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라를 구한 톱스타-167화 (167/250)

제42장. 접촉 (4)

설마 이렇게 대범하게 내 앞에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여성은 아주 잠깐 보였던 내 표정 변화를 알아차리고서 다시 한번 눈웃음을 지었다.

“제가 누군지 알아보시나 보네요.”

안경과 마스크로 얼굴을 꽁꽁 싸맸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신체적 특징이 김두정을 살해한 그 여자와 눈앞의 여자가 동일인임을 알리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흑발.

여성의 평균 키를 훌쩍 웃도는 장신.

그리고 무엇보다도 팬들과는 다른 이질적인 분위기가 이 여자의 위험성을 내게 열심히 경고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는 순간, 여성이 먼저 말했다.

“제가 아무런 조치도 없이 이곳에 왔겠어요?”

“…….”

제이커는 철두철미한 녀석이다.

지난번에 영화인들을 인질로 잡았을 때처럼, 이번에도 그와 비슷한 수작을 부리고 나를 찾아왔을 것이다.

거의 확실하다.

“태오 씨의 소중한 팬들이 어떻게 될지 몰라요. 그러니까 얌전하게 도로 앉아 계시면 좋을 거 같은데.”

미국에서도 그랬지만, 녀석이 여기서 마나 폭탄을 터뜨린다 할지라도 나나 여기 있는 우리 멤버들은 무사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각성 능력을 가졌으니까.

마나를 다룰 줄 알기에 폭발이 발생한다는 걸 인지하기만 하면,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시키거나 아니면 마나를 이용해서 얇은 벽을 만들어 우리 몸 정도는 쉽게 지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있는 수많은 일반인들은 우리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폭발에 무방비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량의 희생자가 발생할 게 너무나도 뻔하다는 소리와 마찬가지다.

그때는 승훈이 형과 협조해서 마나 폭탄을 몰래 제거하고 다닌 덕분에 피해를 막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도 없었다.

여자가 내 앞에서 빤히 나를 보고 있는데, 여기서 승훈이 형이나 다른 헌터들의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수상쩍은 말이라도 하는 순간, 여성도 바로 대응에 나설 가능성이 매우 크다.

결론은 하나밖에 없다.

일단은 여자의 말에 따른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팬들을 위해서.

잠시 의자에서 뗐던 엉덩이를 다시 붙였다.

이런 내 모습에 여성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현명한 선택을 하셨어요.”

“……뭐 하러 여기까지 찾아온 거지?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나?”

있겠지. 있으니까 일부러 내 팬인 척 위장하면서까지 이런 자리를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내 예상대로, 여성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이 찾아온 이유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그 이유가 좀 어이없었다.

“그냥 인사드리려고 왔어요.”

“인사만?”

“네.”

“…….”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인지 모르겠다.

고작 나한테 인사하려고 이런 수고스러움을 저질렀단 말인가.

아니, 그런 것보다 적진 한가운데에 혼자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왔다는 것만으로도 참 대단하다.

우리를 그만큼 얕잡아 보고 있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나나 데이브가 어디 가서 무시당할 그런 짬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대단한 양반들이다.

“인사라면, 어디 조용한 데에 가서 해도 늦지 않을 거 같은데.”

“그러면 분명 저한테 불리하게 돌아가겠죠.”

“잘 아네.”

“잘 아니까 이렇게 귀찮은 일들을 벌이게 된 거예요.”

여성이 갑자기 고개를 뒤로 돌리더니, 객석 천장 쪽을 바라봤다.

저쪽에 마나 폭탄이라도 설치되어 있나?

굳이 마나 폭탄의 위치를 알려 주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저거 말고도 몇 개 더 설치해 뒀으니까.

천장에 붙어 있는 거 하나 제거한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행동이기도 했다.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영화인들을 인질로 잡을 때에도 마나 폭탄을 하나가 아닌 여러 개를 설치했었으니까. 그때의 경험을 되살려 봐도 충분히 유추가 가능한 것들이다.

여자가 온 김에 묻고 싶은 걸 캐묻기로 했다.

“왜 김두정을 죽였지?”

“쓸모가 없어졌으니까요.”

“계속 살려 두면 너희가 원하는 반헌터 시위를 계속 이어 갈 수 있었을 텐데?”

“우리가 원하는 건 시위 그 자체가 아니에요. 시위는 뭐랄까, 그냥 눈요기용이죠.”

심심풀이 수준도 안 됐다는 뜻인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저들에게 김두정을 살려 둘 이유가 없긴 했을 것이다.

살려 둬 봤자 언제 제이커에 대한 정보를 우리한테 흘릴지 모르고.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는 제거하는 게 옳다.

그래서 제이커는 여자를 시켜서 김두정을 죽였을 수도 있다.

확실하진 않지만, 이게 현재로서는 가장 확률이 높은 가설이다.

녀석들은 그러고도 남을 테니까.

곧바로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너희 목적이 뭐지?”

이건 내가 제이커와 연결되어 있는 테러리스트들한테도 꼭 물어보는 필수 질문이기도 했다.

무엇을 원하고 있길래 이런 짓들을 벌이는지 궁금했다.

돈을 바라고 이러는 건 아닌 듯하다.

만약 그랬다면, 확실하게 요구를 했을 테니까.

지금 내가 봤을 때에는 이들에게 목적이라는 게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더 알 수가 없었다.

여성은 이번에도 애매모호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정말로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아는데 일부러 말 안 하는 눈치였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뭔가가 좀 이상했다.

여성과 눈을 마주친 순간,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났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서로 만난 적이 있었나?”

“글쎄요.”

이번에도 Yes도, No도 아닌 어중간한 대답을 들려줬다.

