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장. 실토 (1)
그룹 활동을 잠시 중단하고 솔로로 활동하자, 이전에는 뜸했던 제안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바로 영화, 드라마 캐스팅 제의였다.
내 눈앞에 쌓여 있는 수많은 대본들.
승훈이 형이 내게 신신당부하듯 말했다.
“그거, 답변들 빨리 줘야 하니까 내일 중으로 다 훑어보고 결정해라.”
“왜 그렇게 시간이 촉박한대? 다른 배우들 보니까 생각할 시간 넉넉하게 주던데.”
“너한테도 넉넉하게 줬어. 근데 이런저런 핑계 대면서 네가 안 봤을 뿐이지.”
“……그랬나?”
“그랬다, 요 녀석아. 그 사람들도 촬영 일정이 다 잡혀 있을 텐데, 언제까지 네 대답만 기다리게 할 수는 없잖아.”
승훈이 형의 말이 맞다.
요즘 이런저런 일들이 많아서인지 내 앞으로 대본이 이렇게 많이 와 있었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승훈이 형이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이래서 연예인들이 매니저를 고용하는 모양인가 보다.
“알았어. 할게. 해야지.”
“그래, 이 업계에서 계속 먹고살려면 신뢰는 깨뜨리지 말아야지.”
“안다고, 알아.”
이미 레이드 시대 때 많이 겪어 봤다.
그때 당시에는 뭣도 모르고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헌터 매니지먼트와 계약할 뻔했다. 그나마 뒤통수가 얼얼해지기 전에 없던 일로 해서 다행이었지, 만약에 그 계약들 그대로 진행했으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한번 마음속에 불신이 생겨 버리면, 이것을 회복하는 데에는 제법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연예계에서는 특히나 더 그렇다.
약속 안 지키는 연예인, 이런 식으로 각 관계자들에게 이미지가 박혀 버리면 일감이 뚝 끊기게 될 것이다.
아무리 내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인이라 할지라도, 인성 문제는 언제든지 터질 수 있으니까 말이다.
마침 오늘은 일정도 없고.
여기서 조용히 대본들 살피면서 시간을 보내면 될 것 같다.
……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긴급재난문자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도시 전체에 퍼지는 사이렌 소리.
헌터협회 측에서 급하게 나와 승훈이 형한테 연락이 왔다.
몬스터 출몰 소식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보던 대본을 다시 덮어야만 했다.
그러면서 승훈이 형한테 미리 말을 했다.
“이건 어쩔 수 없어. 형도 알지?”
승훈이 형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얼른 가 봐라.”
대본 검토하는 것보다 인류를 수호하는 일이 당연히 더 중요하니까.
이건 솔직히 봐줘야 한다.
* * *
근처에 몬스터가 출몰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인근에 있는 헌터들은 즉시 하던 일을 중지하고 현장으로 향해야 한다.
이것으로 인해 금전적인 피해가 발생할 경우에는 헌터협회와 정부가 100퍼센트…… 아니지, 150퍼센트로 지원을 해 준다.
적어도 헌터들에게 출동할 의욕이 들게끔은 만들어 줘야 하지 않겠나.
이것도 사람이 하는 일인데,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나라는 150퍼센트가 아니라 200퍼센트까지도 보장을 해 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무튼 이런 손실 복구 지원 덕분에 비상 상황이 선언되면 현장으로 출동하려는 헌터들이 꽤 높은 비율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건 레이드 시대가 끝난 이후에도 계속되는 중이다.
이미 현장에 많은 헌터들이 출동해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헌터들만큼 잡몹의 숫자도 상당히 많았다.
몬스터의 종류는 네스.
트롤과 비슷한 외형을 지닌 몬스터라고 보면 된다.
트롤과 가장 큰 차이는, 네스가 덩치가 훨씬 더 작다는 거였다.
그러나 작다고 무시하면 절대로 안 된다.
