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장. 위대한 탈출 (4)
좀비 떼들을 피해 들어간 방은 뭐라고 해야 할까.
우리가 아는 일반 방의 느낌이 전혀 아니었다.
동굴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철창에서 지하 실험실, 그리고 동굴까지.
너무 확 달라지는 배경 전환에 출연자들은 크게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황하는 고정 출연자들과 달리, 나와 아이리스는 의외로 침착했다.
이런 상황이 익숙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미로처럼 얽히고설킨 지역.
지하로 쭉 이어지는 비밀의 공간.
그리고 옆에 뚫려 있는 동굴 지역까지.
“오빠.”
아이리스가 나를 조용히 불렀다.
“여기, 그거 같지 않아요? DN-003.”
던전 코드를 말하는 아이리스.
코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레이드 시대가 시작되자마자 거의 초창기 시절에 등장했었던 던전을 의미한다.
던전이 출연했던 장소는 홍콩.
워낙 유명한 던전이었기에 방송에서도 가끔씩 괴담 소재로 사용되곤 했었다.
나도 어떤 다큐 방송에 출연해서 이 DN-003에 대한 썰을 몇 개 풀었던 적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던전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아이리스가 왜 여기서 DN-003을 언급했냐 하면…….
지금 우리가 녹화하고 있는 이 세트장과 DN-003의 구조가 거의 흡사하기 때문이었다.
던전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완전히 달라지는 각 방의 분위기도 그렇고.
구조도 거의 빼다 박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유사했다.
‘생각해 보니까 그 철창 구조도 자세히 보면 DN-003 입구 부분하고 많이 닮았어.’
아무래도 제작진이 세트장을 제작할 때 홍콩에서 나타났던 그 던전을 많이 참고한 모양이다.
간혹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던전에서 발견된 함정 장치를 모티브로 삼아서 선보이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예전에는 분명 헌터 협회에서 비공개라고 못을 박아 뒀던 던전의 함정이 예능 프로그램에 그대로 쓰여서 당황했던 적도 몇 번 있었다.
기밀 유출 문제나 그런 건 아닐 테고.
그냥 우연이 겹쳤을 가능성이 더 크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제작진이 어떤 장소를 모티브 삼아서 이 세트장을 만들었다는 정보를 알아낸 건 굉장히 큰 수확이다.
앞으로 어떤 식으로 세트장이 펼쳐질지, 함정 종류도 대충 예상해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스산한 기운이 감도는 동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실제 동굴은 아니고, 그런 느낌이 나게끔 일부러 만든 거 같은데.
‘정교하게 잘 만들었네.’
동굴 특유의 냉기 같은 경우에는 아마도 에어컨 같은 걸로 어찌어찌 타협을 봤을 것이다.
딱 피부로 느껴지는 것이, 자연적인 냉기가 아니라 인위적인 느낌이 굉장히 강했기 때문이다.
동굴 끝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다름이 아닌 ‘막다른 길’이었다.
“막혀 있는데요?”
“다른 길은 없나요?”
“네. 오면서 다른 쪽에 길이 뚫려 있는 건 못 봤습니다.”
“어떻게 해야 한담…….”
다시 돌아가 봐야 하나?
그러면 분명 좀비 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탈출이지, 사지로 발을 들이는 게 절대로 아니다.
‘여기가 엔딩 분기점인가.’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탈출 성공과 탈출 실패가 나뉜다.
“선배님.”
내가 장백두를 부르자,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면서 답했다.
“어후! 선배님이라고 하지 마세요. 그냥 편하게 형, 동생 합시다!”
“형님도 저한테 그럼 말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그럴까?”
장백두는 연예계에서 상당히 발이 넓은 사람이다.
성격도 호쾌해서, 선배든 후배든 그를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내가 장백두를 부른 이유는 별거 아니다.
그냥 하나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위대한 탈출’ 촬영하면서 탈출에 실패했던 적도 있습니까?”
