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라를 구한 톱스타-133화 (133/250)

제35장. 위대한 탈출 (2)

우리가 서 있는 곳을 기점으로 벽에 여러 가지 낙서 같은 게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우리보다 먼저 이곳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이 남긴 낙서……라는 설정으로 제작진이 아무렇게나 끄적여 둔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멀리서 보니,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거, 자세히 보니까 숫자를 나타내는 거 같은데?”

“숫자요?”

“어, 여기 와서 봐 봐.”

나는 잘 모르겠고, 이런 건 아이리스에게 맡겨 보기로 했다.

“저기 저쪽 돛단배 보이지? 저 돛단배 그림하고 꽃게, 상어하고 연결 지어 봐. 그러면 숫자 3 같은 게 보이지 않아?”

“어머, 정말이네요?”

이 공간에 오자마자 유세련 씨가 단번에 찾은 게 하나 있었다.

숫자 같은 걸 입력하는 잠금장치였다.

이 잠금장치는 우리를 제외한 다른 출연자들이 갇혀 있는 방문에 설치되어 있었다.

잠금장치를 해제할 수 있는 비밀번호만 입력하면.

그러면 여기 방이 열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 좀 더 발전시킨다면, 이런 생각까지 할 수 있다.

제작진이 분명 이 공간 안에 비밀번호를 유추할 수 있는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을 남겼을 거라고.

내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아이리스가 매의 눈으로 그림들을 이어 가면서 네 자리의 숫자를 도출해 냈다.

“세련 씨, 8107 한번 입력해 보세요.”

“8107이요? 잠시만요.”

잠금장치 바로 근처에 있던 세련 씨가 아이리스의 지시에 따라 비밀번호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띠리링! 소리가 나면서 잠금장치가 해제되었다.

“어머어머어머!”

“열렸어요, 태오 오빠!”

아이리스가 기뻐서 무의식적으로 나온 행동인지, 아니면 의도적인지 모를 포옹을 내게 선보였다.

그만큼 기뻐서 그랬겠거니 하고 넘기기로 했다.

잠금장치가 해제되자마자 안에 갇혀 있던 나머지 출연자들이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되었다.

촬영이 시작되고 거의 2시간 만에 모든 출연진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나와 아이리스를 보자마자 고정 출연진이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태오 씨를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철창이 아니라 좀 더 화사한 장소에서 만났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죠.”

내 가벼운 농담에 출연자들이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러나 출연자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고 ‘위대한 탈출’ 녹화가 끝난 건 아니었다.

‘위대한 탈출’에는 모든 시리즈를 관통하는 한 가지 탈출 법칙이 있다.

‘탈출’이라고 크게 적혀 있는 버튼을 눌러야만 탈출 성공으로 인정된다.

그게 아니면, 탈출은 실패다.

일단은 그 버튼부터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직 안 가 본 철창부터 먼저 살펴볼까요?”

아이리스가 주도적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언급했다.

우리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제작진은 방탈출이라는 소재로 예능 프로그램을 만든 지 거의 3년이 넘어가는 베테랑들이다.

시즌 1과 2 그리고 현재 방영 중인 시즌 3까지.

탄탄한 스테이지 구성과 연출, 그리고 시나리오 덕분에 ‘위대한 탈출’은 탄탄한 마니아층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런 제작진이기에 허술하게 스테이지를 만들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연진 중 최연장자이기도 한 코미디언 출신, 장백두가 목소리를 높이면서 출연자들을 독려했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다 단서야! 눈에 보이는 거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한 번씩 확인해 봐. 알겠지?”

“네!”

장백두 역시 나처럼 두뇌파가 아닌 행동파 포지션을 맡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시즌 1부터 지금까지 쭉 리더로서의 자리를 지켜 오고 있었다.

단순히 나이가 많아서 그런 게 아니었다.

카리스마 덕분이었다.

저렇게 선두에 나서서 이거 하자, 저거 하자 착착 할 것을 정해 주니까 팀원들도 믿고 따를 수 있었다.

그러나 간혹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코너를 돌자, 저 멀리서 간수복을 입은 사람들이 갑자기 호루라기를 삐익! 하고 불었다.

