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장. 위대한 탈출 (3)
출연자들끼리 서로 선두를 미루는 모습을 나와 아이리스는 말없이 지켜봤다.
아이리스가 내게 작게 속삭였다.
“오빠, 그냥 우리가 먼저 내려가겠다고 할까요?”
나와 아이리스는 깊은 던전을 탐험하는 게 일이었기에 이런 건 문제가 될 게 아무것도 없었다.
던전 내부는 저곳보다 더 깜깜했기 때문이었다.
여기 촬영장은 그래도 다칠 걱정 없이 안전하기라도 하지, 던전 내부는 언제 몬스터가 튀어나와 우리를 공격할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가 늘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 심리적인 압박감을 견디고 살아야 했던 게 우리 헌터들이다.
그래서 사실 출연진끼리 저렇게 말다툼을 하는 모습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뭐, 일반인들이라면 당연한 반응일 테니까.’
나도 각성 능력이 없고 헌터의 길을 걷지 않았더라면 저들의 말싸움 현장에 끼어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리스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인 내가 먼저 출연자들에게 말을 걸었다.
“제가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제 뒤에 바짝 붙어서 따라오세요. 아이리스는 가장 나중에 따라오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네, 오빠.”
내 머릿속에는 벌써부터 우리가 어떻게 계단을 내려가면 좋을지에 대한 고민이 끝나 있었다.
이미 대열까지 다 생각을 해 뒀다.
그러나 장백두가 내 말을 부정했다.
“아닙니다! 게스트로 오셨는데 이런 일까지 시키면 저희가 너무 염치없죠.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중에 한 명이 선두에 설 겁니다.”
“아, 형! 태오 씨잖아! 앞장서신다고 할 때 얌전히 받아들여!”
“그래, 형! 무슨 일 벌어지면 우리가 더 위험하다고! 태오 씨는 아무렇지도 않을걸.”
정확한 의견이다.
그럼에도 장백두는 고정 출연자들의 자존심이 있지 않냐고 한동안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이 고집도 공포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다시 한번 철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쾅! 쾅! 쾅!
아까보다 소리가 더 커졌다.
“문 부술 테니까 준비해!”
“네, 알겠습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출연자들이 크게 놀랐다.
“무, 문을 부순다고?”
“빨리 내려가자, 빨리!”
“태오 씨, 부탁 좀 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결국은 내 생각대로 됐다.
마력을 이용하면 빛나는 구체 같은 것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아까도 말했듯이 마법을 사용하면 프로그램이 너무 재미가 없어져 버린다.
능력 사용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면, 그냥 처음 시작 단계에서부터 뭐 고민할 것도 없이 벽 부수면서 탈출 버튼 찾으러 다녔겠지.
하지만 이러면 방탈출이라는 콘셉트가 너무 많이 퇴색될 거 같아서 일부러 능력 사용은 자중하고 있는 중이다.
아이리스도 나와 같은 생각이고 말이다.
손전등 없이 내려가야 하는 어둠의 계단.
믿을 것은 오직 내 감과 발끝의 감각, 그리고 벽에 짚은 손. 이게 다였다.
“조심해서 따라오세요. 앞에 계단 있습니다.”
계단이 나올 때마다 나는 ‘계단’이라고 짧게 말을 해 줬다.
내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장백두가 파도타기처럼 다른 출연자들에게도 ‘계단’이라고 말하면서 경고를 했다.
그렇게 3분 정도 흘렀을까.
어둠에 적응이 된 모양인지, 이제는 형체를 어느 정도 구별할 수 있을 정도까지 시야가 확보되었다.
‘이다음부터는 평지인가 보군.’
이것도 혹시 몰라서 뒤따라오는 출연자들에게 말해 주기로 했다
“계단 끝났습니다. 길 따라서 쭉 걷기만 하면 되는 거 같으니까 저 따라오시…….”
내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갑자기 양쪽 벽에서 드라이아이스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에 따라 출연자들이 ‘으아악!’ 하는 비명을 질러 댔다.
