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장. 아는 동생 (1)
여주인공을 맡아 줄 배우가 누구인지, 내가 왜 이토록 궁금해했는지에 대한 해답은 대본에 나와 있다.
아이리스라는 말을 듣자마자 나는 난색을 드러내면서 대본 중간 후반부를 펼쳤다.
“후반부 장면에 키스신 있는데.”
“진짜?”
승훈이 형이 내가 펼친 대본을 바라봤다.
한참을 뚫어져라 보던 승훈이 형이 내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냈다.
“좋겠네, 너.”
“갑자기 무슨 소리야?”
“상대가 아이리스잖아.”
“오히려 그게 문제라고. 데이브가 뭐라고 생각하겠어.”
아무리 연기라 할지라도 내가 자기 여동생과 키스신을 촬영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게 된다면, 데이브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을 것이다.
승훈이 형도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이 키스신 때문에 내가 이 드라마를 고른 건 절대로 아니다.
아까도 언급했지만, 남녀 사이의 연애 감정선을 정말 세밀하게 잘 다루는 스토리가 마음에 들어서였다.
그래서 사실 여배우가 누가 되든 난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오세평 감독이 직접 캐스팅 제의할 테니까. 그만큼 연기력이 받쳐 주는 배우라는 뜻이기도 하고.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영화에 출연하는 거니까. 연기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영화가 개봉되자마자 욕을 바가지로 먹을 수 있다.
내가 아무리 영화에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 실력을 뽐낸다 하더라도 망작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래서 상대 배우의 연기 실력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아이리스가 연기를 잘했나?”
키스신 여부는 둘째치고. 나는 이게 가장 궁금했다.
승훈이 형도 어깨를 으쓱이면서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글쎄. 근데 아이리스가 드라마에 단역으로 출연한 적은 몇 번 있지 않았나.”
“그랬어? 몰랐네.”
내가 영화에 출연해서 각종 시상식 무대에 올라서기 전까지 사실 드라마나 영화에 그렇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건 아니었다.
내 관심사는 헌터였을 때에는 아이템과 몬스터, 게이트였고.
그 이후에는 방송, 그리고 가수 활동이었다.
처음부터 내가 연기를 하게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 못 하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드라마를 매번 챙겨 보거나 하진 않았었다.
물론 연기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순간부터는 요즘 트렌드를 연구하기 위해서라도 꾸준히 드라마, 영화 콘텐츠를 접하고 있긴 하지만.
최근에는 이래저래 일이 많았기 때문에 내가 놓친 드라마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하이라이트 정도는 매번 챙겨 보고 있었다.
승훈이 형이 방금 말한 것은 ‘단역’이었으니까. 하이라이트 영상에 아이리스의 모습이 자주 나오진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아이리스의 연기 활동을 아예 모를 수밖에 없었다.
“근데 단역만 하다가 갑자기 주연으로 캐스팅된 것도 놀랍긴 하네.”
“연기에 재능이 있나 보지. 우리야 어차피 아마추어에 불과하니까. 오세평 감독님은 우리가 못 본 아이리스의 가능성을 발견하셨을지도 모르지.”
“형, 방금 그 말은 틀렸어.”
“응? 뭐가?”
승훈이 형이 눈을 여러 차례 깜빡이면서 내 지적에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이리스가 재능이 있다는 말이?”
“그게 아니라. 아마추어 말이야. 형은 그럴 수 있지만, 나는 이미 연기자로 데뷔까지 했다고. 아마추어는 아니야.”
내 말에 승훈이 형이 피식 웃었다.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 미안하다.”
물론 주인공으로 나왔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날, 우리’에서 없어선 안 될 조연 역할이었으니까.
게다가 그 한 번의 경험 덕분에 나는 연기라는 분야에 어느 정도 눈을 뜨게 되었다.
아예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에 비해서는 훨씬 낫다는 뜻이다.