나와 아이리스를 제외한 다른 출연자들은 갑작스러운 소음에 크게 놀랐다.

“뭐, 뭐야!”

“백두 오빠, 저기! 간수들 오고 있어요!”

“얘들아, 튀자!”

나와 아이리스가 나서면 금세 제압할 수 있지만, 그러면 예능이 아니라 다큐가 되어 버릴 테니까.

‘보니까 우리가 탈옥수고, 저 사람들이 우리를 붙잡는 역할인가 보네.’

일단은 제작진의 의도대로 움직여 주기로 했다.

상황이 딱 부여되어 있고, 우리가 그 상황 속으로 들어와서 극중의 인물처럼 움직이는 중인데, 여기서 갑자기 설정 파괴를 해 버리면 좀 그렇지 않은가.

그건 방송을 망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우리 일곱 명은 간수들을 피해 빠르게 장소를 이탈했다.

중간에 딱 봐도 여기 숨으라는 느낌을 강하게 풍기는 캐비닛들이 눈에 들어왔다.

일렬로 쫙 늘어서 있는 캐비닛을 가리켰다.

“저쪽에 숨으면 될 거 같습니다!”

내 외침을 듣고 출연자들은 고민도 할 것 없이 바로 행동에 들어섰다.

보통 반사 신경이 아니었다.

하긴, 시즌 1부터 쭉 이 멤버로 이어 오고 있는데, 방송에 임하면서 이런 상황에 얼마나 많이 단련이 되었을까.

경험이란 이름의 짬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하나씩 캐비닛에 들어가 간수들이 우리가 있는 위치를 그대로 통과하기를 기다렸다.

당연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설정에 열중하는 만큼 간수로 출연하고 있는 저 배우들 역시 지금 이 상황 설정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캐비닛에 숨는 과정을 눈으로 살짝 봤다 할지라도 굳이 눈치챈 척까지 하진 않았다.

그러면 배드 엔딩으로 너무 일찍 끝나 버리니까 말이다.

‘아마 그냥 지나가겠지.’

이런 내 예상은 아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이 녀석들…… 대체 어디 간 거지?”

“저기, 저쪽으로 간 거 아니야?”

“한번 가 보자고!”

저 대사는 마치 ‘우리, 저쪽에 가 있을 테니까 알아서 몰래 잘 숨어서 가라.’라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저렇게 친절한 간수들이 또 어디 있을까.

간수들이 갔음을 알아차린 나는 먼저 캐비닛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내 뒤를 이어 아이리스도 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출연자들은 잔뜩 겁을 먹었는지, 쉽게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모습에 순간적으로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그래도 진지한 상황이었기에 억지로 웃음을 참아 냈다.

“간수들 없습니다. 나오셔도 됩니다.”

결국 내가 나서서 말을 해 주기로 했다.

그제야 출연자들이 숨은 캐비닛의 문이 하나하나씩 열리기 시작했다.

“저, 정말로 갔어요?”

“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아이리스가 혹시 몰라서 입구 쪽에 서서 망을 보고 있었다.

헌터 활동을 워낙 오랫동안 했기에 우리 둘은 누가 어떤 역할을 하라는 지시가 없어도 알아서 척척 움직였다.

이런 걸 보면 승훈이 형이 프로그램을 잘 잡아 준 거 같기도 하고.

애매하긴 하다.

아이리스가 먼저 복도로 나가 주변을 살폈다.

정찰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아이리스가 우리가 가려던 방향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지금 빨리 가야 할 거 같아요. 저 사람들이 언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지 모르니까요.”

“그, 그러는 게 좋겠어. 가자!”

“네!”

장백두의 진두지휘 아래에 출연자들이 걸음을 재촉했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우리들.

이때.

다시 한번 삐익! 하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저쪽에 있다!”

“네 이놈들! 거기 안 서?”

“어떻게든 붙잡아! 어서!”

제작진이 달리기 선수들한테만 간수 역할을 맡기기라도 한 건가.

간수들이 우리보다 더 빠른 속도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주변을 재빨리 살폈다.

