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라를 구한 톱스타-181화 (181/250)

제47장. 잠시의 평화 (4)

아이템이 반드시 몬스터들과 싸울 때에만 도움이 되라는 법은 없다.

지금처럼 화창한 날씨를 비 내리는 날로 둔갑시킬 때도 사용할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아이템이 가지고 있는 기술력을 이용해서 좀 더 나은 편의 기능을 쓸 수 있도록 헌터협회 연구소를 중심으로 여기저기서 개발 중이라고 들었다.

비가 내리게 만드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렇다고 날씨가 맑은 것까지는 바꿀 방법이 없었다.

“이건 나중에 후보정으로 CG 처리를 하시든가 해야겠네요.”

“네,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저희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촬영감독이 내 말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선보이면서 스태프들을 재촉했다.

내가 승훈이 형을 통해 가져와 달라고 한 이 스태프 아이템의 효과는 무한히 지속되는 게 아니다.

비를…… 아니, 공중에 물을 뿌리게 하는 이 기술의 시간은 제한적이다.

1시간 정도가 끝이다.

이 1시간 이내에 우리가 오늘 촬영해야 할 분량을 모두 마쳐야 한다.

“자! 바로 촬영 들어갈 테니까 스탠바이 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촬영감독의 지시에 따라 우리들은 사전에 안내받았던 위치대로 섰다.

입고 있는 와이셔츠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줄기에 의해 젖어 들었다.

비 내리는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일까, 첫 시도에서는 여러 차례 NG가 나긴 했지만, 그래도 나를 포함해서 멤버들 전체가 조금씩 감을 잡기 시작했는지 처음에 비해 지금은 전혀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아이템 효과가 끝나기까지 20여 분 정도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비 맞으면서 춤추는 신 촬영이 모두 종료되었다.

끝나자마자 스태프들이 가져다준 수건으로 얼굴과 머리카락, 그리고 몸에 묻어 있는 물기들을 대충 닦아 냈다.

씻고, 몸 말리고, 옷 갈아입고.

그런 다음에 스튜디오로 이동해서 다시 촬영을 재개할 예정이다.

이동하기 전에 촬영감독이 내게 다가와 다시 한번 고마운 마음을 드러냈다.

“태오 씨 아니었으면 오늘 촬영 못 했을 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다른 사람 뮤직비디오 촬영도 아니고, 저희 거니까요.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하는 게 맞죠.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겸손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었다.

크게 보자면, 결국 이것도 내 일이니까.

선심을 쓴 게 아니라 스태프들과 같이 문제 해결을 한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촬영감독과 이야기를 나눈 뒤, 승훈이 형이 내게 스태프 아이템을 들어 보이면서 물었다.

“태오야, 이거 어떻게 할 거냐?”

혹시나 해서 내가 촬영감독에게 아이템을 가리키며 물었다.

“비 오는 장면, 이제는 더 없죠?”

“네, 없습니다. 다시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그렇대, 형.”

승훈이 형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아이템은 차에 가져다 놓겠다고 말했다.

‘그나저나 앞으로 쓸모없을 줄 알았던 아이템이었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가만있어 보자.

그러면 다른 아이템들도 이런 식으로 나중에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 아닌가?

레이드 시대가 끝나고 아이템, 기타 게이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다른 광물 등, 공급처가 사라진 덕분에 이들에 대한 수요가 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가격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중이었다.

얼마 전에 아이템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서 필요 없는 것들 다 처분하려고 경매로 내놓을까 했었는데.

‘당분간은 가지고 있어야겠네.’

레이드 시대가 다시 열리지 않는 이상, 내가 가지고 있는 아이템들은 가격이 무한으로 뛰게 될 것이다.

물론 방금 말했듯이, 어디까지나 두 번째 레이드 시대가 안 온다는 가장하에서 말이다.

* * *

내 활약 덕분에 날씨 문제로 딜레이될 뻔했던 촬영 일정에 가속이 가해졌다.