“아이리스는 내가 상대역이 될 수도 있다는 거, 알려나 모르겠네.”
“너한테 캐스팅 제의를 했다는 것까지는 아마 알지 않을까?”
“글쎄. 모르지.”
그나저나 이걸 어쩐다.
대본은 참 마음에 드는데.
상대 배역이 아이리스로 결정 났다면, 내 입장이 많이 난처해진다.
아이리스는 우리 회사 소속 아티스트이기도 하고.
그리고 데이브의 여동생이니까. 내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고민 좀 해 봐야겠네.’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 있으니까.
천천히 결정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 * *
이틀 뒤.
지난번에 누나가 도와준 덕분에 무사히 꾸린 짐을 가지고 다시 숙소로 돌아오게 되었다.
두 번째 앨범 활동이 끝난 이후로 다시 복귀하게 된 숙소.
이전에는 준서나 니암, 딜런까지 완전히 숙소를 비운 상태에서 돌아왔었기에 ‘썰렁하다’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곤 했었는데.
반겨 주는 멤버들이 셋이나 있다 보니 이번에는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형!”
“방은 지난번에 쓰던 곳 쓰실 거죠?”
“어, 그래야지. 아니면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한번 방을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긴 한데.”
세 멤버들이 내 말에 고개를 동시에 가로저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새로운 마음가짐보다는 익숙하고 편안한 마음가짐이 더 좋아요.”
멤버들이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데, 나 혼자서 완강하게 방을 다시 로테이션으로 돌리자고 말을 하기에는 애매했다.
물론 팀 내에서의 내 영향력이 굉장히 강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나는 그렇다고 이걸 가지고 멤버들에게 갑질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멤버들뿐만 아니라 소속사 직원들도 마찬가지다.
그런 짓을 하면 언젠간 부메랑처럼 나에게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소위 말해서 업보를 쌓는 행위는 웬만하면 지양하고 싶다.
“데이브는? 아직 안 왔어?”
“네. 차가 좀 막혀서 좀 늦을 거 같대요.”
“그래?”
나보다 먼저 와서 짐을 풀기로 했는데. 대체 얼마나 차가 많이 막히기에 아직도 감감무소식인지 모르겠다.
아니면 다른 일이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오늘 데이브가 스케줄이 있던가.’
잘 모르겠다.
나는 내 개인 활동 일정하고 HTB 팀 단위 스케줄 정도만 기억하고 다니는 편이다. 데이브나 멤버들 개개인의 일정까지 일일이 다 체크하고 있진 않다. 이건 승훈이 형이나 다른 매니저들이 알아서들 잘 관리해 줄 테니까.
두 번째 앨범 활동 당시에 내가 썼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몇 달 만에 보는데도 불구하고 방 내부는 상당히 깨끗했다.
준서가 어깨를 펴면서 마치 자기 자랑을 하듯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 오기 전에 니암 형하고 딜런 형하고 셋이서 열심히 청소했어요.”
“굳이 청소 안 해 줘도 되는데…….”
“그래도 오랜만에 복귀하는 건데. 기왕이면 방이 더러운 쪽보다는 깨끗한 쪽이 더 기분 좋지 않나요?”
그거야 맞는 말이다.
그리고 동생 멤버들이 나를 생각해서 열심히 청소해 줬다고 하는데. 기쁠 수밖에 없다.
어디 가서 이런 친절을 받기가 요즘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하나씩 짐을 푸는 사이,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나를 도와주던 준서가 먼저 반응했다.
“데이브 형 왔나 보네요.”
“가서 문 열어 줘. 나는 어차피 혼자 하면 되니까.”
짐이 엄청 많은 건 아니고.
그리고 이미 이곳에서 지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어디에 무슨 물건과 옷가지를 놓으면 되는지 데이터베이스가 내 머릿속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었다.
나는 그저 박스 안에서 짐을 꺼낸 다음에 원래 있던 물건들의 위치대로 놓기만 하면 된다.
