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라를 구한 톱스타-110화 (110/250)

제28장. 테러리스트 (5)

스태프가 아니라 최기호 감독이 나한테 직접 연락을 줬다는 점에서, 이미 중요한 이야깃거리가 있어서 나한테 전화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면 곤란한데.

한창 연기에 재미를 느끼고 있던 찰나에 갑자기 나보고 하차하라고 하면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잠시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 봤다.

영화 촬영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시기이기도 하고, 촬영했던 것 중에서 아직 내 분량이 엄청 많은 건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배우로 대체한다 해도 큰 타격은 아닐 것이다.

‘일단은 전화부터 받아 볼까.’

통화 버튼을 터치하자, 최기호 감독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태오 씨?

“예, 감독님. 접니다.”

-통화 가능하시죠? 혹시 바쁘시거나 그런 건…….

“아니요. 괜찮습니다. 막 집에 돌아왔거든요.”

-다행이군요. 안 그래도 걱정이 돼서 전화했습니다.

걱정?

하차 대신 다른 단어를 언급하는 최기호 감독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전에서 큰일을 겪지 않으셨습니까. 저희 영화에 출연 중인 소중한 배우님이신데, 혹여나 크게 다치기라도 한 건 아닐까 걱정이 되더라고요.

“그것 때문에 전화 주셨던 건가요?”

-예.

뭐야, 하차 때문에 연락한 게 아니었나.

내 어투에서 이상함을 느낀 모양인지, 최기호 감독이 슬쩍 물었다.

-혹시 제가 다른 것 때문에 전화했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예, 저 하차시키려는 줄 알았어요.”

하차라는 말에 최기호 감독이 크게 웃었다.

-하하! 물론 그런 말이 들어오긴 했는데, 그래 봤자 두 명밖에 안 됩니다. 둘 다 저희 공식 메일로 보내왔는데, 글도 길더라고요. 읽어 보니까 뭐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것도 아니고, 순전히 개인감정에만 의거해서 태오 씨를 하차시켜야 한다고 그러는데. 이 말에 혹할 감독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긴, 최기호 감독은 극소수의 악플러 말들에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릴 만한 사람은 아니다.

최 감독의 필모그래피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영화계에서 20년 넘게 활동하면서 수많은 작품들을 만들어 냈는데, 이상한 말 한두 번 들었다고 멘탈이 나갈 일은 없을 것이다.

-저보다는 태오 씨가 더 걱정돼서 전화했습니다. 연예계에서 일하다 보면, 악플러들이 꼭 몇몇이 꼬이더라고요.

“저도 이런 거 신경 전혀 안 씁니다. 뭐, 헌터로 한창 활동할 때에도 제가 마음에 안 든다고 이상한 말을 인터넷에 막 뿌리고 다니던 악질들이 있었으니까요.”

-그런 사람들은 진짜 양심도 없는 겁니다.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지켜 낸 위인한테 그런 말을 다 하고.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감독님이 사과하실 필요 없죠. 그리고 이미 BOO에서 그 사람들 다 추적해서 정당한 대가를 받도록 법적으로 조치를 취했습니다.”

합의를 원한다고 나를 찾아와서 무릎 꿇고 제발 봐 달라고 울고불고 질질 짰던 사람도 있는데. 응, 안 돼. 합의 절대 안 해 줘. 이렇게 말해 줬다.

내가 법조계에도 아는 사람들이 좀 있어서, 그 사람들한테 형벌 때릴 수 있는 거 최대한 다 붙여 넣어 달라고 특별히 말을 해 뒀더니 정말로 그렇게 되어서 좀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도 똑같이 일을 진행할 생각이다.

“정신 못 차리는 놈들, 제가 참교육 좀 시켜 주려고요.”

-역시. 태오 씨는 대단하시네요. 그럼 저는 걱정은 접어두고 촬영 준비에만 몰두하겠습니다.

“예. 내일 뵙겠습니다, 감독님.”

통화를 끊자마자 괜한 걱정을 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나?”

예전에는 앞으로 생길 일 때문에 막 걱정하고 신경 쓰고, 그런 적은 없었다.

