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장. 아는 동생 (4)
오세평 감독의 영화 ‘사랑길’에 출연할 배우들의 캐스팅 소식이 하나둘씩 전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여태껏 베일에 감춰져 있던 ‘사랑길’의 주연 배우들이 공개되었다.
나 그리고 아이리스. 두 명이 나란히 오세평 감독의 영화에 출연한다는 내용이 기사를 통해 공개되었을 때, 사람들의 관심은 그야말로 폭발했다.
안 그래도 나하고 아이리스, 이렇게 둘의 투 샷이 보고 싶다는 요청이 쇄도했었다.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유무를 떠나서 이렇게 둘이 같이 묶여 있으면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댓글도 꽤 많았다.
소위 ‘우결 콘텐츠’라고 해야 하나. 사람들은 가상의 커플처럼 두 사람을 엮는 걸 좋아하는 모양인가 보다.
본의 아니게 나하고 아이리스가 이런 대상이 되는 경우가 꽤 많았다.
나도 알고 있고 말이다.
주변 사람들이 말해 준 적도 있었고, 내가 직접 본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현실이 되었으니까, 사람들이 당연히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은 처음으로 모든 배우들이 모여서 단체로 리딩을 하는 날이다.
승훈이 형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나는 리딩을 앞두고 마지막까지 대본을 살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안무 연습실에서 멤버들과 같이 구슬땀을 흘리면서 컴백 준비를 했었는데.
그거 끝나자마자 이렇게 다음 일정을 위해서 움직여야 했다.
웬만한 매니저들은 이런 내 살인 스케줄을 보면서 안 피곤한지, 컨디션은 어떤지 걱정을 하는 게 당연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훈이 형은 내게 이런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내가 안 피곤하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것도 다 우리가 헌터 생활을 하다가 온 사람들이어서 가능한 일이다.
대신에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리스는 벌써 도착했다더라.”
“그래? 일찍 왔네?”
“너하고 처음으로 같이 리딩하는 거니까. 그것 때문에 긴장해서 잠이 안 와 가지고 밤잠 설치다가 그냥 일찍 현장으로 출발했대.”
“형은 그걸 어떻게 알아? 어디서 들었어?”
“아이리스 매니저가 나한테 알려 줬지.”
매니저들끼리는 서로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는 그런 게 있나 보다.
하긴, 단체 스케줄 말고 멤버들이 각각 흩어져서 일정을 소화하는 경우가 발생하거나 아니면 인력이 더 필요한데 회사에서 급하게 파견해 줄 일손이 부족한 때에는 서로서로 돕곤 했었으니까.
비상 연락망 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속 아티스트들 사이에서도 그런 게 있다.
같은 소속 연예인이 컨디션이 너무 안 좋거나 아니면 갑자기 사고를 당해서 본의 아니게 스케줄을 참여할 수 없게 되면, 소속사의 다른 아티스트가 가서 그 펑크 난 스케줄을 채워 주거나 했었다.
우리는 HT 엔터테인먼트라는 지붕 아래에서 한솥밥을 먹게 된 한 식구니까.
식구들끼리의 이런 도움은 당연한 것이다.
승훈이 형이 백미러로 내 쪽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근데 너는 푹 자고 왔나 보다?”
“잘 잤지.”
평소보다 더 꿀잠을 잔 것 같은 느낌마저 받고 있었다.
“긴장은 안 되냐?”
“하긴 하지. 근데 아이리스처럼 잠을 아예 못 잘 정도는 아니야.”
그리고 나는 이미 영화 출연 경험이 있으니까.
그래서 더 긴장을 잘 안 하는 느낌이기도 했다.
반면에 아이리스는 이렇게까지 비중 있는 배역을 맡아 본 적이 없다고 들었다.
그래서 더 긴장하는 것일 수도 있다.
경험의 유무는 굉장히 크니까.
승훈이 형과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 보니, 금세 현장에 도착했다.
대본을 들고 오늘 단체 리딩을 가질 장소로 들어서자,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향해 일일이 인사를 건넸다.
