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라를 구한 톱스타-180화 (180/250)

제47장. 잠시의 평화 (3)

제이커 사건이 벌어진 지 두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아직 정체불명의 여성이라는 불안 요소가 남아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 여자는 제이커처럼 대놓고 테러를 자행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원래 사람은 불안 요소가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내 눈앞에 당장 위기가 펼쳐지지 않으면 방심이라는 이름의 안심을 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요즘은 나도 그러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확실히 너무 조용하니까 의심이 될 정도네.’

사무실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을 무렵, 협회장이 오랜만에 내가 있는 HT 엔터테인먼트 사무실을 방문했다.

내 책상 위에 올라가 있는 명패를 보고서 짧은 감탄을 흘렸다.

“연 대표가 너한테 회사 넘겼다는 말을 듣긴 했는데, 이렇게 명패로 보니까 신기하구만.”

“저도 처음엔 그랬어요.”

나는 헌터로 활동한 이후부터 줄곧 내 사업을 진행해 본 적이 없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귀찮아서였다.

사업을 하게 되면 신경 써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게 되어 버릴 테고. 안 그래도 바쁜데, 다른 것까지 일일이 체크해야 할 게 분명해서 내 명의로 사업체를 차릴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HT 엔터테인먼트를 출범할 때에도 나는 일부러 이사직에 눌러앉았던 거였다.

그런데 이렇게 HT 엔터테인먼트를 통째로 넘겨받게 될 줄이야.

그래도 예전에 품었던 귀찮음에 대한 걱정은 많이 사라진 상태로 넘겨받았기에 큰 불편함은 없었다.

내 직함과 재산 보유 현황에 약간의 변동만 생겼을 뿐, 여태껏 해 왔던 일에는 큰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협회장이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아무것도 대접 안 하는 건 매너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직원을 시켜서 마실 거라도 한 잔 가져와 달라고 연락을 취했다.

“커피 드릴까요, 아니면 차?”

“커피. 아메리카노 시원한 걸로 하나 줘.”

“네, 알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들의 목을 축여 줄 음료들이 세팅되었다.

협회장이 내 사무실 주변을 둘러보면서 물었다.

“근데 사무실은 왜 안 옮기고 그대로냐?”

“여기가 더 편해서요.”

좀 더 큰 사무실로 옮기는 게 낫지 않겠냐는 의견이 있긴 했었지만, 어차피 내가 사무실에 오래 있을 만한 사람은 아니고.

기껏해야 손님맞이용 정도로만 쓸 텐데, 그러기에는 기존에 사용했던 사무실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

협회장은 내 의견을 존중하겠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의 스타일이 있는 거니까. 연예계 일은 요즘 어떠냐? 보니까 예전에 비해서 활동이 뜸한 거 같던데.”

“카메라 앞에 서는 경우만 줄었을 뿐이지, 일 자체는 오히려 늘었어요.”

“그래?”

“네. HTB 세 번째 앨범 준비하고 있고, 영화 캐스팅 들어온 거 검토 중이고…… 그러고 보니 내일은 뮤직비디오 촬영 잡혀 있네요.”

일정을 들어 보니까 2박 3일로 잡고 있다고 하던데.

내일부터 하루 종일 스튜디오에서 살다시피 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려 온다.

그럼에도 협회장은 이런 내 모습을 보면서 허허 웃을 뿐이었다.

“그래도 재미있지?”

지금의 내 솔직한 심정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미있다.

사실 이게 맞다.

바쁜 건 부정할 수 없지만, 그런데도 나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스트레스로 느껴진 적이 거의 없었다.

물론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에는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긴 했지만.

그래도 이 일을 관두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니까.

그리고 내가 헌터가 되기 이전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니까.

협회장도 이걸 잘 알기에 방금과 같은 말을 한 거였다.

“역시 레이드 시대보다는 평화의 시대가 더 좋긴 하더라고요.”