“실패라…… 아니, 실패한 건 없었는데, 대신에 전원 탈출에 실패한 편은 있었지.”
“그래요?”
편수가 워낙 많기도 하고, 짧은 시간 동안 그걸 다 모니터링할 수가 없어서 몇 개는 빼놓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빼먹은 편 중에서 전원 탈출에 실패한 편이 섞여 있었나 보다.
장백두가 기억을 더듬으면서 내 궁금증을 풀어 주기 시작했다.
“아마 시즌 2 때였을 거야. 이번처럼 연구소에서 좀비들이 나오는 편이 있었는데, 그때 이런 룰이 있었거든. 좀비에게 물리면 10분 내로 감염된다. 그 10분 안에 해독제를 찾으면 되는데, 그때 몇 개 못 찾아서 나하고 몇 명 감염된 채로 끝났을걸.”
참고로 그때 탈출했던 인원은 고정 출연자들의 3분의 2였다고 한다.
그때만 전원 탈출 실패로 끝이 났고, 그 이외에는 아직까지 실패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이건 왜?”
장백두가 갑자기 이런 건 왜 묻는지 궁금해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모처럼 저하고 아이리스가 나왔는데, 전원 탈출 실패하는 거 보고 싶지 않아서요.”
내가 완벽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를 실패하는 건 굉장히 싫어하는 편이다.
오점 같은 걸 남기기 싫기도 하고 말이다.
전원 탈출 실패, 그 두 번째 사례로 내가 출연했던 편이 기록에 남는 건 피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좀비들한테 달려드는 건 안 되고. 여기서 어떻게든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밖에 없겠네요.”
“막다른 길인데, 어떻게 하려고?”
“아까 형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나하나가 다 단서라고.”
나는 아이리스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물었다.
“아이리스, 너도 얼추 느꼈지?”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아이리스는 척 알아들었다.
“바람의 흐름 말이죠?”
“어.”
지하에서 바람이 통할 리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있는 동굴에서는 바람이 통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여기, 바깥하고 이어져 있습니다.”
이 공간과 바깥이 연결되어 있다.
확실하다.
문제가 있다면.
“나갈 문이 안 보이는데요?”
유세련이 마침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그렇다. 바람이 불어오는 건 느껴지는데,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출입문 같은 게 일절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막다른 길에서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이.
저 멀리서 좀비 떼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출연진이 패닉에 휩싸였다.
“이, 이러다가 다 탈출 못하는 거 아니야?”
그건 내가 싫다.
찾아내야 한다.
이 막다른 길과 바깥을 연결시켜 주는 통로를!
“아이리스, 뭐 힌트가 될 만한 거 없어?”
이럴 때에는 역시 자칭 방탈출 전문가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없다.
아이리스가 주변을 빠르게 훑기 시작했다.
“오빠! 저기 위쪽에요!”
“어디!”
“저쪽만 색깔이 달라 보이지 않나요?”
아이리스가 정확하게 알아냈다.
어두워서 쉽게 놓칠 수 있는 부분이었는데, 그걸 캐치해 낸 것도 대단했다.
그러나 높이가 꽤 된다.
“저기 저 손잡이 같은 거 잡으면 되지 않을까?”
“능력을 사용하면 되는데…….”
아이리스의 혼잣말은 나에게도 견디기 힘든 유혹으로 다가왔다.
그냥 모른 척하고 확 각성 능력을 써 버려?
하지만 우리가 촬영에 임할 당시, 우리끼리 자체적으로 약속을 했었다.
이번에는 각성 능력을 사용하지 말고, 방탈출이라는 콘셉트에 어울리게 두뇌 플레이로 멋지게 탈출해 보자고.
이 행동이 두뇌 플레이에 해당될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양손을 깍지 끼고서 몸을 낮추고 아이리스의 발을 받쳐 줄 수 있도록 자세를 취했다.
아이리스도 내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 손 위로 발을 올린 뒤, 있는 힘껏 도약했다.