네스 본인들도 개별로 따지면 전투력이 약하다는 걸 잘 알아서인지 어딜 가든 항상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네스가 떴다는 보고를 받으면, 최소 50마리 이상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현장에 도착했을 때 당황하지 않고 몬스터 토벌에 임할 수 있을 것이다.
어디 보자.
내가 아는 헌터는…….
“선배님!”
나빈이 한 명 정도뿐이었다.
“나머지는?”
나빈이가 여기에 있다는 건, HTG 멤버들도 이 근처에 있을 확률이 크다는 소리다.
그러나 나빈이는 내 추측을 부정하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말했다.
“이사벨라하고 사오리는 슬혜하고 다른 스케줄이 있어서 지방에 가 있어요. 저만 따로 서울에 남아 있고요.”
“그래?”
“네. 원래대로라면 저도 다른 멤버들 따라서 지방 행사 참여를 위해 바로 내려갔어야 했지만요.”
그러나 갑작스러운 몬스터들의 등장으로 인해서 일정이 완전히 꼬여 버렸다.
나빈이는 헌터로서 책임감이 강한 아이다.
나처럼 특별히 돈이라든지, 아이템이라든지, 명성이라든지 이런 목적이 없어도 민간인이 위험에 처하면 만사를 제쳐 두고 무조건 출동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예상은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란 듯이 맞아떨어졌다.
다수의 네스들이 우리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한 마리 한 마리로 따지면 볼품없어 보이는 녀석들이지만, 이렇게 무리를 지어서 이동해 오니까 나름 위압감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래 봤자지.”
나한테는 크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헌터들에게는 어떨지 모른다.
“나빈아, 미리 말해 두지만…….”
“알고 있어요. 무리는 안 할게요.”
“그래, 알면 됐다.”
나빈이가 다치기라도 하면 나빈이 언니를 볼 면목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네스들이 무기를 들고 우리 쪽으로 달려들었다.
헌터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한쪽 귀에 꽂은 이어폰을 재생시켰다.
내 노래를 재생시킨 것이 틀림없다.
MML 버프 덕분에 랭크가 낮은 헌터들도 요즘은 몬스터를 상대로 자신감이 부쩍 붙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나하고 HTB, HTG 그룹이 열심히 활동한 보람이 느껴졌다.
나는 굳이 노래는 필요 없었다.
어차피 조무래기들 정리하는 것뿐이니까.
단지 조금 신경 쓰이는 게 있다면.
하필이면 녀석들이 나타난 곳이 시내 한복판이라는 점이다.
아직 대피하지 못한 민간인들의 모습도 곳곳에 보였다.
‘우선은 구조 활동부터 먼저 해야겠네.’
몬스터들은 나머지 헌터들이 알아서 잘 처리해 줄 것이다.
전복된 버스 안에서 비명을 지르면서 살려 달라고 외치는 승객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저 멀리 네스들이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내밀려던 구조의 손길을 잠시 거둬들인 나는 승객들에게 먼저 양해를 구했다.
“잠시만 기다리고 있으세요.”
근처에 비어 있는 차 한 대를 집어 들고서 네스 녀석들에게 던졌다.
그런 뒤에 마나 덩어리를 살짝 묻혀서 빈 차에 던졌다.
그러자 퍼어엉! 소리를 내면서 네스 사이에서 차 한 대가 강한 폭발을 일으켰다.
네스는 집단으로 몰려다니면서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공격하는 습성을 지녔지만, 이건 반대로 놈들에게 약점으로 작용할 때가 있다.
지금처럼 범위 공격을 가하기라도 하면, 놈들은 알아서 떼죽음을 당한다.
손쉽게 네스를 잡을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녀석들은 내 즉흥적인 공격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채 쩔쩔매는 모습을 보였다.
여기에 다른 헌터들까지 총공세를 이어 가고 있으니.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나는 얌전히 사람들 구조에만 힘쓰기로 했다.
그러나 레이드 시대에는 늘 그렇듯 예상 못 한 일들의 연속이다.
네스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놈들 사이에서 유독 덩치 큰 한 마리가 존재감을 과시했다.