“당연한 말을. 나도 내 일거리가 없어져도 좋으니까 제발 그 지긋지긋한 몬스터하고 게이트한테서 좀 벗어났으면 좋겠다.”

게이트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내가 협회장에게 가장 묻고 싶은 말을 꺼냈다.

“아직도 게이트를 열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선 알아내지 못했습니까?”

“어. 이 소장이 열심히 조사해 보고 있는데, 아직도 모르겠대. 이철민 소장 성격 알지? 지금 당장은 모른다고 말해도,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자기가 꼭 알아내겠다고 꼭 말하는 거.”

“이철민 소장은 궁금한 게 있으면 절대로 못 참는 성격이니까요.”

우리 헌터들이 기본적으로 강한 몬스터를 상대로 승부욕을 가지고 있다면, 이철민 소장의 경우에는 자신이 모르는 수수께끼에 대한 승부욕을 가지고 있다.

세상 모든 지식을 손에 넣겠다! 정도의 포부는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의 눈앞에 아른거리는 퀴즈 정도는 반드시 풀고 말겠다는 성격의 소유자다.

그런 독기를 가진 이철민 소장도 몇 달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감감무소식인 걸 보면.

“제이커가 처음부터 허세를 부렸던 게 아닐까요?”

아니면 자신이 게이트를 열 수 있다고 착각을 했다거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 말고는 도저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쓰러뜨렸던 드래곤이라면 몰라도, 인간의 힘으로 게이트를 연다는 건 말이 안 되니까.

협회장도 이 점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었던 모양인지, 여러 차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였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만에 하나라도 정말 제이커가 그런 방법을 찾아냈다면, 우리 입장에선 무조건 알아내는 수밖에 없겠지.”

우리가 이렇게까지 집착을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걸 알아내야 그 혹여나 나중에 있을지 모르는 제2의 레이드 시대를 미연에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이트가 어떤 원리로 어떻게 열리는지, 방법도 모르는데 우리가 그걸 무슨 수로 미리 막을 수 있겠나.

그래서 다들 이렇게 제이커가 남긴 마지막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거였다.

협회장이 내 어깨를 툭툭 토닥이면서 말했다.

“어차피 우리가 백날 고민해 봤자 지금의 문제가 뚝딱 해결되는 것도 아니니까.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보면 나중에는 답안이 보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네 일에 집중하도록 해. 이 말 해 주려고 오늘 잠깐 네 회사에 들르겠다고 한 거야.”

“그랬군요.”

나는 또 이철민 소장한테서 뭔가 중요한 거라도 들어서 나에게 알려 주려고 온 건 아닐까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협회장의 이런 말이 내게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은연중에 신경 쓰고 있었던 고민거리 하나를 조금이나마 덜어 낸 느낌이랄까.

“나중에 저희 콘서트 시작하면, 그때 협회장님도 와 주세요. 축하 영상도 찍어 주시고요.”

“그래야지. 우리 협회 소속 헌터들이 컴백한다는데, 내가 가만히 있으면 쓰나.”

시간이 잘 해결해 줄 거라고 믿으면서 나는 협회장을 보내고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 * *

난 뮤직비디오 촬영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금까지 HTB 그룹 활동도 그렇고, 그 이전에 솔로로 데뷔해서 일찌감치 가수로 일하고 있었으니까.

그동안 나름 많은 뮤직비디오를 촬영했다고 자부했다.

그럼에도 오늘의 뮤직비디오 촬영은 꽤나 어려웠다.

표정이 자연스럽게 안 나온다든지, 아니면 멤버들끼리 합이 안 맞는다든지 하는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날씨 때문이었다.

촬영감독이 오늘따라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난색을 표현했다.

“비 온다고 해서 일부러 오늘로 촬영 일자를 잡았는데, 제가 요 근래 봤던 날씨 중에서 가장 맑은 날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능력 있는 헌터라 할지라도, 날씨는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다.