오세평 감독이 직접 내 지정석이 어디인지를 알려 줬다.
“태오 씨! 이쪽 자리입니다. 조금 있다가 여기 앉으셔서 리딩 진행하시면 됩니다.”
“예, 알겠습니다.”
오세평 감독이 가운데 상석 자리에. 그리고 이 상석과 가장 가까운 곳에 나와 아이리스의 자리가 위치해 있었다.
아무래도 나와 아이리스의 대본 리딩이 가장 양이 많고, 또 중요할 수밖에 없으니까.
주연 배우의 숙명이라고 할까. 자리 위치에는 큰 불만이 없었다.
잠시 화장실에 들렀던 아이리스가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오셨어요, 오빠?”
“안녕. 어제 잠 제대로 못 잤다면서?”
“네, 누운 지는 한참 됐는데, 잠이 안 오더라고요. 그래서 중간에 자체 훈련했어요. 달밤에 체조하듯이요.”
체력을 소모하고 나면, 그나마 잠이 좀 오는 편이니까.
그래서 아이리스는 일부러 강도 높게 몸을 풀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헌터들이 가지는 단점이 하나 있었다.
잠을 청하기 위한 운동을 할 경우에는 보통 사람들은 조금 정도만 움직여도 금세 피곤해할 것이다.
밤이 깊었고, 그리고 하루 종일 밖에서 일하다가 돌아왔으니까. 체력적으로 소모가 큰 상태에서 몸을 움직이려고 하니까 에너지가 금세 바닥을 드러내야 정상이다.
하지만 헌터들은 그렇지 않다.
워낙 체력적으로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으니까. 잠이 올 정도로 몸을 풀었다면, 내가 봤을 때에는 동이 트고 나서야 침대에 누울 수 있게 될 것이다.
아이리스도 분명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그래도 크게 피곤해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리스에게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말을 전해 준 뒤.
나도 대본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화장실을 한번 들르기로 했다.
지나가는 동안, 우리 영화에 출연하기로 한 배우들과 숱한 만남을 가졌다.
짧은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안녕하세요!’ 소리가 몇 번이나 나왔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많이 흘러나왔다.
겨우 화장실에 들르고 자리에 앉아서 시간을 조금 보내고 나니까, 곧바로 대본 리딩이 시작되었다.
거의 2시간에 가까운 분량의 영화다 보니, 그냥 대본을 쭉 읽고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다.
중간에 주기적으로 음료로 목을 축이기도 하고. 오세평 감독이 이 부분은 이랬으면 좋겠다는 둥의 피드백을 주는 과정도 포함하고 나니까, 예정보다 훨씬 더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해가 거의 저물어 갈 때쯤에 끝난 대본 리딩.
오세평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우리들에게 고생했다는 말을 건넸다.
그러나 리딩이 끝났다고 오늘의 일정이 전부 끝난 건 아니었다.
“태오 씨하고 아이리스 씨는 잠깐만 카메라 보면서 짧게 리딩 참여 소감 좀 말해 주세요. 나중에 메이킹 필름 소스로 활용할 예정이거든요.”
“네, 알겠습니다.”
요즘은 아카튜브라든지 개인이 동영상을 올려서 조회 수를 얻는 방식이 워낙 활성화가 되어 있다 보니,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이를 통한 마케팅 전략을 사용하곤 한다.
메이킹 필름 공개 역시 우리가 만들어 갈 영화에 관심을 보이는 팬들을 향한 마케팅이자 일종의 팬 서비스라고 할 수 있다.
영화를 위한 일이니까, 안 할 수가 없었다.
가장 먼저 내가 카메라 앞에 섰다.
“방금 막 리딩을 끝냈는데요. 처음이라 그런지 모르겠는데, 시작 전에는 많이 어색했거든요. 근데 시작하고 나니까 분위기가 너무 좋고, 감독님도 이해하기 쉽게 피드백을 주셔서 도움이 많이 되었던 거 같습니다. 재미있는 영화 만들 테니까 많은 관심과 기대 부탁드리겠습니다.”
