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장. 잠시의 평화 (1)
마무리가 영 찝찝하긴 했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제이커를 완전히 제거하는 데에 성공했다.
물론 원래 우리의 목적은 녀석을 생포하는 거였다.
살아 있는 채로 붙잡아서 녀석이 과연 어떤 목적을 가지고 여태껏 테러를 실행해 왔었던 건지, 그리고 어떠한 방법으로 이 같은 이들을 벌이는 게 가능했는지 등에 대해 추궁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이러한 것들이 모두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되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제이커에게 꼭 묻고 싶은 말이 하나 있었다.
“어떻게 게이트를 열 수 있는지, 그것만큼은 반드시 알아내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협회장의 사무실을 방문한 나는 솔직한 심정을 담아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건 협회장도 같은 생각이었던 모양인지, 내 말에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건 나도 그래. 특히 이철민 소장이 더할걸.”
원래는 오늘 회의 때 이철민 소장도 참석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아까 전화를 해 보니까, 지난 며칠 동안 아예 잠도 한 번 안 자고 제이커가 남긴 자료들을 조사하고 살피느라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덕분에 지금은 누가 와서 깨워도 도통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태라고 들었다.
깨우려면 깨울 순 있지만.
협회장이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냐고 말한 탓에 오늘은 그냥 이철민 소장을 놔주기로 했다.
그동안 누구보다도 고생을 많이 했던 사람이니까.
이 정도는 충분히 이해해 줄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부족한 점도 있었다.
“근데 이철민 소장이 있어야 우리 회의도 진행이 되는 거 아닙니까?”
데이브가 아주 날카롭게 일침을 가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이거였다.
우리들 중에서 제이커의 행적에 대해 가장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이철민 소장이다.
왜냐하면 그가 지금 제이커가 남긴 유품들을 조사하고 있으니까.
거기서 뭔가 단서를 찾아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도, 데이브도 바쁜 시간을 쪼개서 이곳까지 온 거였다.
그런데 정작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이철민 소장이 없으니, 아무래도 이번 회의는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협회장도 그건 인정하는 모양인지, 고개를 여러 차례 끄덕이는 반응을 보였다.
대신에 우리가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이 소장도 아직까지는 뭔가 크게 알아낸 건 없어 보이더라. 너희 오기 전에 바로 어제 이 소장 연구실을 잠깐 들러 봤는데, 크게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을 거 같더라.”
“왜요?”
“별로 알아낸 게 없대.”
그래서 협회장이 일부러 이 소장의 수면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했나 보다.
그러면 뭐, 어쩔 수 없지.
하기야, 제이커가 그런 중요한 내용을 함부로 어딘가에 적어 두고 다니진 않았을 거 같고.
협회장의 말대로 우리가 원한다고 바로 당장 정보가 나올 기미가 보이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냥 얌전히 기다리기로 했다.
어차피 시간이 알아서 잘 해결해 줄 테니까.
그리고 오늘은 이것 못지않게 중요한 논의 사항이 있다.
“그 여자, 아직 못 잡았습니까?”
데이브가 내가 묻고 싶었던 말을 먼저 꺼냈다.
협회장이 쓴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 감감무소식이다.”
이런 대답이 나올 거란 예상은 했었다.
제이커가 죽은 다음, 현재 사람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사람은 바로 그 수수께끼의 여자다.
이름도, 출신도, 심지어 인간이 맞는지조차 모르는 상태다.
그래서 더 궁금하다.
협회장이 나와 데이브의 어깨를 동시에 토닥여 줬다.
“뭐, 아직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벌어지지 않은 미래의 일 가지고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라고. 그리고 뒤처리 같은 건 나하고 협회가 해야 할 일이니까, 너희들은 여태껏 해 오던 거 하면 돼. 걱정하지 말고.”
해 오던 거라고 하면.
“연예계 활동 말하는 거죠?”
협회장이 내 말에 싱긋 웃었다.