특히나 뮤직비디오 촬영팀 입장에서는 더욱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촬영 일정을 미루기에는 제작팀이나 우리나 서로 부담이 많이 가는 상황이다.

오늘도 겨우 일정을 맞춘 거였기 때문이었다.

준서나 니암, 딜런은 괜찮다.

나와 데이브가 문제였다.

HTB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멤버인 우리 둘이 뮤직비디오에서 제일 힘을 주려는 장면에서 빠지면 안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촬영감독도 웬만하면 오늘 촬영을 진행하고 싶어 했다.

그렇다면 비가 오는 촬영 장면을 빼는 건 어떨까?

이 의견도 금세 묵살되었다.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비를 맞으면서 춤 연기를 하는 장면보다 이번 노래에 잘 어울릴, 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사 내에서도 ‘비를 맞으며’라는 내용의 문구가 나온다.

상처받은 마음을 하늘에서 쏟아지는 장대비를 통해 씻어 내는 장면을 연출하고 싶었기에 이런 콘티가 들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날씨가 변덕을 부려서 판을 깔아 주질 않으니.

“난감하네요.”

스태프들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번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살수차라도 한번 알아볼까요?”

“오늘 당장 빌려 올 살수차가 있을까?”

“되든 안 되든, 일단은 연락이나 돌려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기도 했다.

물론 바로 섭외가 된다면 걱정이 없겠는데.

세상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는 것도 아니고.

바로 지금 살수차를 구해 와야 하는데, 그게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뭐래?”

“4시간 뒤에는 도착할 수 있다고 하던데요.”

“4시간? 안 그래도 촬영할 거 많은데 그 시간까지 현장 딜레이시키고 있으라고?”

“그래도 여기저기 연락을 다 돌려 봤는데, 그게 가장 빠른 시간대입니다.”

“…….”

스태프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었다.

이 고민거리를 해결하기 위해서 잠자코 있던 내가 나서기로 했다.

“비 내리게 하면 되는 거죠?”

내 말에 촬영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잠시 현장을 비웠던 승훈이 형에게 연락을 취했다.

정확히 1시간 뒤, 승훈이 형이 다시 현장을 찾았다.

“이거 맞지?”

“땡큐. 고마워, 형.”

내게 기다란 지팡이 같은 아이템 하나를 건네주는 승훈이 형.

촬영감독이 내 손에 들린 지팡이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이게 뭡니까?”

“여러분들의 고민을 말끔하게 해결해 줄 아이템입니다.”

그렇게 말하고서 나는 지팡이를 똑바로 세운 채 지면 위에 올려뒀다.

데이브는 내가 방금 사용한 아이템의 효과가 뭔지 알고 있다는 듯이, 근처에 놓여 있던 우산을 찾아 펼쳤다.

준서가 이런 데이브의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형, 갑자기 우산은 왜요? 햇빛 피하려고 그러시는 거예요?”

“너도 미리 우산 하나 챙겨서 쓰는 게 좋을 거다.”

“네?”

데이브의 말이 끝나자마자.

쏴아아아아-!

촬영 현장에 집중적으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자연적으로 내리는 비는 아니었다.

내가 방금 사용한 아이템에 옵션으로 붙어 있는 스킬이다.

생각보다 빗줄기가 굵은 모양인지, 스태프들이 부랴부랴 우산을 찾기 시작했다.

장비가 젖을 일은 없었다. 그건 내가 일부러 비가 내리는 범위를 조절했으니까.

“물을 뿌리는 아이템인데, 마음만 먹으면 비처럼 광역으로 뿌려 줄 수 있거든요. 주로 불속성 잡몹들을 잡기 위해 사용하는 아이템인데, 이걸 사용하면 어떨까요.”

촬영감독이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살수차보다 배는 좋네요.”

이렇게 해서 날씨 문제도 가볍게 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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