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장. 컴백 준비 (1)
최 프로듀서와 나름 오랫동안 작업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었다.
최 프로듀서는 작업 속도가 엄청 빠른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느린 축에 속했다.
그렇다고 막 일정에 지장이 생길 정도로 엄청 느린 편은 아니고, 그냥 ‘좀 늦네.’ 하는 생각이 들 때쯤에 곡이 나왔다고 연락을 하는, 딱 그런 정도의 작업 속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굉장히 빨리 작업하셨네요?”
내가 보기엔 거의 역대급 빠르기인 것 같다.
그 정도로 예상 못 했던 일이 벌어진 셈이었다.
최 프로듀서도 스스로가 대견스러운 모양인지 내게 좀 더 칭찬해 줘도 괜찮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이번에는 유독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더라고요. 원래는 좀 막히는 구간이 생기고 그랬는데, 이번에는 그런 거 없이 멜로디부터 한 번에 쭉 진행되었습니다. 내일 가이드곡 만들어서 들려드릴까 하는데, 시간 괜찮으시죠?”
“네, 뭐…… ‘던전 탐험대’ 사전 미팅 말고는 딱히 일정 잡혀 있는 건 없습니다. 오전 일찍 이야기 나누고 끝날 예정이라서 오후에는 회사로 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그 전까지 가이드곡 만들어 둬야겠네요.”
오늘따라 최 프로듀서가 왜 이렇게 의욕을 불태우는지 모르겠다.
준서도 그렇고, 내가 K-pop 합동 콘서트 일로 미국에 잠깐 갔다 온 사이에 바뀐 주변인들이 왜 이렇게 많아졌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부정적으로 바뀐 것도 아니고, 긍정적인 변화는 나도 늘 환영이긴 하지만.
‘그것도 타이밍이 좋아야지.’
영화 관련 일정이 추가로 생길 거 같아서 최 프로듀서에게 천천히 작업해도 된다고 말하려고 하던 때에 가이드곡을 들려주겠다고 하니까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참 난감하다.
그래도 우리 HTB의 두 번째 타이틀곡이 가닥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니까, 듣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사람이라는 게 참 간사하다. 말 한마디에 이렇게 마음이 휙휙 바뀌고 그러니까 말이다.
“그럼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이사님.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곡 기가 막히게 뽑혔거든요!”
“아…… 네.”
최 프로듀서가 작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나는 다시 복도로 나왔다.
정작 작업실에는 발조차 들이지도 못하고 말이다.
“뭐, 어쩔 수 없지.”
어깨를 한 차례 으쓱한 나는 다시 내 사무실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 * *
승훈이 형과 함께 ‘던전 탐험대’ 제작진과의 미팅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이동하는 동안, 나는 어제 회사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해 줬다.
“최 프로듀서님이 오늘 나한테 가이드곡 들려주겠대.”
“어떤 거? 네 솔로곡, 아니면 HTB?”
“HTB.”
“이야, 우리 최 프로듀서님이 웬일이래? 이렇게 빨리 곡을 만들어 내고.”
“곡만 만들어 냈지, 아직 그 곡으로 가기로 결정된 건 아니니까.”
일단은 멤버들이 한 번씩 쭉 들어 보고 노래가 괜찮다 싶으면 그대로 가는 거고, 아니면 다시 한번 이야기를 해 봐야 한다.
웬만하면 다 좋다고 하긴 할 텐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말이다.
정작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자신의 노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우리 회사는 이런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가수는 자신이 불러야 할 노래의 제1호 팬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팬들에게 만족스러운 무대를 선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승훈이 형이 나와 같이 엘리베이터에 오르면서 말했다.
“너희 다섯 명이 은근히 노래 취향이 비슷해서, 네가 딱 들어 보고 ‘이거 괜찮은데?’라는 반응이 나오면 다른 멤버들도 그렇게 말할 가능성이 클 거다.”
“우리가 노래 취향이 비슷했던가?”