이 궁금증과 연결되는 질문을 던졌다.

“넌 누구지?”

정체가 궁금했다.

협회장이 말하기로는, 눈앞의 여성은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렇게 강한 각성 능력자가 여지껏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여성은 다시 한번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들의 상식으로 저를 규정지으려고 하면, 제가 누군지 평생 알아내지 못할 거예요.”

게이트 사건이 발생하고.

레이드 시대가 열리면서 어느 유명한 말이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었다.

상식에서 벗어나라.

게이트, 몬스터, 그리고 아이템.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 것들이다.

여태껏 밝혀지지 않은 물리 법칙과 마법이라는 힘을 사용하며, 차원을 넘나드는 현상까지 발생했다.

인간이 지금껏 증명해 왔었던 모든 법칙들이 레이드 시대가 열림과 동시에 전부 부정당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인류는 상식으로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눈앞의 비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덕분에 인류는 몬스터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고, 무사히 레이드 시대를 종결지었다.

하지만 몬스터는 여전히 남아 있었고.

그리고 눈앞에 있는 여자처럼 각성 능력을 악용하는 사람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게이트만 사라졌지, 인류를 위협하는 요소들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여성은 그렇게 말하고서 내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는 이벤트라고 들었으니까요. 자.”

“…….”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여성의 말이 사실이었기에 나는 마지못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감촉 자체는 일반적인 여성의 손과 다를 바 없었다.

다만, 저 머릿속에 어떤 꿍꿍이가 숨겨져 있을지.

정작 궁금한 건 해결되지 않은 채, 그대로 여성은 무대를 내려갔다.

* * *

악수회가 끝나고 다음 이벤트 순서가 시작되었다.

의자에 앉아 멤버들끼리 그간의 앨범 활동을 돌아보는 토크 타임을 가졌다.

그 와중에 나는 눈으로 방금 전 나에게 말을 붙였던 그 여성을 좇았다.

그러나 여성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와 악수를 하고 난 뒤 바로 현장을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형.”

갑자기 준서가 나를 툭툭 쳤다.

“어, 왜?”

“형한테 질문 들어왔다고 했잖아요. 못 들으셨어요?”

“그래? 미안. 잠깐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었어.”

여성 쪽에 신경이 쏠려 있다 보니 무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혹시 몰라서 그냥 팬 미팅을 중단시켜 버릴까 했지만, 마나를 흘려서 탐지해 본 결과 마나 폭탄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결국 내가 여성의 말에 속은 셈이었다.

마치 마나 폭탄을 여기저기에 심어 둔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정작 아무것도 없었던 걸로 나오니까 황당했다.

‘요즘 테러리스트들은 왜들 이렇게 대담해진 건지 모르겠네.’

이게 다 제이커 때문이다.

한편 준서와 니암, 딜런 이렇게 셋이서 토크 타임을 가지는 동안, 데이브가 나를 툭툭 건드렸다.

마이크를 내려놓은 채 나한테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냐?”

“왜?”

“네가 아까 마나 퍼뜨리는 파동이 느껴졌으니까.”

주로 뭔가를 탐색하거나 감지할 때 자주 써먹는 방식이다.

다른 멤버들은 몰라도, 데이브는 랭크가 높다 보니까 미세한 마나 파동까지도 전부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된다.

그래서 데이브만 이렇게 유일하게 내 행동을 알아차리고 다른 사람들 몰래 묻는 거였다.

“지금 말고.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어차피 지금 이야기를 해 준다고 해도 뭔가 크게 달라지진 않을 테니까.

데이브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알겠다고 짧게 답하고서 다시 팬 미팅 무대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데이브뿐만 아니라 집중해야 하는 건 나도 같은 입장이다.

‘지금은 팬들을 만족시켜 주는 게 우선이니까.’

다른 곳에 정신 팔지 말도록 하자.

* * *

팬 미팅이 끝나자마자 나는 멤버들, 그리고 승훈이 형을 대기실에 불러 모아서 아까 있었던 일들을 전부 공유해 줬다.

“김두정을 죽였던 그 범인이 나한테 왔었어.”

순간 준서가 들고 있던 과자 봉지를 떨어뜨렸다.

데이브, 승훈이 형뿐만 아니라 멤버들도 대충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제이커에 대한 것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만큼 알고.

그래서 정보 공개도 멤버들 앞에서 하기로 한 거였다.

니암도 당황한 모양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지, 지금은 어디 있는데요?”

“갔어.”

“그냥 보내 주신 거예요?”

“나도 그러고 싶진 않았는데, 녀석이 미국에서처럼 인질극을 벌이려고 하더라고. 그래서 가만히 있었지.”

데이브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 무대 위에서 내게 했던 질문이 방금의 대답을 통해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마나 폭탄 찾으려고 그랬던 건가 보군.”

“어. 근데 없었어.”

“그 여자가 거짓말한 건가?”

“그런 셈이지. 한 방 먹었어.”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헛웃음이 절로 흘러나오는 동안, 승훈이 형이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말했다.

“그래도 정말 마나 폭탄이 설치되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일단은 협회 측에 연락해 둘게.”

“올 때 이철민 소장도 같이 데려와 달라고 해. 이 소장이 있어야 현장 검증이 더 확실하고 원활하게 진행될 테니까.”

“알았어.”

먼저 대기실을 나선 승훈이 형.

그동안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성이 나를 찾아온 이유는 인사하기 위해서라고 했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여성이 일부러 이곳에 온 이유는 어쩌면.

‘나한테 그만 나서라고 경고하려는 것일지도 모르지.’

물론 그런다고 제이커 문제에서 손을 뗄 생각은 전혀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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