“정답.”
새로운 본업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 * *
아직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가 상당히 많았지만, 그래도 협회장이 말한 대로 지금 당장 우리들이 머리를 싸매고 생각을 해 봤자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하던 일 마저 하고.
그러면서 이 소장이 뭔가 단서를 찾아내기만을 바라면서 기다리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길이 안 보이는데, 억지로 길을 만들려고 해 봤자 손해만 클 테고.
이럴 때에는 에너지를 비축하는 게 좋아 보인다.
오늘은 공식 일정은 아니고, 멤버들이 다 같이 모여서 우리의 세 번째 앨범 콘셉트에 대한 회의를 진행하기로 했다.
중요한 일은 얼추 끝났으니까.
그래서인지 오늘 회의에 참가한 멤버들의 얼굴은 굉장히 밝아 보였다.
특히 니암, 딜런. 이렇게 두 사람의 변화가 가장 눈에 띄었다.
준서도 나와 비슷한 걸 느낀 모양인지, 둘에게 웬일이냐는 식으로 물었다.
“형들, 뭐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요?”
“이제 테러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니까.”
“우리들 같은 경우에는 미국에 가족들이 살고 있잖아. 그래서 안심이 되는 거지.”
이번 제이커 체포 작전에서 가장 고생한 헌터들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일절 고민도 하지 않은 채로 이렇게 답할 것이다.
미국 소속의 헌터들이라고.
제이커가 미국을 중심으로 시설을 세우고, 이것을 바탕으로 테러를 자행했기 때문에 미국 헌터들은 쉬는 날도 잊어버리고 녀석을 찾아 밤새도록 헤매야 했다.
그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날 이렇게 테러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제이커를 제압하는 데에는 사실 내가 가장 많은 공을 세우긴 했지만, 그럼에도 고생은 미국 쪽이 더 많이 했다.
수색, 감시 등 가장 고생스러운 일들을 이들이 도맡아서 했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결과가 좋게 나와서 다행이다. 만약 제이커도 놓치고 아무런 단서도 못 잡아냈으면, 그거만큼 암울한 결과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되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말이다.
너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형.”
준서가 툭툭 건드리면서 나를 불렀다.
“어, 왜?”
“아니, 생각하고 있는 곡 콘셉트 있냐고 프로듀서님이 물어보셔서. 근데 아무 대답도 안 하고 있길래 그런 거지.”
“아, 그랬어? 죄송합니다, PD님. 멍 때리고 있었네요.”
최용하 프로듀서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아니라고 말했다.
“이사님이 바쁘시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니까요. 그리고 그 테러리스트, 잡혔다면서요? 그러면 수습할 일도 많으실 테고.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최 프로듀서는 미팅을 뒤로 미루겠냐고 내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어차피 문제는 다 해결되었다. 그리고 세 번째 앨범 작업은 아직 시작도 안 했기에 빨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미룰 필요가 없다고 내가 먼저 이야기를 하긴 했었다.
그런데 정작 내가 멍을 때리고 있었으니까, 최 프로듀서한테는 할 말이 없었다.
“곡 콘셉트 정해야 하니까, 생각해 두신 거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저는 어떤 곡이든 다 상관없습니다. 지난번 곡도 좋았고요. 너무 센 콘셉트만 아니면 될 거 같습니다.”
“예를 들자면?”
“데스메탈 같은 거요.”
내 말에 최 프로듀서가 어색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건 HTB 그룹의 색상하고는 잘 안 맞을 테니까 아마 고르진 않을 겁니다. 저도 그렇고요. 다른 멤버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을까요?”
최 프로듀서가 묻자, 멤버들은 공감을 드러내듯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였다.
준서가 다음 의견을 제시했다.
“무난하게 댄스곡으로 가면 어떨까요?”
“그게 제일 정석이긴 하지. 아니면 발라드……는 안 되겠네요.”
