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장. 뜬금없는 열애설 (1)
한동안 예능 프로그램에 거의 출연하지 못해서일까.
HTB 컴백과 동시에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니, 은근히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요즘 예능들은 재미있는 소재를 많이 다루고 있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하나 유행하는 소재가 있으면 그거를 복사, 붙여 넣기 식으로 따라 하느라 바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는데.
요즘은 그런 것도 아니다.
너무 획일화되어 있어서 그런지, 다른 프로그램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남들이 사용하지 않았던 소재도 과감하게 채용하는 모습을 많이 보이고 있었다.
내가 지난주에 촬영했던 ‘위대한 탈출’도 그중 하나였다.
성공적으로 녹화가 잘 끝난 덕분일까.
촬영이 끝나자마자 PD가 나하고 아이리스한테 다가와서 두 분 덕분에 살았다고, 녹화 재미있게 잘되었다고 연신 감사를 표현했다.
PD의 이 태도는 뒤풀이 회식 자리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그러면서 우리 두 사람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
나중에 또 게스트로 나와 주실 수 있냐고.
아이리스는 원래부터 방탈출을 좋아했었기에 PD의 제안을 흔쾌히 승낙했다.
나도 그러겠다고 답했다.
방탈출이라는 무대 위에서 제작진의 숨은 의도가 뭔지, 조사하고 추리해서 알아내는 재미를 느껴 버렸기 때문이다.
이번 주말에도 아이리스와 같이 방탈출 카페에 한번 들르기로 약속을 잡아 뒀다.
‘재미있단 말이지.’
예능의 순기능 중에 하나가 바로 이거다.
자신이 몰랐던 분야를 알게 되고, 여기에서 간혹 재능을 찾거나 재미를 느끼게 된다는 거 말이다.
실제로 어떤 가수는 레이싱과 관련된 프로그램에 출연했다가 자신이 운전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레이싱 선수에 도전해서 괜찮은 결과를 일궈 낸 경우도 있었다.
방송은 평소에 연예인들이 접하기 힘든 분야나 체험 같은 것을 강제로 접하게 만들어 준다.
다른 일반인들보다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다는 점에서 나는 예능 프로그램 출연을 좋게 보고 있었다.
나 말고도 HTB 멤버들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오늘의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가장 먼저 돌아온 나는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거실에서 TV를 보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마침 얼마 전에 우리 HTB가 출연했던 음방이 나오고 있었다.
이번 무대의 엔딩 요정을 맡게 된 인물은 바로 데이브.
데이브는 자기는 이런 거 절대로 안 할 거라고 학을 뗐지만, 다른 멤버들은 다 한 번씩 돌아가면서 했는데 데이브만 안 하면 좀 그렇지 않은가.
팬들 사이에서 데이브가 멤버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있는 거 아니냐는 불화설이 나올 수도 있고.
이런 것들을 몇 개 근거로 제시하면서 ‘너도 해야 돼.’라고 계속 들먹이니까 마지못해서 하게 되었다.
무대가 끝나고, 카메라가 데이브를 집중 조명하기 시작했다.
점점 다가오는 카메라.
처음에는 약간 부담스러워하는 표정을 짓던 데이브였지만.
이내 모든 것을 내려놓은 모양인지 억지로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윙크를 시전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푸확!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웬만한 개그 프로보다도 재미있네!”
그냥 한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그 데이브가 윙크를?
이만큼 재미있는 장면도 없을 것이다.
“재미있으니까 또 봐야지.”
원래 이런 건 계속해서 재탕해 주는 게 예의다.
한 번 더 돌려 보려고 할 때.
마침 스케줄을 마치고 돌아온 HTB 멤버들이 TV 영상에 관심을 보였다.
“뭐 하고 있어요, 형?”
“우리 음방 무대 보고 있지.”
“음방이라기보다는 데이브 형 엔딩 포즈만 계속 돌려 보고 계시는 거 같은데요.”
마침 데이브만 쏙 빼고 다른 멤버들만 전부 숙소로 복귀했다.
