리고 출연 확정 지은 건 제가 태오 씨보다 먼저일 거예요.”

“맞지, 맞아.”

나도 아이리스의 말이 맞음을 알려 줬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그렇군요. 인터넷에 보니까 아이리스 씨하고 태오 씨하고 서로가 서로 캐스팅된 거 알고서 출연 제의를 받아들인 거 아니냐는 팬들의 염원……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속마음이 튀어나오고 말았네요. 아무튼 그런 추측이 있었거든요.”

나와 아이리스가 나란히 캐스팅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팬들도 여럿 있는 걸로 알고 있다.

물론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보이 그룹 멤버니까.

아이리스는 아이돌은 아니라고 해도 그에 못지않게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젊은 모델이다.

그만큼 팬들이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아이리스가 노래만 잘 불렀더라면, 나중에 솔로 가수로 데뷔해도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우리 회사 내부에도 그런 말이 나올 정도니까.

배우들만 인터뷰하면 재미가 없다.

작품에 관해서라면 우리보단 오세평 감독이 더 잘 안다.

“감독님께 질문드리겠습니다. ‘사랑길’이란 영화가 대충 어떤 작품인지 간단하게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네. ‘사랑길’은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라는 이름의 길이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과정을 표현한 작품인데요. 저는 늘 인간관계라는 건 ‘하나의 다리를 놓아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모든 다리가 다 똑같진 않겠죠. 때론 견고한 다리가 있을 테고. 또 다른 건 당장 끊어질 것처럼 마구 흔들리는 위태위태한 다리가 있을 거고요. 연애라는 건 과연 어떤 다리가 놓일까? 생각하다가 나오게 된 게 이번 작품입니다.”

“굉장히 심오한 말씀이시네요.”

“그런가요? 저는 간단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 감독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다리를 놓아 가는 과정. 나는 이 말이 마음에 들었다.

대본을 보면, 오 감독이 말했던 것처럼 이런 것들이 잘 표현되어 있다.

보이지 않는 다리.

그리고 그 다리를 건너면서 점점 서로의 거리를 좁혀 가는 남녀의 이야기.

물론 이 주인공이 나와 아이리스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그래도 캐스팅 자체는 난 굉장히 만족하는 편이다.

대신에 나빈이가 뭐라고 생각할지, 이게 좀 걱정이긴 하다.

진행자가 영화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저는 감독님이 이번에 로맨스 영화를 찍으실 줄은 몰랐거든요. 이전까지는 스릴러물이라든지, 추리물이라든지, 이런 거에 많이 도전하시지 않았나요? 그런데 왜 이번 영화는 로맨스 장르를 택하셨나요?”

“사랑이라는 것만큼 스릴 넘치고 추리가 난무하는 분야가 또 있을까요?”

이것이 오 감독의 대답이었다.

그의 말에 객석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굉장히 멋진 대답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아직 연애를 한 번도 안 해 봐서 공감은 잘 안 되지만 말이다.

어쩌면 이래서 더 오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연애 경험이 없으니까, 이번 작품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나마 체험을 해 보고 싶다는 그런 마음도 살짝 있긴 했으니까 말이다.

* * *

제작 발표회가 끝나고 난 다음 날 아침.

나는 한 손에 대본을, 다른 한 손에는 커피를 들면서 승훈이 형의 차에 올라탔다.

형이 나를 보면서 느낀 바 그대로 말을 해 줬다.

“누가 보면 영화 촬영장 가는 배우인 줄 알겠다.”

“그렇게 보여?”

“어, 그렇게 보여.”

오늘은 촬영이 아니라 안무 연습을 하러 가는 날이다.

배우 활동도 재미있긴 하지만, 나의 본업은 어디까지나 가수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원래 무대에 서고 싶어서,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 연예계에 발을 들이게 된 거니까.

소속사에 오자마자 바로 연습실로 향했다.

미리 와 있던 멤버들이 나를 반갑게 맞이해 줬다.

“형, 어제 제작 발표회 봤어요. 멋있게 나오셨던데요?”

“그래?”

“아이리스 씨하고 나란히 서 있으니까 선남선녀 커플이 따로 없더라고요.”

아이리스 이야기가 나오자, 데이브가 괜히 목소리를 높였다.

“이상한 말 하지 말고 후딱 옷이나 갈아입어라. 오늘 연습 빡세게 하기로 했잖아.”

데이브가 나에게 먼저 오 감독 영화 캐스팅 들어온 것을 받아들이라고 부탁하긴 했지만, 그래도 자기 여동생과 사이좋게 로맨스 영화에 출연하게 된 게 못마땅한 건 여전해 보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데이브의 지금 이 반응 정도면 상당히 준수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결혼식장에 난입한 사람이 ‘이 결혼은 무효야!’라고 외치면서 난동을 부리는 것처럼, 어제 열린 제작 발표회 현장에 찾아와서 그런 행동을 벌이진 않을까 조마조마했었는데.

그래도 데이브는 상식이 있는 편이라서 딱히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만약에 정말로 그렇게 했다면, 아이리스는 아예 데이브와 남매의 연을 끊으려고 했을 것이다.

데이브도 그걸 잘 알기에 속이 쓰리면서도 가만히 있는 거였다.

어떤 의미로 참 대단한 녀석이다.

안무 연습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데이브에게 슬쩍 아이리스가 했던 말을 흘려 줬다.

“아이리스가 너한테 고맙다고 전해 달라더라.”

“뭐가.”

“이번에 나하고 영화 출연하기로 한 거, 허락해 줘서.”

“내가 무슨 영화 관계자도 아니고. 허락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잖아.”

“그래도 오빠로서의 입장이 있으니까. 아이리스는 그 점을 말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

“…….”

아이리스도 데이브가 자신을 얼마나 과보호하려는 사람인지 잘 알고 있다.

모를 수가 없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 지내 온 남매니까.

그나마 기분이 좀 풀린 모양인지, 데이브가 나를 툭 치면서 말했다.

“촬영하면서 내 여동생한테 이상한 짓 하지 마라.”

“안 해, 인마.”

데이브가 아이리스를 아끼는 만큼, 나도 아이리스를 많이 아낀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니까 좀 이상한 거 같기도 하고. 흠, 애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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