“어, 너희는 모르겠지만, 제3자인 내가 보면 그렇더라.”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힘들다.
승훈이 형은 나와 HTB의 매니저니까. 그만큼 오랫동안, 그리고 가까운 거리에서 우리들을 지켜봐 왔다.
형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승훈이 형이 뭔가를 분석하는 능력이 생각보다 괜찮기 때문이다.
“가이드곡 나오면, 다른 멤버들한테는 어떻게 들려주려고?”
“P2P로 올려 두고, 알아서 다운받으라고 해야지.”
“요즘 유출 사건 많이 터지고 있으니까 조심하라고 해. 뭐…… 프로듀서님이 알아서 잘하시겠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도 유출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아직 컴백도 안 했는데 곡이 유출되어 버리면 그런 대형 사고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던전 탐험대’ 제작진이 일하고 있는 사무실에 도착했다.
박민진 PD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밝은 미소를 지으면서 우리들을 반겼다.
박 PD가 나를 보면서 가장 먼저 이런 말을 들려줬다.
“영화 대박 치셨던데요?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흥행할 거라고는 예상했었는데, 이렇게까지 반응이 뜨거울 줄은 몰랐습니다.”
상영관에서 내려가려면 아직 시간이 남은 상황인데.
어제, 드디어 천만 관객 돌파 소식을 듣게 되었다.
첫 영화 출연에 천만 영화의 조연 배우가 된 셈이었다.
이제 세계 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일만 남았다.
지금까지는 분위기가 좋으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천만 영화 반열에 오른 것보다 더 좋은 소식들이 연달아 들려올 것으로 기대된다.
박 PD가 자리에 앉으면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이어 갔다.
“저도 개봉하자마자 영화관으로 바로 달려가서 봤는데, 엄청 재미있더라고요. 여기 앉아 있는 김 작가는 ‘그날, 우리’만 벌써 7회 차 보고 있대요.”
같은 영화를 일곱 번이나 보는 게 결코 쉽지 않은데.
그럼에도 김 작가는 8회 차를 넘어서 10회 차까지 찍을 거라고 강한 의욕을 드러냈다.
이런 열성 팬이 눈앞에 있는데, 가만히 넘어갈 내가 아니다.
“잠시만요. 혹시 영화 관련 굿즈 같은 거 가지고 계신가요?”
“네? 왜요?”
“사인이라도 해 드리려고요.”
김 작가라 불린 여성이 크게 기뻐하면서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말을 남기고 급하게 회의실을 벗어났다.
가져온 물건은 우리 영화의 스틱 포스터였다.
오른쪽 하단에 최대한 잘 보이도록 사인을 해 주고 우리 영화 사랑해 줘서 고맙다는 내용의 메시지도 간단하게 적었다.
작가가 눈빛을 반짝이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제 보물 1호로 삼을게요!”
“잘 간직해 주세요.”
갑작스러운 팬 미팅은 이쯤에서 종료하고.
오늘 미팅을 잡은 목적을 다시금 상기하면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던전 탐험대’ 정규 편성 일자가 정해졌어요.”
“드디어군요.”
“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그동안 저도 이런저런 이들이 많이 있었으니까요.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크로맨서 사건이 터지고.
미국에서 스웹 같은, 무리를 이루는 몬스터들이 나타나고 그러다 보니 한동안 던전에 대한 출입 통제가 다시 펼쳐지게 되었다.
혹여나 민간인들에게 던전 출입을 허용했다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몬스터에 의해 사상자라도 발생하게 되면 큰일이지 않은가.
그래서 의도치 않게 ‘던전 탐험대’ 촬영 역시 무기한으로 미뤄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협회 측에서 철저하게 안전이 검증된 던전에 한해서 촬영을 할 수 있도록 허가를 내줬다는 소식을 전달받았다.
덕분에 언제 촬영이 재개될지 몰랐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협회 측에서 촬영을 허가해 준 대신에 헌터들도 같이 동반해서 촬영을 진행해야 한다고 그러더라고요.”
