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장. 도주 (1)
용기를 낸 양성빈이 몸을 날렸다.
아래에서 ‘으아아아아악!!!’ 하는 양성빈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형! 몸에서 힘을 빼세요!”
“어, 어떻게 이 상황에서 힘을 빼라고!”
“힘 준다고 떨어질 게 안 떨어지진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제 말대로 하세요.”
“아, 알았어어어!!”
끝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밑바닥을 향해 아래로 수직 낙하 했던 양성빈이 잠시 뒤, 천천히 우리 쪽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치 개구리처럼 양팔과 양다리를 이상한 방향으로 뻗은 채 올라오고 있었다.
양성빈의 그런 모습을 보자마자 미리 중력 체험을 하고 있던 우리들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성빈 오빠, 왜 그런 포즈를 취하고 있는 거예요?”
“그냥 자연스럽게 있어도 돼요. 이거 보세요.”
나빈이가 직접 팔과 다리를 움직이면서 마치 수영을 하는 것처럼 포즈를 취했다.
그럼에도 양성빈은 쉽게 따라 하지 못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내가 괜히 움직이면…… 아까처럼 또 떨어질까 봐 무서워서 못 움직이겠어.”
아까 잠깐 낙하했던 순간이 양성빈에게 짧은 트라우마를 안긴 모양이다.
이 두려움을 극복해야 지금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형, 만약에 떨어진다면,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구해 줄 테니까 마음껏 움직여 보세요.”
“저, 정말이지?”
“네, 약속할게요.”
내가 직접 보증을 서기로 했다.
원래 난 성격상 보증을 안 서 주는 타입인데, 그래도 금전적인 것과 연관되어 있지 않으니까 마음껏 서 주기로 했다.
나를 믿기로 한 모양인지, 양성빈이 아주 천천히 경직된 팔과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작은 매우 느릿했지만.
그래도 조금씩 적응이 되는 모양인지, 아까에 비해서는 팔과 다리를 크게 휘젓기 시작했다.
양성빈의 움직임에 따라 몸이 앞으로 가기도 하고 뒤로 가기도 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때요, 형. 괜찮죠?”
“진짜네. 이게 무중력이라는 거구나.”
처음에는 컨트롤이 많이 어렵다.
그러나 적응하다 보면, 그렇게까지 어렵진 않다.
준서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생존하기 위해서 헌터 양성소에서 별의별 훈련을 다 받아 봤다.
아까 말한 중력 훈련도 훈련 과정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단번에, 빠른 속도로 적응하는 게 가능했지만.
일반인의 경우에는 여기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이아담하고 신에리를 봐라. 저기 둘은 우리가 있는 곳으로 뛰어내리는 것조차 못 한 채 멀리서 보기만 하고 있지 않은가.
이제 완전히 적응한 모양인지, 양성빈이 두 사람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너희도 일로 와 봐.”
“아, 아니에요! 저는 그냥 여기에 있을게요.”
“저, 저도요!”
“그러지 말고 일로 와 보라니까? 나도 너희들처럼 처음에는 바짝 쫄았었는데, 막상 와서 겪어 보니까 생각보다 할 만해. 물론 처음 떨어지는 낙하 구간은 적응이 안 되겠지만.”
그건 나도 인정한다.
말로는 가만히 있겠다고 하는 이아담하고 신에리지만, 그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장면을 살리려면, 그리고 이 장면을 보다 재미있게 만들어 내려면, 두 사람도 결국은 같이 뛰어내려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더 괴로울 것이다.
이대로 시간을 계속 지체하는 건 낭비일 뿐이고.
어쩔 수 없이 내가 승부수를 띄우기로 했다.
“먼저 오시는 분만 제가 도와드립니다. 나중에 오시는 한 분은 알아서 뛰셔야 해요.”
“……!”
내 말을 듣자마자 이아담과 신에리의 표정이 바뀌었다.
“잠깐만요! 아, 알았어요, 갈게요!”
“대신에 저희 둘 다 도와주셔야 해요! 아셨죠?”
필사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구하는 둘을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네,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반드시 도와드리겠습니다. 헌터의 명예를 걸고 맹세할게요.”
SSS랭크 헌터의 맹세. 어디 가서 쉽게 볼 수 없는 장면이다.
결심을 굳힌 모양인지 이아담과 신에리가 사이좋게 스타트라인에 섰다.
준서가 직접 신호를 주기로 했다.
“셋, 둘, 하나, 번지!”
“버, 번지!”
엄밀히 말하면 여긴 번지점프대도 뭐도 아니지만, 그래도 뛰어내렸다가 다시 위로 튀어 오른다는 것 자체는 비슷하니까.
그래서 준서가 일부러 번지 구호를 붙인 것 같았다.
처음에 양성빈이 그랬듯이, 두 사람의 몸이 아래로 빠르게 낙하하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비명 소리가 이어져서 들려왔다.
그러기를 잠시 뒤.
양성빈과 비슷한 자세를 취한 두 사람이 무중력의 힘으로 인해 다시 위로 올라왔다.
이번에도 우리들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우리가 웃길 정도면, 보는 시청자들은 아마 이 장면에서 빵 터질 것이다.
내가 직접 두 사람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때요, 할 만하죠?”
“그, 그러네요.”
“그런데 저희, 어,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요?”
“지금 당장 움직이셔도 됩니다. 아까 성빈이 형 보셔서 아시잖아요?”
두 사람이 가장 늦게 뛰어내린 만큼, 교보재로 삼을 만한 장면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방금의 낙하로 인해서 머릿속에 들어 있던 그 기억들이 싸그리 사라진 모양인가 보다.
그 정도로 충격적이었나.
뭐, 그럴 수 있지.