그로 인해서인지 예정된 촬영 시간보다 훨씬 빠르게 오늘의 뮤직비디오 촬영 일정이 종료되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우리가 얼마 전에 녹음했던 세 번째 앨범 타이틀곡, ‘크게 외쳐 봐’를 틀고서 귀를 기울였다.

여러 차례 말한 적 있지만, 나와 HTB, 그리고 HTG의 노래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아드레날린을 자극할 만큼 흥을 이끌어 내야 한다.

그래서 이번 노래도 제목처럼 피가 끓는, 그런 열정이 느껴지는 콘셉트로 레코딩했다.

시원하게 내지르는 샤우팅 파트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기도 했다.

메인보컬을 담당하고 있는 내 파트이기도 했기에 더 마음에 드는 것일 수도 있다.

‘믹싱도 잘됐어.’

나보고 이번 앨범에 점수를 매겨 보라고 한다면, 100점 만점에 95점을 주고 싶다.

5점은 어디 갔을까?

약간의 여지를 남겨 두는 것이다.

이번 앨범이 100점이라고 한다면, 이전보다 더 나은 앨범을 만들어야겠다는 다음 목표가 사라지는 거 아니겠나.

그래서 다음 앨범 몫까지 남겨 두고 싶었기에 일부러 100점이 아닌 95점을 주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고 앨범 발매를 거듭해 갈수록, 당연히 더 나아진 모습으로 팬들 앞에 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게 가수니까.

‘제이커 사건이 끝나고 난 다음에 작업해서 그런지, 부를 때에도 편했지.’

마음 한쪽 구석을 짓누르던 부담이 사라지니까, 녹음도 훨씬 잘된 느낌이다.

이번 곡도 좋은 성적을 거둘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서 집에 도착한 나는 싸다 만 짐들을 보면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잊고 있었네.’

컴백 일정이 구체적으로 정해짐과 동시에 나와 데이브의 숙소 복귀 날도 정해지게 되었다.

멤버들끼리 한 군데에 뭉쳐 살아야 우리를 픽업하러 다니기도 편할 테니까.

그래서 다시 숙소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를 했어야 했는데.

깜빡하고 말았다.

‘어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시간 날 때마다 미리미리 정리 좀 해 둘 걸 그랬네.

물론 중간에 잊어버린 물건이 있으면 내가 숙소와 집을 오가며 챙겨도 상관은 없다.

그러나 앞으로 가수와 배우 활동을 겸하게 될 텐데, 그럴 정신머리와 시간적 여유가 과연 있을지 벌써부터 의심이 된다.

가급적이면 오늘 안에 다 정리하는 게 좋다.

그래야 미래의 내가 편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피곤해도 해야지, 뭐.’

별수 있겠나.

옷소매를 걷어 올리려고 할 때.

띵동!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초인종을 눌렀다.

“예, 누구세요?”

처음엔 승훈이 형인 줄 알았다. 우리 집을 직접 찾아올 만한 인물은 승훈이 형 말고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니지.

한 명 더 있다.

-누나야. 문 열어 봐.

아송 누나가 인터폰 화면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면서 말했다.

문을 열어 주면서 누나를 직접 맞이했다.

“누나가 우리 집엔 어쩐 일이야? 그보다 내가 이 시간에 집에 있을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

“승훈 씨한테 물어봤지.”

승훈이 형이라면 내 일정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물어보면 내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단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승훈이 형이 좋아했겠네.”

“응? 무슨 소리야?”

“아무것도 아니야.”

승훈이 형은 아직도 우리 누나에게 마음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아직 누나가 다른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상태다.

언젠간 말해 주긴 할 텐데.

내가 다 마음이 아파서 선뜻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승훈이 형하고 나하고 하루 이틀 봐 온 사이도 아니고.

그래서 그런지 사실을 곧이곧대로 전해 주는 게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나가 겉옷을 벗으면서 거실 한쪽 구석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짐 상자들을 가리켰다.

“아직 숙소로 가져갈 짐들 다 못 챙겼지?”

“어, 맞아.”

“내가 도와줄 테니까 오늘 내로 다 끝내자. 알았지? 너, 바빠서 계속 짐 싸는 거 뒤로 미루고 있다며.”