딱히 대본이 주어진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들을 이리저리 조합해서 막힘없이 내뱉었다.
아이리스 역시 나와 같았다.
“첫 주연 영화다 보니까 많이 떨리는데요.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촬영에 임하겠습니다. 스크린에서 뵐게요. 안녕!”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보이면서 귀엽게 작별 인사까지 건네는 아이리스.
촬영이 끝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피곤에 찌든 듯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 모습을 바로 근처에서 보고 있자니,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내 이런 모습에 아이리스가 볼을 살짝 부풀리면서 화를 냈다.
“웃지 마요, 오빠. 저, 피곤하단 말이에요.”
“미안. 오늘은 고생 많았으니까 일찍 들어가서 자. 데이브도 집에 없으니까 방해할 사람도 없겠지.”
“그건 맞지만…… 그러고 보니 저희 오빠가 태오 오빠한테 혹시 캐스팅 제의 들어간 거, 반드시 받으라고 협박했었어요?”
“이 작품 말하는 거야?”
“네.”
어디서 어떻게 정보를 입수했는지는 모르지만, 아이리스는 나와 데이브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데이브가 직접 말해 줬나?’
그것 말고는 유출 경로가 예상되지 않는다.
뭐, 딱히 숨길 것도 아니니까.
“맞아, 그랬어.”
“설마 그것 때문에 일부러 이번 캐스팅에…….”
“아니야. 어차피 나도 오세평 감독님 이번 대본, 꽤 마음에 들었거든. 데이브가 나한테 와서 그렇게 말 안 했어도 어차피 캐스팅 제의 들어온 거 수락하려고 했었어.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데이브와 다르게 아이리스는 참…… 뭐랄까,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그래도 꽤 있는 아이다.
아이리스가 내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둘이 모여서 짧게 잡담을 나누는 사이, 오세평 감독이 이쪽으로 다가와 물었다.
“두 분, 다음 주에 제작 발표회 있는 거 아시죠?”
“네, 알고 있습니다.”
“저하고 태오 씨하고 아이리스 씨, 이렇게 셋이 참가하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알고 계시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제작 발표회도 참 오랜만이다.
앨범 발표 쇼케이스하고는 느낌이 많이 다르던데.
오랜만에 제작 발표회 무대에 오를 생각에 벌써부터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 * *
오세평 감독이 우리에게 미리 말을 해 줬던 제작 발표회 무대에 참가하기 위해 오늘도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다.
샵에 들러서 메이크업과 헤어스타일링을 받고.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가 제대로 정돈되어 있는지를 확인하려고 했다.
그 전에 짧은 원피스를 입은 아이리스가 나를 마주 보는 형태로 섰다.
“오빠, 잠깐만요.”
칼라 쪽으로 손을 뻗더니, 살짝 접힌 곳을 아이리스가 손수 펴 줬다.
“이제 됐어요.”
“땡큐.”
우리 둘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승훈이 형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뭐야, 벌써 커플 연기하는 거야? 훈훈하고 좋네.”
아직 촬영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승훈이 형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우리 둘을 어떻게든 엮어 보려고 말을 건넸다.
아이리스가 얼굴을 붉히면서 그런 거 아니라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나는 당하고만 있는 성격이 절대로 아니다.
승훈이 형이 먼저 선공을 가했으니까, 나도 반격을 하기로 했다.
“승훈이 형은 아이리스처럼 챙겨 줘야 할 사람을 안 챙겨 주고 있는 게 문제야.”
“응? 뭐가?”
“승훈이 형 좋아하는 여자가 주변에 있는데, 아직도 눈치 못 챘어?”
“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게 누군데?”
“글쎄, 그건 본인이 직접 찾아봐야지.”
내 누나라고는 죽어도 먼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이러니까 아이리스를 여동생으로 두고 있는 데이브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물론 여동생, 누나의 차이는 있지만.
그래도 소중한 가족이라는 건 똑같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