나빈이가 막 승객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킨 내게 다가와 외쳤다.
“선배님! 우두머리 녀석이에요!”
“나도 보고 있어.”
네스들을 이끄는 리더 격인 존재다.
조직이라는 건 결국 누군가를 중심으로 뭉치게 되어 있다.
저 네스가 이놈들을 이끄는 중심이라는 걸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대빵이 나타났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나빈아, 저기 저쪽 무너진 다리 보이지? 저기 아래에 사람들 있으니까 네가 가서 구해 줘라.”
“네? 선배님,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마나 탐지를 사용하면 금세 알 수 있지. 아무튼 뒷일은 너한테 맡기마.”
다른 헌터들은 믿을 수가 있어야지, 원.
적어도 나빈이 정도 되는 전투력은 지니고 있어야 믿고 맡길 수가 있을 것이다.
인터넷에 이런 말이 있다.
힐러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힐은 부상의 원흉을 제거하는 거라고.
나도 이 말에 충실히 따를 생각이다.
사태를 유발하는 중심에 서 있는 우두머리 네스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네스들이 내 앞을 가로막으려고 했지만, 놈들이 단체로 몰려들어서 나를 막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되었다면 인류는 벌써 네스에게 점령당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길막하지 말고 꺼져라.”
뻐엉!
내 발길질 한 방에 네스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누구의 엄호를 받을 것도 없이 알아서 내 갈 길을 뚫었다.
네스의 우두머리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그게 그 녀석의 마지막이었다.
퍼엉!
마력으로 강화시킨 주먹을 놈의 가슴팍에 적중시키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렸다.
놈의 피가 사방에 흩어지면서 쿵! 하고 뒤로 넘어갔다.
순식간에 우두머리가 사라지자, 네스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중간에서 통제하는 컨트롤 타워가 없어지면, 네스들은 말 그대로 그냥 잡몹밖에 되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학살의 시간이다.
* * *
처음에는 서울 한복판에서 몬스터들이 다수 출몰했다는 소식을 듣고 난리 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이나마 가져 봤지만.
확실히 레이드 시대에 비하면, 몬스터들이 많이 약해지긴 했다.
게이트도 열릴 일이 없어서 지속해서 몬스터들의 전력이 충원될 일도 없고.
그리고 놈들은 우리들의 눈을 피해 오랫동안 잠복해 있던 터라 많이 쇠약해진 상태였다.
반대로 우리들은 나와 MML 버프를 줄 수 있는 헌터들의 능력 덕분에 오히려 전투력이 상승했다.
애초에 싸움이 되지 않았다.
우리들의 압도적인 승리로 마무리가 되자,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들고 오늘 현장에서 활약한 헌터들의 모습을 담기 위해 정신없이 촬영에 임했다.
오늘도 인터넷에 영상 여러 개가 올라가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사건이 종결된 지 2시간이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알고리즘에 내 모습이 담긴 영상이 뜨기 시작했다.
‘요즘 사람들은 참 빠르네.’
덕분에 이미 내 활약상을 다루는 기사들이 여기저기에 업로드되었다.
반헌터 시위도 많이 줄어들었고.
우리들의 이미지는 갈수록 올라가고 있고.
분위기는 분명 나쁘지 않은데.
뭐라고 해야 할까, 제이커라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때문에 마냥 기뻐만 할 수는 없었다.
아직도 놈을 쫓을 수 있는 명확한 증거가 나오지 않은 상태였기에 이 찝찝함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뭔가 좋은 소식이 들려오면 좋겠는데.
이때, 연 대표한테서 직접 전화가 걸려 왔다.
“네, 대표님.”
또 뭔 일을 시키려고 하나. 그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할 때.
연 대표가 예상치도 못한 소식을 내게 들려줬다.
-권주영 기억하지?
“그 대전 테러리스트요?”
-어, 그자가 너를 보고 싶다고 하더라.
“왜요?”
이유가 있었다.
-너한테 모든 걸 털어놓고 싶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