아직 발생하지도 않은 문제 가지고 벌써부터 걱정해 봤자 내 에너지만 낭비하는 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뭐, 사람이라는 건 변할 수밖에 없는 존재니까.”

특수 범죄자에 대한 문제는 대한민국만의 것이 아니었다.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었다.

게이트, 몬스터와의 싸움이 끝났으니까 앞으로는 괜찮겠거니 생각했는데.

‘이젠 사람을 대상으로 싸워야 하나?’

인생이라는 게 참 어렵다.

* * *

대전 행사장에서 벌어졌던 테러 사건 이후, 처음으로 영화 촬영 현장을 찾았다.

스태프들은 변함없이 나를 반겨 줬다.

그러나 평소처럼 아예 똑같은 반응을 보인 건 아니었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죠, 태오 씨?”

“뉴스 화면 보니까 행사장에 불 엄청 나고 그러던데, 정말 괜찮은 거 맞죠?”

여기저기서 나를 걱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태프들의 불안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면서 밝은 톤으로 답했다.

“예, 멀쩡합니다. 촬영하는 데에 지장 없으니까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만약에 부상이 심해서 카메라 앞에 서는 게 도저히 안 될 거 같다 싶었으면, 내가 승훈이 형을 시켜서 먼저 제작진에게 연락을 해 달라고 요청했을 것이다.

보는 스태프마다 난 괜찮다고 하도 말을 하다 보니 입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어째 헌터로만 활동했을 때보다 더 걱정을 많이 받는 느낌인데.’

그래도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

그만큼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굉장히 중요도가 높은 인물이라는 뜻이니까 말이다.

촬영장뿐만 아니라 연예계 전체에서도 딱히 나와 HTB, HTG 멤버들의 활동에 대해서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

어그로 끌기를 좋아하는 몇몇 기자들만 헌터들을 싫어하는 여론이 강하게 형성되고 있다는 말 정도만 짧게 기사로 내보냈을 뿐, 나머지 언론매체들은 이런 소식조차 다루지 않았다.

우리 회사가 특별히 뭔가 조치를 취해서 그런 건 아니고.

다들 이런 시각이 말이 안 되는 억지에서 나오고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소수의 급진적인 성향을 보이는 각성 능력자들이 위험한 건 맞다.

하지만 그들 때문에 나와 HTB, HTG 멤버들의 연예계 퇴출 운동까지 이어진다는 건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가는 일이다.

그리고 연예계에 종사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우리 헌터들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

아니, 연예계 종사자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다.

만약에 내가 헌터 강태오가 아니라 평범한 연예인이었더라면 여기저기서 특종 잡았다고 물고 뜯고 난리였겠지.

하지만 헌터로 활동하면서 이미지와 업적을 잘 쌓은 덕분에 이번에는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다.

그렇다고 안심해선 안 된다.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된다면, 내 입장이 좀 곤란해질 수도 있겠어.’

그래서 나는 협회장에게 특수 범죄자들의 배후를 캐내는 일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다짐했다.

내 안정적인 연예계 활동을 위해서라도 놈들은 사라져 줘야 한다.

잠시 머릿속에 있는 잡생각을 지우고 대본에 집중했다.

메이크업을 마친 수현 씨가 내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태오 씨, 저희, 카메라 돌기 전에 리딩 한번 하고 갈까요?”

“네, 좋죠.”

오늘은 ‘그날, 우리’의 주인공 역할을 맡은 수현 씨와 같이 호흡을 맞추는 날이다.

촬영장에 올 때마다 액션 신은 무조건 소화했었는데.

오늘은 이렇게 가만히 선 채로 긴 대사를 읊고 감정을 담아 연기하고. 이러니까 왠지 낯설기도 했다.

이제 나도 어엿한 배우인데, 이런 걸 어색해한다는 생각이 드니 자조 섞인 웃음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래도 수현 씨가 잘 리드를 해 준 덕분에 이 어색함도 금세 사라졌다.

오히려 수현 씨한테 칭찬을 들었다.

“잘하시는데요? 지난번에 연기하시는 거 봤었는데, 그때보다 훨씬 더 나아지졌네요.”