여기서 안 놀란 사람은 나하고 아이리스, 단둘뿐이었다.
반대로 장백두와 유세련, 그리고 다른 출연자들은 너무 놀란 모양인지 다리에 힘이 풀린 채 그대로 주저앉은 모습을 보였다.
“어후,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거봐요! 내가 분명 뭐 나온다고 했잖아요!”
“그, 그나저나 태오 씨, 괜찮으세요?”
“태오 씨는 안 놀라세요?”
출연자들의 관심이 내게 쏟아졌다.
아이리스도 나와 똑같이 무덤덤한 반응을 보여 줬지만, 최후방에 있어서 그런지 출연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거 같다.
“네, 전 괜찮습니다. 이런 일은 헌터 때 많이 당해 봤거든요.”
던전에서는 연기가 아니라 몬스터가 튀어나오니까.
그래서 나는 연기가 새어 나올 때, 오히려 ‘시원하고 좋네.’라고 생각했었다.
그렇다고 겁에 질린 출연자들에게 이런 여유를 부리는 건 일종의 기만이 될 거 같아서 일부러 말은 하지 않았다.
“계속 가겠습니다.”
방송 분량은 충분히 뽑아낸 거 같으니, 후딱 다음 관문으로 넘어가고 싶어졌다.
그러나 제작진은 여기서 제대로 뽕을 뽑을 생각인지, 우리를 놀라게 할 장치가 아직 몇 개 더 도사리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가발을 씌운 마네킹이 갑자기 튀어나온다든지.
사방에서 귀신의 울음소리가 짱짱한 사운드로 재생된다든지.
이런 것들 말이다.
나는 크게 놀라지 않았는데, 장백두와 고정 출연자들은 이런 사소한 장치 하나하나에 다 크게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방송을 위해서 일부러 놀라는 듯한 것도 아니었다.
정말 순수하게 무서워서 놀라는 거였다.
‘제작진이 아주 보람을 제대로 느끼겠네.’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그 와중에 뒤따라오던 아이리스가 내게 새로운 정보를 하나 전달했다.
“오빠, 근처에 스위치 같은 거 없어요?”
“스위치?”
“네. 슬슬 불이 필요한 시점일 거 같아서요.”
아이리스의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마침 코너를 도니, 스위치 같은 게 눈에 띄었다.
아이리스도 방송감이 제대로 살아 있네.
스위치를 누르는 순간, 어둠으로 가득 차 있던 공간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갑자기 빛이 쏟아지자, 출연자들은 또 한 번 크게 놀랐다.
“태, 태오 씨! 불 켜실 거면 미리 말이라도 좀 해 주시지…….”
장백두의 소심한 항의에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한창 예민한 상태에서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다 놀라는 법이니까.
불이 켜진 덕분에 우리들은 좀 더 자세히 우리가 있던 장소를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지하치고는 상당히 넓은 공간.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실험실을 연상케 하는 장소네요.”
유세련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했다.
안 그래도 나도 그 말이 하고 싶었는데.
영화에 보면 간혹 미치광이 사이코 과학자가 이상한 생물 실험 같은 것을 자행할 때 나오는 그런 장소들 있지 않은가.
우리가 있는 곳이 딱 그런 형태로 꾸며져 있었다.
“감옥 지하에 이런 장소가 있나?”
“여기…… 느낌이 영 좋지 않아요.”
“춥기도 하고. 스산하다고 해야 하나…….”
출연자들이 이 장소를 통해 받은 느낌을 소소하게나마 표현했다.
이때, 장백두가 갑자기 억지로 용기를 내려는 듯이 크게 박수를 치면서 출연자들을 독려했다.
“자 자!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다 단서라는 거 잊지 말고! 일단 주변을 둘러보면서 탈출할 수 있는 힌트 같은 게 있는지 살펴보자!”
장백두의 말에 우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목적은 방탈출이다.
물론 이제 와서 ‘방’이라는 개념과는 상당히 동떨어지게 되었다는 건 나도 안다.
그래도 뭐, 대충 그런 콘셉트라고 했으니까.