과정에 약간의 문제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로 모든 던전 탐험대 멤버들이 무중력 체험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방송 분량 좀 더 뽑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면 되겠다.
‘MC가 되니까 이런 것들도 다 생각해야 되네.’
역시 MC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 * *
무중력 지역에서 벗어난 우리들은 잠시 쉬었다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이다음 지역도 딱 방송용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진귀한 경관을 보여 준다.
마치 가로수 길처럼 빛나는 광물들이 양 갈래로 쭉 늘어서 있었다.
광물들이 나무처럼 보일 정도였다.
“어머나, 세상에……!”
신에리가 스마트폰을 꺼내서 이 장면을 직접 카메라에 담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아이리스하고 나빈이, 그리고 준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아담이 세 사람을 뒤에서 바라보면서 내게 물었다.
“헌터들도 이런 광경을 보는 게 드문가 보네요?”
“네. 저희라고 마음껏 던전을 드나들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헌터협회에서 허가가 떨어지지 않는 이상, 우리들도 다른 일반인들처럼 쉽게 던전 내부로 들어갈 수 없다.
만약에 오늘 이곳에 촬영 일정이 잡혀 있지 않았더라면, 나도 다시 이 광경을 보진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갑자기 다른 출연자들처럼 나도 지금의 장면을 사진으로 남겨 둘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이리스가 옆에 나란히 서서 같이 사진을 찍는 신에리에게 물었다.
“직접 이런 광경을 보니까 소감이 어떠세요?”
잠시 사진 찍기를 멈춘 신에리가 들려준 말은 내게 있어서 꽤나 인상적이었다.
“무섭고도 아름답네요.”
이 말만큼 지금의 광경을 잘 표현한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눈앞의 광경은 참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인류에게 절대적인 위협을 주는 던전이란 존재 내에서 볼 수 있는 경관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아름답다.
그래서 신에리는 방금과 같은 표현을 쓴 거였다.
분명 아름다운 장면이지만, 한때 이곳에 몬스터들과 헌터들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는 생각을 하면 무섭다는 생각도 들 수밖에 없다.
나도 당시에 현장에 있었기에 신에리가 한 말에 많은 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신에리와 아이리스에게 다가간 나는 이렇게 말해 줬다.
“던전이란 이런 곳입니다.”
* * *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해야 2시간 정도뿐.
이 시간을 그대로 날리기에는 너무 아쉽다.
돌아오는 길에도 나는 출연자들에게 알려 줄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가리키면서 알려 줬다.
스태프들도 내가 알려 주는 정보들을 최대한 영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이리 비추고 저리 비추고 하는 노력을 보였다.
그냥 조용히 다시 입구로 되돌아가는 방법도 있긴 했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이 시간이 너무 아깝다.
던전 출입을 허가받는 과정은 상당히 까다롭다.
헌터들이라 할지라도 이건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가 가고 싶다고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물론 나나 데이브처럼 협회장과 직접적인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헌터라면 어렵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은 헌터들이 대부분이니까. 그래서 아깝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드는 것일 수도 있다.
“저기, 입구 보이네요.”
준서가 전등 불빛이 아닌 햇빛이 들어오는 곳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나름 오랜 탐험 끝에 다시 입구로 돌아오게 된 우리들.
박민진 PD가 잠시 테이프를 갈겠다고 하면서 촬영을 끊었다.
그동안 나는 머릿속으로 어떻게 마무리를 지을지, 멘트를 생각해 내고 있었다.
“테이프 다 갈았습니다!”
“출연진분들, 위치에 서 주시고요. 바로 엔딩 장면 들어가시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박 PD의 지시에 따라 우리들은 카메라를 정면에 두고 일렬로 나란히 섰다.
한가운데에는 MC인 내가 위치했다.
“자! 오늘 저희가 첫 정규 프로그램을 기념해서 특별히 홍콩에 위치한 DN-009, 광물 던전을 탐험해 봤는데요. 한 분씩 소감을 들어 볼까요? 먼저 양성빈 씨부터.”
“저는 오늘, 제가 고소공포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높은 곳을 싫어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주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네요.”
반어법을 이용한 위트 있는 멘트 덕분에 한차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농담이고요. 정말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더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좋겠네요.”
“저희는 제작진만 믿고 기다리기로 하죠.”
“그래야죠.”
은근슬쩍 박민진 PD에게 부담감을 심어 줬다.
이런 부담감을 주지 않아도, 박민진 PD라면 다음 목적지도 잘 잡아 줄 거라고 믿는다.
그렇게 한 명씩 돌아가면서 짧게 소감을 마친 뒤.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되었다.
“던전을 돌아보면서 당시의 기억이 나니까 참…… 씁쓸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인류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헌터들의 희생을 잊지 말자는 생각도 드네요. 시청자 여러분들 역시 저와 같은 생각이 드는 시간이 되었기를 바라면서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던전 탐험대, 다음 시간도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머릿속에서 즉흥적으로 떠올렸던 마무리 멘트를 한 번도 안 절고 무사히 소화했다.
박민진 PD가 오케이 사인을 주고 나서야 비로소 모든 촬영이 끝났다.
박 PD가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면서 말했다.
“고생 많으셨어요, 태오 씨.”
“고생이랄 게 뭐 있나요.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걸요.”
그렇게 기분 좋게 오늘 하루를 마무리 짓나 싶었을 때였다.
갑자기 전화를 받은 승훈이 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승훈이 형, 왜?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태오야, 그게 말이다…….”
승훈이 형이 내게 자초지종을 알려 주려고 하던 순간.
갑자기 헌터들에게 지급되는 호출기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내 것뿐만이 아니었다.
아이리스, 나빈이, 준서 것까지.
모든 기기들이 삐이익 하고 경고음을 내고 있었다.
불길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