“헌터들이라면 저도 있고, 아이리스도 있고, 나빈이도 있고. 필요하다면 HTB 멤버도 데려갈 수 있으니까 상관없지 않을까요?”
“협회의 ‘헌터들을 동반해야 한다.’라는 말의 범위에 출연자는 포함이 안 된대요.”
“그러면 따로 헌터들을 고용해야겠군요.”
“네. 아무래도 그렇게 될 거 같아요.”
어떤 헌터를 고용하든, 나보다 강한 전투력을 보유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경호 대상자가 경호원보다 강하다니.
마치 최정상급 이종격투기 선수가 경호원을 대동해서 다니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것들이 다 안전을 위한 거니까.
오히려 협회 측의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고 본다.
안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니까.
작가한테서 정해진 촬영 일정과 함께 프로그램에 관한 정보들이 적힌 자료들을 넘겨받았다.
박 PD가 자료들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나중에 데이터로도 보내 드릴 테니까, 그때 다시 한번 살펴보세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다시 한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저희도요. 그때쯤이면 많이 바쁘실 텐데, 만약에 일정 조율이 힘드실 거 같으면 미리 말씀해 주셔도 돼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태오 씨인데, 저희가 맞춰야죠.”
내 입에서 어색한 웃음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박 PD가 나를 신경 써 주는 거야 좋긴 한데.
귀빈 대접을 받는 거 같아서 조금 부담스럽긴 하다.
* * *
미팅을 마치고 승훈이 형과 같이 점심을 먹은 뒤에 예정대로 회사로 복귀했다.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최 프로듀서가 곧바로 내가 있는 곳을 찾았다.
“이사님! 가이드곡 나왔습니다. 한번 들어 보시겠어요?”
“네, 그럴까요.”
“잠시만요. 처음 들으시는 거니까 제대로 듣는 게 좋겠죠? 제가 헤드셋 가져올 테니까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저렇게 열정적인 최 프로듀서의 모습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그만큼 이번 곡에 대해 자신감이 넘친다는 뜻이 아닐까.
나는 이렇게 해석하기로 했다.
5분 뒤, 최 프로듀서가 자신이 애용하는 고가의 헤드셋을 가져와서 내게 직접 착용시켜 줬다.
“이사님이 저와 다르게 머리가 작으셔서 길이 조절 좀 해야겠네요.”
내 사이즈에 맞게 조절까지 직접 해 주는 친절함을 보였다.
박 PD보다도 더 귀빈 대접을 받는 기분인데.
오늘 무슨 날인가? 흠.
일단은 최 프로듀서가 작업했다는 노래부터 들어 보기로 했다.
헤드셋을 통해서 고음질의 반주가 흘러나왔다.
누차 언급되었듯이 내 솔로곡이나 HTB, 그리고 HTG의 모든 곡에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분위기가 축 처질 만한 노래는 없다는 것이다.
헌터들이 우리의 노래를 듣고 힘이 나게끔 만들어야 하니까. 그래서 주로 댄스곡이 많은 편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대신에 이번 곡은 좀 특이했다.
“이거, 후크송 콘셉트로 작곡하신 건가요?”
“예.”
후렴구에 마법의 주문 같은 단어들이 계속해서 나열되었다.
이게 생각보다 중독성이 굉장하다.
처음 노래를 들은 나조차도 벌써부터 흥얼거릴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가사도 굉장히 간단하게 구성되어 있어서 따라 부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고음 파트도 없다. 메인보컬을 맡고 있는 내 입장에선 라이브를 할 때 편할 거 같다는 느낌이 벌써부터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지막 파트까지 모두 재생이 끝났다.
내가 헤드셋을 벗자, 최 프로듀서가 기대감이 가득 찬 눈빛으로 내게 소감을 물었다.
“어떻습니까, 이사님?”
내가 들려줄 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 곡으로 가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