아이리스의 몸이 가벼운 덕분에 나도 각성 능력을 아예 사용하지 않고도 그녀를 동굴 천장 위까지 올릴 수 있었다.
각성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원래부터 지니고 있는 운동신경까지 사용 못 하는 건 아니었다.
단 한 번의 기회!
손잡이를 낚아챈 아이리스였지만, 이내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아래에 있는 우리들에게 외쳤다.
“오빠! 여기도 비밀번호 눌러야 해요!”
“비밀번호? 누르는 칸이 있긴 해?”
“네! 천장에 있어요! 이거 누르면 비밀 통로 열리는 거 같아요!”
저게 마지막 관문인가 보다.
그사이, 좀비 떼들은 어느새 우리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어떻게 해요, 오빠!”
생각해 보자.
분명 제작진은 우리에게 비밀번호에 관한 힌트를 이미 줬을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을 떠올려 보면 된다.
이때, 장백두 형님이 내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소한 것도 단서가 될 수 있다.
“세련 씨! 아까 실험실 책상 위에 있던 논문 같은 거 가져오셨죠?”
“네! 이거 말씀하시는 거죠?”
난 그것을 바로 낚아챘다.
논문을 빠르게 살피던 나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논문 페이지는 총 12장.
이 중 페이지 하단 아래에 몇 페이지인지 숫자로 표기되어 있는 건 네 장밖에 없었다.
“아이리스! 비밀번호 몇 자리라고 했지?”
“네 자리요!”
“그럼 내가 숫자 불러 주는 거 차례대로 입력해 봐! 1, 3, 5, 7!”
“1, 3, 5…… 7!”
아이리스가 한 손으로 손잡이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러자 갑자기 동굴 벽 쪽에서 뭔가가 거세게 뿜어져 나왔다.
치이이이익-!
살포제 같은 것들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좀비들 위로 뿌려졌다.
그러자 좀비들이 힘없이 제자리에 고꾸라졌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거?”
당황하는 출연자들을 위해서 내가 직접 설명해 줬다.
“좀비를 실험할 때 개발했던 약이래요. 이걸 좀비들에게 뿌리면, 몸을 굳게 만든다고 하더라고요.”
“넌 그런 걸 어디서 본 거야?”
어디겠나.
세련 씨한테서 받은 논문을 꺼내 들었다.
“여기에 다 나와 있어요.”
그냥 가볍게 지나갈 수 있는 말들이었다.
하지만 백두 형님이 시즌을 거듭하면서 겪어 온 조언 덕분에 우리는 무사히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다.
* * *
결국 간수들이 우리에게 지하에서 나와야 한다고 했던 것은 좀비들에게 먹힐까 봐, 정말로 걱정이 되어서 했던 말이었다.
우리는 실험실에서 확보한 논문을 가지고 간수들을 향해 이 자료들을 전부 공개하겠다고 협박했다.
영화에 출연하면서 배운 연기를 이럴 때 써먹을 줄은 몰랐다.
우리의 협박에 잔뜩 겁을 먹은 간수들은 어쩔 수 없이 우리 모두를 풀어 주게 되었다.
밖으로 내보내 주겠다고 말한 간수는 아까 우리가 좀비들을 퇴치한 동굴로 안내했다.
간수가 리모컨을 꺼내 누르자, 막다른 길이라 생각했던 동굴 벽이 움직였다.
그제야 우리는 바깥으로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다.
밖으로 나오자, 수많은 스태프들이 우리를 환영하면서 탈출이라 적혀 있는 버튼을 가리켰다.
장백두 형님이 우리를 한자리로 불러 모았다.
“누를 때 다 같이 누르자! 알았지?”
“하나, 둘, 셋!”
탈출 버튼을 누르자, 주변에서 폭죽이 터지면서 우리의 탈출을 축하해 줬다.
아이리스가 작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어때요, 오빠. 방탈출, 재밌죠?”
“그러게. 할 만하네.”
나중에 시간 나면, 지인들 데리고 방탈출 카페에 한번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