일단은 근처를 한번 쭉 훑었다.
‘이런 것까지 다 만들었나?’
만들어지다가 만 괴물 같은 형상이 거대한 실험관 안에 들어 있었다.
손으로 툭툭 건드려 봤지만, 특별히 무슨 일이 벌어지거나 하진 않았다.
제작진이 하나하나 다 만든 거 같은데.
‘잘 만들었네.’
제작진 내에 특수효과팀이 있다고 들었다.
솔직히 예능 프로그램이니까, 영화 쪽에 비하면 아무래도 좀 어설프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이 정도면 웬만큼 대규모 자본이 들어간 영화 뺨칠 정도의 수준이다.
‘PD가 방탈출 예능에 진심이라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인가 보네.’
하긴, 이런 장인 정신이 있으니까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계속 시즌을 이어 올 수 있었던 거겠지.
책상 위에는 이곳에서 일했던 과학자 중 한 명이 남긴 자료들로 추정되는 문서들이 다량으로 발견되었다.
문서를 쭉 눈으로 훑었다.
자료들을 보고 나서야 나는 위의 감옥과 현재 우리가 있는 지하실의 실험실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기,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임상 실험 같은 걸 무분별하게 진행하던 그런 곳인가 보네요.”
인간을 대상으로 한 비인도적인 실험들이 벌어지는 곳.
그것이 이곳 교도소의 정체였다.
내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유리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유세련이 나를 급하게 찾았다.
“태, 태오 씨! 저, 저기 보세요, 저기!”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불이 다 켜지지 않은 어두운 공간.
그 사이로 서서히 다가오는 한 괴물 무리.
좀비였다.
* * *
터벅터벅 걸어오는 다수의 좀비 무리를 보면서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분장 리얼하네.’
고어스러운 연출도 아주 잘 표현했다.
특수분장에도 진심이라는 제작진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다.
“어, 어떻게 하죠? 태오 씨!”
설마 여기서 내가 좀비들을 다 때려눕히는 시나리오는 아닐 테고.
만약에 정말로 나를 쓰러뜨리고 싶다면, 드래곤이라도 데려와야 한다.
한 마리는 이미 이겼으니까, 두 마리 정도?
즉, 내가 좀비들을 쓰러뜨리라는 뜻에서 이런 상황을 연출한 건 아닐 거라는 소리다.
싸울 수 없다면.
“도망치는 게 좋겠네요.”
출연자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아이리스가 아직 우리가 가 보지 않았던 방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쪽으로 가죠!”
아이리스의 빠른 판단력 덕분에 출연자들은 금세 목적지를 정할 수 있었다.
이때, 갑자기 좀비들이 우리를 향해 미친 듯이 뛰어오기 시작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좀비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어기적어기적 느릿하게 걸어 다니는 좀비들.
그리고 지금처럼 인간 못지않게 살벌하게 뛰어다니는 좀비들.
당연하게도 후자가 더 상대하기 어렵다.
물론.
‘그래 봤자 나한테는 거기서 거기지.’
이 와중에도 긴박함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방송이라는 것을 염두에 뒀기에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어서 움직이세요! 그동안 제가 시간 끌고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직접 좀비 분장을 한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주먹질을 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좀비를 연기하는 사람들 역시 내 말을 오해했는지 순간적으로 움찔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덕분에 나는 아니라는 뜻으로 손사래를 빠르게 쳤다.
의자나 책상을 쓰러뜨리면서 좀비들의 전진을 늦추는 식으로 시간을 끌어 보겠다고 한 말이었다.
내가 행동으로 보여 주고 나서야 좀비 연기를 하는 사람들은 안심(?)을 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아까처럼 우리들을 쫓기 위해 다시 발을 움직였다.
내 시간 끌기가 통한 모양인지.
아니면 좀비 연기자들이 방송에 걸맞게 일부러 우리에게 시간을 준 건지.
우리들은 무사히 좀비 무리를 피해 건너편 방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방송 참 힘드네.’
세상에 쉬운 일 하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