우리 HTB를 포함해서 HTG, 그리고 내 솔로 활동까지, 이 셋에게는 공통 사항이 하나 있다.
대중가요 활동뿐만 아니라 헌터들에게 MML 버프를 주기 위해 데뷔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헌터들의 전투력을 상승시키는 일이 최우선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발라드를 부른다면, 기분이 너무 다운될 것이다.
의욕을 끌어올리면서 전투력을 고취시켜야 하는 마당에 발라드라니, 말이 안 된다.
그래서 너무 잔잔한 곡들은 웬만하면 지양하기로 했다.
“이사님이 너무 센 콘셉트는 싫다고 하셨으니까, 록을 베이스로 까는 댄스곡으로 정해 볼까요?”
“그것도 나쁘지 않죠.”
이전에도 록 음악과 댄스 퍼포먼스를 접목시켜 활동했던 그룹들이 많이 있었으니까.
너무 낯설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개성이 없는 것도 아닌 장르였기에 나는 마음에 들었다.
멤버들도 나와 같은 뜻을 전했다.
애초에 데이브 같은 경우에는 나와 비슷하게 아무 콘셉트나 상관없다는 식의 태도로 일관했고.
니암과 딜런은 ‘난 반드시 이 장르는 해 보고 싶다!’라는 곡이 몇 개 있긴 했지만, 타이틀곡을 정하는 일에 그런 고집을 내세우진 않았다.
어차피 본인들이 음악적으로 하고 싶은 건 수록곡으로 포함시키면 되니까.
굳이 타이틀곡에 모험을 할 필요가 없었다.
타이틀곡은 그 해당 앨범의 얼굴과도 같은 존재다.
그러면 대중의 입맛에 맞는 곡으로 만들어서 내보내야 효과가 클 텐데, 너무 이질적인 장르의 곡을 만들어서 보여 주면 사람들의 반감을 살 우려가 있다.
우리가 가수 활동을 하루 이틀 한 것도 아니고, 이제는 나름 활동 기간이 쌓여 있다 보니까 이런 건 누군가가 나서서 말해 주지 않아도 우리들이 충분히 고려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까지 되었다.
펜대를 열심히 굴리던 최용하 프로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로 록하고 댄스 쪽을 접목시키는 형태로 콘셉트를 잡아 보시죠.”
“네, 알겠습니다.”
“곡은 언제쯤 나올까요?”
내가 가장 묻고 싶은 질문을 니암이 먼저 꺼내서 들려줬다.
제일 중요한 게 바로 곡 나오는 시기다.
여기에 맞춰서 우리들의 모든 스케줄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최용하 프로듀서의 얼굴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최대한 빠르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제가 멜로디를 몇 개 만들어 뒀거든요.”
“그런가요?”
“네, 여기에 살만 적당히 붙이고서 일단 여러분들에게 먼저 한 번씩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들려드리고 싶은데, 아직 그런 단계까지는 아닌 것 같아서요.”
조금이라도 더 완성본에 가까운 퀄리티로 들어 봐야 우리들도 정확하게 이 곡이 어떤 느낌으로 탄생하게 될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최용하 프로듀서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지금 당장이 아니라 나중으로 시간을 미루기로 한 것이었다.
대충 회의도 끝났으니까.
“간만에 다 같이 모여서 밥이라도 먹으러 갈까요?”
“좋죠.”
“찬성입니다!”
“마침 회사 앞에 새로 오픈한 고깃집이 하나 있는데, 거긴 어때요?”
점심 회식 이야기가 나오자, 멤버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자신의 생각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어째 회의할 때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나오는 것 같다.
그렇게 점심 회식을 위해 움직이려고 하던 찰나.
갑자기 이철민 소장으로부터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아직 통화 내용도 못 들었는데, 스마트폰 액정 화면을 보자마자 이런 느낌이 왔다.
아무래도 점심 회식 자리에 참여하는 건 힘들 수도 있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