“그것도 승훈이 형한테 들은 거야?”

“아니, 이건 네가 저번에 나한테 직접 말해 줬던 거야.”

그랬나?

내가 기억력이 나쁜 편은 절대로 아닌데. 이런 걸 보니까 한동안 정신이 없었긴 했나 보다.

누나가 와서 그런지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든든함을 느꼈다.

누나의 정리 실력은 상당하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봐 왔었기 때문에 장담할 수 있다.

내 옷가지들을 챙기던 누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바지는 좀 버리는 게 어떠니?”

“왜?”

“너무 낡았잖아. 너, 그래도 잘나가는 연예인인데, 깔끔하게는 입고 다녀야지.”

“어차피 그거, 밖에 나갈 땐 안 입어. 잠옷으로 입는 거니까 그냥 가져가게 놔둬.”

“아니면 잠옷을 새로 사든가.”

“옛날에 입었던 잠옷이 길이 잘 들어서 그런지 더 편하고 좋아. 새 잠옷은 뭐랄까, 정이 안 간단 말이지.”

“이 옷도 한때는 새 옷이었을 텐데.”

“지금은 내 몸에 알맞게 맞춰진 옷이잖아?”

“어휴, 정말. 한마디를 안 지려고 하네.”

누나 동생이니까.

남매다 보니 어쩔 수 없다. 둘 다 성격이 비슷했기에 사소한 충돌이 벌어져도 둘이 서로 잘 양보를 안 하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누나가 양보하는 편이었다.

내가 논리적으로 잘 설명해서라기보다는, 누나니까 그냥 누나가 지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는 이걸 나이가 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어렸을 때에는 몰랐지.’

하지만 잠옷에 대한 것만은 양보하기가 애매했다.

밖에 나갈 때에만 안 입고 다니면 되니까.

* * *

그래도 누나가 도와준 덕분에 생각보다 짐 정리가 굉장히 빨리 끝났다.

“이렇게 빨리 끝날 거, 미리 끝내 뒀으면 좋잖아.”

누나가 짧은 잔소리를 펼쳤다.

나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뭐라 할 말이 없었기에 ‘그러게.’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누나는 오늘 일 없어?”

“쉬는 날이야.”

“그러면 저녁이라도 먹고 갈래? 오늘 내 짐 정리 도와줬으니까 내가 맛있는 거 살게. 근처에 괜찮은 양식집 있는데, 어때?”

“됐어. 그냥 배달시켜 먹자.”

“왜, 또?”

“네가 가게 가자고 하면 무조건 비싼 데 갈 거 같아서.”

어휴, 저 짠순이.

“누나, 저번에도 말했지만, 나 돈 많다고. 한 끼 정도는 돈 걱정 안 하고 마음껏 먹을 수 있잖아.”

내 진심이 어느 정도 통했는지, 누나가 마지못해 알았다고 대답했다.

내가 잘 아는 가게로 향한 우리들.

가게 사장이 나를 보자마자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태오 씨! 오랜만에 오셨네요?”

“저번에 먹었던 토마호크 세트 있죠? 그걸로 주실래요? 누나, 간만에 와인도 한잔할까?”

“너, 차는?”

“대리 부르면 되니까.”

내가 연예계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굳게 결심한 게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술 마시고 절대로 운전대를 잡지 않는다는 거다.

이건 굳이 연예인이 아니라 운전면허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한테는 당연한 일이다.

이 당연한 걸 안 지키는 사람들이 있어서 문제지.

식사를 하던 도중에 나는 누나에게 슬쩍 저번에 들었던 남자 이야기를 물었다.

“마음에 두고 있다는 그 남자, 아직도 좋아해?”

“……뭐야, 그 이야기는 왜 꺼내, 갑자기.”

“궁금하잖아. 내 친누나가 누굴 좋아하게 되었는지 동생으로서 당연히 궁금한 거 아니야?”

“…….”

오랜 고민 끝에 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아까 통화도 했었고…….”

“누구랑?”

“……그 사람이랑.”

가만.

설마 누나가 좋아한다는 사람이.

“승훈이 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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