순간 데이브의 윙크가 펼쳐졌다.
이 모습에 다른 멤버들도 풉! 웃고 말았다.
“내가 왜 이 장면만 돌려 보는지 알겠지?”
멤버들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끄덕 움직였다.
“데이브 형이 이거 봤다면, 노발대발했겠네요.”
“없으니까 이런 거 보는 거지. 있으면 못 보잖아.”
“그렇겠네요. 아 참, 데이브 형 다음 주에 미국 간다던데요?”
“미국? 왜?”
“그것까진 저도 잘…….”
내게 데이브의 미국행에 대해 말해 준 니암이 말끝을 흐렸다.
이때, 이철민 소장한테서 연락이 왔다.
“소장님,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별일 없으셨죠?”
-저는 평소하고 똑같습니다. 매번 반복되는 일상이지요.
못 본 사이에 샐러리맨이 다 되어 있었다.
틀린 말도 아니긴 했다. 이철민 소장이야 어디 놀러 다니는 걸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고. 집에서 이리저리 뒹굴거리면서 백수력을 만끽하는 그런 체질도 아니다.
이철민 소장은 연구가 곧 쉬는 것이고 노는 것이다.
그의 연구 열정은 협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편이다.
만약 이철민 소장이 아이템, 헌터, 몬스터 쪽을 조사하는 길을 걷지 않고 다른 학문을 택했더라면, 분명 커다란 획을 그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도 이철민 소장이 정립한 이론들이 여기저기서 유용하게 쓰이고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철민 소장이 내게 먼저 전화를 거는 일은 드물다.
보통은 뭔가 목적이 있을 때.
그런 경우가 아니면 나한테 전화를 걸거나 하진 않는다.
“이번에는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이철민 소장을 상대로 전화를 할 때에는 안부를 물으면서 먼저 가벼운 이야깃거리를 나누거나 하는 그런 예열 과정이 필요 없다.
이렇게 바로 본론부터 물어도 된다.
이철민 소장도 이게 더 편하다고 내게 늘 말을 했었다.
-미국 지부에서 제이커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흔적?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지난번에 대구에서 붙잡혔던 테러리스트, 기억하십니까?
기억 못 할 리가 없었다.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던 대형 참사니까.
그리고 내가 그 현장에 있기도 했고 말이다.
그걸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을까.
이철민 소장이 대구 사건을 꺼낸 이유가 있었다.
-당시에 테러리스트가 자신의 랭크에 어울리지 않는 소환술을 펼치지 않았습니까?
“그랬었죠.”
파이어 골렘은 저랭크 헌터들은 소환조차 못 할 소환수다.
그런데 그걸 그 테러리스트는 아무런 수고도 들이지 않고 해냈다.
-그때 매개체로 사용했던 그 붉은 보석의 제조 공장을 찾아냈습니다.
“정말입니까?”
-예. 하지만 미국 지부가 급습했을 때에는 이미 다 철수하고 없는 상태더군요.
“하여간 눈치 하나는 더럽게 빠르네요.”
하긴, 치고 빠지기를 잘해야 테러리스트로 활동할 수 있는 법이니까.
용의주도한 녀석이기에 모든 국가들이 총력을 기울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못 잡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아까 멤버들한테 들었던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면 데이브가 잠깐 미국에 가게 되었다는 게 혹시 그것하고 연관되어 있습니까?”
-예. 데이브 씨는 대구에서 제이커가 제작한 소환수 매개체를 직접 사용했던 자를 상대해 본 경험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미국 지부 쪽에서 데이브를 불러서 여러 가지 대질 조사를 해 보려고 하나 봅니다.
“근데 왜 저한테는 연락이 없었나요?”
-데이브 씨는 미국 지부 소속이고, 태오 씨는 한국 쪽 소속이니까요. 헌터협회 내부 체계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아마 태오 씨한테는 시간이 좀 지난 다음에 요청이 들어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 다리를 더 건너야 하니까.
뭐, 그러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태오 씨도 가실 겁니까?