이번에도 캐비닛의 도움을 받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그렇다면.

간수들이 나온 공간으로 우리가 먼저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그는 방법밖에 없다.

“안쪽으로 들어가세요! 빨리!”

내 외침에 따라 출연자들이 문 안쪽으로 잽싸게 들어갔다.

마지막까지 남은 내가 문을 쾅! 닫고서 잠금장치로 문을 걸어 잠갔다.

띠링! 소리와 함께 완벽하게 닫혀 버린 철문.

밖에서 간수들이 쾅쾅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두드리면서 외쳤다.

“거기 들어가면 안 돼!”

“어서 나오라고, 어서!”

우리를 밖으로 끌어내기 위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눈에 봐도 아군처럼 안 보이는데, 저들의 말에 따를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일단 간수들을 피해서 좀 더 깊은 곳으로 들어오긴 했는데.

“여기,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이네요.”

출연자 중 한 명이 우리 앞에 있는 계단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탈출을 해야 하는데,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는 게 조금 이해가 가질 않았다.

‘탈출 버튼이 지하에 있나?’

내가 여태껏 모니터링했던 ‘위대한 탈출’의 탈출 엔딩 대부분은 실내에서 벗어나 야외로 빠져나왔을 때 이루어졌다.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탈출 버튼을 누른다.

이게 거의 공식처럼 정립되어 있는 게 바로 ‘위대한 탈출’인데.

지하로 들어간다?

아무래도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래도 다른 길을 택하는 건 불가능했다.

애초에 외길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리스가 먼저 앞장서면서 말했다.

“일단 내려가 보죠. 여기가 골 지점이든 아니든, 무조건 가 봐야 하는 장소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이니까요.”

“내가 봐도 그렇게 보이긴 해.”

아이리스의 말에 깊은 공감을 표했다.

오늘 처음으로 출연한 내가 느끼기에도 이런데, 시즌 1부터 이런 걸 숱하게 경험해 온 다른 고정 출연자들은 어떨까?

그들은 지하로 나 있는 계단을 보자마자 필연적으로 여길 내려가야 한다는 걸 깨달은 상태였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유세련 씨가 기겁을 하면서 말했다.

“불이…… 안 들어오는데요?”

“뭐?”

“잠깐만. 그러면 저렇게 깜깜한 채로 계단을 내려가라는 거야?”

“와, 나…… 돌아 버리겠네.”

위험한 것보단 무서워서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거였다.

언제 어디서 뭐가 튀어나와도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는 지하실.

출연자들의 어깨가 바짝 움츠러들었다.

이 중 한 명이 몸서리를 치면서 말했다.

“나, 난 못 내려갈 거 같은데.”

“저도요…….”

“갑자기 귀신 튀어나오는 거 아니에요?”

내가 만약 이 프로그램의 PD라면, 방금 저 아이디어를 활용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귀신 분장을 한 연기자라든지, 아니면 마네킹이나 깜짝 놀라게 만들 만한 장치 같은 걸 설치해서 재미있는 장면을 여럿 뽑아낼 수 있는 구간이다.

출연자들도 나름 오랫동안 방송을 해 온 사람들이다.

방송이라는 게 어떤 건지, 저들도 잘 안다.

그래서 직감한 것이다.

여기에 뭔가가 있다고.

서로 누가 먼저 내려가느냐, 한창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백두 형이 먼저 내려가요!”

“내, 내가? 왜!”

“형이 이런 상황에서 앞장서시는 거 잘하잖아요!”

“저번에도 내가 맨 앞에 갔는데, 이번에도 그러라고? 방송 너무 날로 먹는 거 아니냐?”

“그렇다고 게스트분들 오셨는데, 저분들 앞에 세울 순 없잖아요!”

아니, 나는 딱히 상관없는데.

그렇게 출연자들끼리 한동안 옥신각신하기 시작했다.

이 장면도 모니터링하면서 많이 봤었는데.

TV에서만 보던 장면을 바로 눈앞에서 봐서 그런 걸까.

어느새 나는 시청자의 입장에서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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