처음에는 나 기분 좋으라고 하는 립 서비스인 줄 알았는데, 주변 반응을 보니까 수현 씨가 진심으로 말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틈날 때마다 열심히 연습하길 잘했네요.”

그룹 활동을 잠시 쉬어 가기로 한 이후부터는 오롯이 배우 활동에만 전념하기로 해서 연기에만 매진했다.

중간에 대전에서 벌어진 사건 하나가 내 발목을 잠깐 붙잡긴 했지만, 그렇다고 나의 연기 열정까지 잠재우진 못했다.

오늘도 오면서 머릿속으로 자체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면서 대사를 외우고, 어떤 표정을 지으면서 연기를 할지 미리 자체 리허설을 마치고 이곳에 왔다.

이 노력이 통한 건지, 배우들뿐만 아니라 스태프들 역시 리딩인데도 내 연기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최기호 감독이 스태프들에게 촬영 준비를 재촉하면서 말했다.

“태오 씨 감 잡았을 때 후딱 촬영합시다. 다들 빨리빨리 움직여.”

“예, 감독님!”

최기호 감독의 말에 따라 스태프들도, 그리고 우리들도 모든 준비를 마쳤다.

슬레이트 신호와 동시에 내 첫 대사가 촬영의 시작을 알렸다.

“이곳은 위험합니다. 계속 여기에 머무시다간, 언제 몬스터들이 들이닥칠지 모릅니다. 제가 길을 뚫을 테니까, 한 명씩 차례대로 저를 따라오세요. 그쪽에 계신 분, 성함이 홍민수 씨라고 했었죠?”

수현 씨는 어느새 용수현을 지우고 대신 홍민수라는 존재를 자신에게 입힌 채로 대답했다.

“예…… 맞습니다.”

“민수 씨가 맨 뒤에 서서 뒤처지는 부상자들이 있으면 같이 부축하면서 따라와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근처에 떨어진 쇠 파이프를 드는 수현 씨.

그것을 크게 휘두르면서 몬스터가 나올 때를 대비해 몸을 풀었다.

“어떻습니까?”

수현 씨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묻자, 나는 짧게 박수를 치면서 대답했다.

“대단한데요. 그 정도면 몬스터 다섯 마리 정도는 혼자서도 충분히 쓰러뜨리실 수 있겠습니다.”

“아니, 그건 좀…….”

“농담이 너무 지나쳤나요?”

“네.”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잠시 뒤, 최기호 감독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네, 좋습니다. 바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시작부터 NG 없이 바로 오케이를 받아 냈다.

출발이 좋다.

분위기를 타서 이대로 다음 신까지 순탄하게 촬영을 이어 나가고 싶었지만.

낯선 방문자로 인해서 본의 아니게 잠시 최기호 감독에게 타임을 요청해야만 했다.

“이철민 소장님이 여긴 웬일이십니까?”

“태오 씨한테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연구소, 집 아니면 밖에 돌아다니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이철민 소장이 설마 나를 보기 위해 이곳까지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 * *

촬영장 근처에 마련되어 있는 작은 벤치에 이 소장과 나란히 앉았다.

승훈이 형이 가져다준 커피를 한 모금 음미하면서 이 소장에게 물었다.

“저한테 급한 용무라도 있습니까?”

“저번에 제가 다시 전수조사를 해 보겠다고 한 거 있지 않습니까.”

헌터 자격을 갖추지 않은 각성자들 중에서 노래 버프를 줄 수 있는 자들이 있는지, 다시 조사하기로 했었던 이철민 소장.

그 결과가 오늘 나온다고 했었다.

“일단은 보류해야 할 거 같습니다.”

“보류요?”

“예. 각성했음에도 자진해서 신고하지 않은 사람들의 숫자가 꽤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 사람들의 신상까지 다 알아낼 방법이 없어서 일단은 동결하기로 했습니다.”

하긴, 그렇겠지.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어떤 겁니까?”

이철민 소장이 내가 건네준 붉은 보석의 잔해를 꺼내 보여 줬다.

“이거, 주인이 누군지 알아냈습니다.”

이철민 소장이 테러리스트의 정체를 알아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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