“갈 거 같으니까 저한테 연락한 거 아닌가요, 소장님?”
이철민 소장의 속내를 떠보기 위해 물었다.
내 말에 정곡을 찔린 모양인지, 이철민 소장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철민 소장이 알아서 실토를 했다.
-네, 맞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소장님이 저한테 원하시는 게 뭔가요?”
우리 사이에 이런 거 빙빙 돌려 말할 필요가 있나 싶다.
이철민 소장도 이걸 어렴풋이 눈치챈 모양인지 거두절미하고 자신이 원하는 걸 내게도 알려 줬다.
-소환수를 소환할 때 사용했던 그 매개체 있지 않습니까. 그것들 중 몇 개만 몰래 숨겨서 저한테 가져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밀반입을 해 달라고요?”
-예.
우리 이철민 소장, 제법인데?
법과 규칙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살아갈 것 같은 사람처럼 생겼는데.
의외로 그렇지 않았다.
아니지. 데이브가 노래하는 걸 사전 동의 없이 몰래 녹음한 적도 있으니까. 그냥 원래부터 막 나가는 부분이 있던 사람인가 보다.
내가 몰랐을 뿐이지.
민감한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거 같아서 일부러 내 방으로 장소를 옮겼다.
문을 닫은 뒤,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미리 새겨 둔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이철민 소장의 부탁이야 들어줄 수 있긴 하다.
대신에.
“저에게 밀반입을 요청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이유는 알고 도와줘야 속이 풀리는 체질이라서.
어쩔 수 없었다.
이철민 소장도 아무런 근거 없이 마냥 내게 부탁만 할 생각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순순히 이유를 알려 줬다.
-헌터협회를 통해서 증거물을 들여오게 되면, 과정이 너무 복잡하고 오래 걸리거든요. 그게 짜증 나서 그렇습니다.
뭐어…… 그렇게 느낄 수 있지.
충분히 이해한다.
그래서 나도 몬스터 퇴치가 끝나고 아이템 검수를 맡겨야 하는데, 가끔은 돌려받기 귀찮아서 그냥 몰래 생략하고 집으로 가져오곤 했었으니까 말이다.
협회장도 알고 있지만, 괜히 문제 일으키기 싫어서 몇 번씩 모른 척을 해 주곤 했었다.
아마 이것과 비슷한 경우가 아닐까 싶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소장님 말씀대로 할게요.”
-감사합니다.
“대신에 공짜는 아니고요.”
스마트폰 너머로 ‘쯧!’ 하면서 짧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말씀해 보시죠.
“저번에 저한테 주신 마이크 있지 않습니까? 혹시 그거, 성능 좀 업그레이드시켜 줄 수 있나 싶어서요.”
-성능을…… 말입니까?
“네.”
-예를 들자면요?
“예를 들자면…… 마이크를 사용할 곳이 전장이지 않습니까? 몬스터를 퇴치할 때 도움이 될 만한 옵션 스킬 같은 게 있으면 좋겠네요. 마이크에서 불이 나온다든지. 얼음 창이 소환된다든지. 아니면 메테오를 떨군다든지. 이것도 좋네요. 마력탄을 발사하는 기능도 추가되면 좋을 거 같고요. 또…….”
-태오 씨, 미리 말씀드리자면, 그거 다 한 아이템에 못 집어넣습니다. 태오 씨도 알고 계시죠?
“알고는 있지만, 이 소장님의 기술력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서 한번 해 본 말입니다.”
-딱 잘라서 말씀드리자면, 불가능합니다.
냉정하시네.
적어도 시도라도 한번 해 봤으면 좋겠는데.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린 것도 있으니까, 이건 대충 넘기기로 했다.
“그럼 현재 기술력의 한도 내에서 업그레이드를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그 정도는 가능합니다. 안 그래도 저도 마이크 아이템에 몇 개 추가하고 싶은 기능이 떠올라서요. 이건 조만간 제가 작업해서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소장님.”
역시, 나하고 이철민 소장은 통하는 게 많아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