복잡한 일도 아니었기에 준서를 먼저 보내기로 했다.
고개를 끄덕인 준서가 내 말대로 현관문을 열어 주기 위해 방을 나섰다.
잠시 뒤.
바깥쪽에서 데이브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태오 어디 있냐?”
“태오 형요? 지금 방에 있을 텐데요. 왜요?”
활짝 열린 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데이브.
고개를 돌려 데이브를 본 순간,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야? 무슨 일이 있었길래 심술이 잔뜩 난 표정을 하고 있냐?”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 싶었다.
왜냐하면 데이브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나부터 먼저 찾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뭐, HTB라는 같은 그룹의 일원이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서먹서먹했던 그 분위기가 흔적도 없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지금도 가끔은 그런 분위기가 되살아날 때가 있다.
그렇다고 이것이 큰 충돌로까지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이제는 나도, 데이브도 그때보다 어른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최근에 데이브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일이 없……진 않네.
하나 짐작 가는 게 있긴 하다.
오세평 감독의 작품에 출연하느냐 마느냐. 최근에 이걸 두고 나는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작품은 좋지만, 아이리스와의 키스신 때문에 데이브의 강력한 반대가 펼쳐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겨우 HTB라는 같은 팀으로서의 단결과 유대감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영화 출연 한 방으로 인해서 이 모든 것들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내 마음에 쏙 드는 영화를 두고 다른 배우에게 배역을 양보하는 것도 영 신경이 쓰이고.
이래저래 고민이 많은 상황이긴 했다.
‘설마 데이브가 이걸 알게 된 건 아니겠지?’
적어도 나나 승훈이 형은 데이브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를 굉장히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데이브를 보고 있자니, 확신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데이브는 알고 있다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준서가 어색한 미소를 억지로 지으면서 말했다.
“오, 오늘 빨래 돌리는 날이라는 걸 깜빡했네요. 저, 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
저건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빨래는 오늘 아침에 이미 돌렸던 걸로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준서가 치사하게 먼저 자리를 비운 사이.
나를 노려보는 데이브의 눈빛이 갈수록 차가워지고 있었다.
“……왜 그러냐, 갑자기?”
일단은 모른 척 연기하기로 했다.
혹시 모르지 않은가. 대본 건수 말고 내가 모르는 사이에 데이브에게 뭔가 실수라도 저질렀을지도.
그러나 데이브는 마치 확인 사살을 하듯 내게 딱 잘라 말했다.
“너, 최근에 오세평이라는 감독한테 캐스팅 제의받은 거 있지 않냐?”
“…….”
안 좋은 느낌은 왜 이리 항상 잘 들어맞는지 모르겠다.
“뭐, 그렇긴 하지. 근데 그건 어떻게 알았어?”
“어제 오세평 감독 작품에 출연하기로 한 배우하고 같이 프로그램 녹화하다가 듣게 되었다. 오세평 감독이 너한테 남자 주인공 역할 맡기고 싶어 한다고 그러던데.”
운도 지지리도 없지.
대한민국 땅은 너무 좁아서 문제다.
“마침 그 영화에 내 여동생도 최근에 출연하기로 확정을 지었고.”
“그……랬구나. 몰랐네.”
“근데 아이리스가 출연하기로 한 그 영화,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는데 로맨스 영화더라. 그리고 대본 보니까 키스신……도 있고.”
키스신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유독 말끝을 흐렸다.
알 건 다 아네.
여기서 내가 부정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깨달았다.
지금의 현 상황을 솔직하게 말하려던 찰나에.
데이브가 먼저 충격적인 말을 내게 들려줬다.
“너, 그 영화 출연해라.”
“뭐? 출연하라고?”
“어. 남자 주인공 역할 맡으라고.”
내 예상과 정반대되는 말이 튀어나왔다.
이 녀석이 왜 이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