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장. 세 번째 도전 (2)
카메라 뒤에 서서 누나가 뉴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봤다.
내가 예전에 솔로로 데뷔할 때에도 이곳에 출연한 적이 있긴 했지만.
‘그때보다도 더 능숙해진 거 같기도 하고.’
물론 당시에도 실수 하나 없이 매끄럽게 메인 앵커 역할을 소화하는 모습을 보여 주곤 했었다.
‘방송이라는 게 경험이 쌓이고 쌓이면 실력이 더 느는 거니까.’
처음에는 이 말이 잘 와닿지 않았는데.
내가 직접 여기저기에 출연하고 나니까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제는 잘 알게 되었다.
레이드 시대가 끝나서일까, 예전 뉴스 프로그램하고 분위기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이전에는 몬스터들이 어딜 침공했고, 어떠한 피해를 일으켰는지에 대한 소식이 항상 주를 이루곤 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보단 경제나 사회, 정치 소식이 뉴스의 메인이 되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는 사이.
화면이 넘어간 사이에 스태프가 나와 준서에게 신호를 보냈다.
“올라가시면 됩니다.”
“네.”
양복을 차려입은 나와 준서가 누나와 대각선으로 바라보는 자리에 앉았다.
나야 이미 한번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별로 긴장되지 않는데.
준서는 누가 봐도 ‘나, 긴장 중’이라는 티가 팍팍 났다.
누나가 이런 준서를 보면서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 우리 남동생이 헌터로 처음 활약했을 때 방송 나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모습 보는 기분이네요. 아직 슛 들어가려면 멀었으니까, 심호흡 크게 해 보세요.”
“아, 알겠습니다!”
당시의 나와 지금의 준서 나이대도 얼추 비슷하고.
그래서인지 누나는 준서를 보면서 옛날의 나를 떠올리는 듯했다.
뉴스 나가기 전에 누나한테 뭐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이것저것 물어보곤 했었는데.
감회가 새롭다.
PD의 신호에 따라 화면이 우리 쪽으로 다시 전환되었다.
누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은 특별한 분들을 모셔 봤습니다. 대한민국을 넘어서 세계적인 돌풍을 이끌어 내고 있는 최초의 헌터 보이 그룹, HTB의 두 멤버분들을 모셔 봤습니다. 각자 자기소개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안녕하세요. HTB에서 리더를 맡고 있는 태오입니다.”
짧은 자기소개를 마치자마자 테이블 아래쪽으로 손을 내려 준서의 허벅지를 쿡 찔렀다.
네 차례라는 뜻을 전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막내 준서입니다! 안녕하세요!”
목소리에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래도 카메라 앞에서 어버버하는 것보단 씩씩한 게 좋겠지.
“첫 데뷔 앨범인데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대중가요계의 기록을 싹 엎어 버리셨는데. 태오 씨, 리더로서 소감이 어떠신가요?”
“팬 여러분들이 보내 주시는 과분한 사랑에 하루하루가 행복할 뿐입니다. 동시에 저희가 과연 이렇게 많은 관심과 애정을 받아도 되는지에 대한 걱정도 들고요. 그만큼 저희가 더 열심히 해야겠죠?”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계시지 않나요. 가수 활동 하나만으로도 많이 힘드실 텐데, 몬스터들 퇴치까지 하고 계시니까요. 저번에 네크로맨서가 살처분된 돼지들을 언데드 몬스터로 만들어서 서울 시내를 급습했을 때에도 HTB 여러분들이 대활약해서 막아 내지 않았나요?”
“네, 그때는 데뷔 전이긴 했지만요.”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멤버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네크로맨서를 상대했던 그 영상은 아직도 계속해서 전 세계에 퍼져 나가고 있었다.
“HTB분들이 대한민국에 계시니까 저 같은 일반 시민들이 편하게 발 뻗고 잘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이 자리를 통해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천만에요. 저희가 해야 할 일인걸요.”
실시간으로 나라를 구하고 있는 보이 그룹, HTB.
아마 이런 그룹은 전무후무할 것이다.
“태오 씨의 경우에는 또 하나 더 좋은 소식이 있더라고요. 얼마 전에 ‘너의 나그네’에 깜짝 등장하셔서 연기 실력을 뽐내셨는데, 이거 덕분에 한동안 떠들썩했더라고요. 노래 실력도 출중하신데, 연기 실력도 상당하다고. 연기는 원래부터 배우셨던 건가요?”
“예전에 잠깐요. 그래서 자신이 많이 없었는데, 좋게 봐주신 분들이 계셔서 다행이라고 생각 중입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여기에 관해서 또 뭔가를 준비하고 계시다던데.”
“네, 다 밝히기에는 아직 정해진 것 하나 없어서 너무 이른 거 같고요. 확정되면, 그때 제가 강아송 앵커님이 진행하시는 프로그램에 나와서 가장 먼저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 말, 정말로 기대해도 될까요?”
“네, 물론이죠.”
우리 누나인데.
내가 그 정도도 못 할까.
누나에게 특종거리를 물어다 주기 위해서라도 이번 주에 있을 최기호 감독과의 미팅에 열과 성을 다해야겠다.
* * *
제작진 몇몇과 함께 우리 HT 회사를 직접 찾아온 최기호 감독.
세계적인 거장과 처음 만나는 자리인 만큼, 우리 쪽도 나름 신경을 많이 썼다.
회의실을 보자마자 최 감독이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회사 내부가 굉장히 깔끔하군요. 여러 곳을 가 봤지만, HT 엔터테인먼트만큼 잘 정리된 곳은 없었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감독님.”
아침부터 열심히 청소를 시킨 보람이 있었다.
사소할지도 모르지만, 이런 거 하나하나가 우리 회사의 이미지를 결정한다.
그래서 누가 온다는 말이 있으면, 이렇게 먼저 정리 정돈부터 진행하곤 한다.
자리에 앉자마자 최기호 감독이 내게 먼저 감사의 말을 전했다.
“우선 저희의 무리한 캐스팅 제의를 받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더 감사하죠. 최기호 감독님의 작품에 출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니까요.”
“하하, 아닙니다. 제가 뭐라고…… 태오 씨가 저보다 더 유명하시지 않습니까. 사실 시놉시스 작업할 때 헌터 캐릭터를 설정해야 하는데, 태오 씨밖에 안 떠오르더라고요. 그때의 기억이 워낙 인상적으로 남아서 그런가 봅니다.”
“그때의 기억이요?”
“아마 태오 씨는 모르실 겁니다. 예전에 제주도 쪽에서 몬스터들이 대규모로 출몰한 적이 있었는데, 그거 먼저 신고했던 쪽이 저희였거든요.”
“제주도라면…….”
과거의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레이드 시대 당시에는 워낙 많은 사건 사고가 있었던 탓에 바로 기억을 떠올리기가 어려웠다.
이때, 승훈이 형이 내게 작게 속삭였다.
“GATE-1029. 서귀포시에서 있었던 대규모 게이트 사건 말씀하시는 거 같은데? 그때 최초 신고자가 영화 관계자였다는 기사가 난 적 있었거든.”
이 말을 듣고 나니까 나도 얼추 기억이 났다.
최기호 감독이 당시의 일을 회상했다.
“그때 저희가 한창 영화 촬영 중이었거든요. 서귀포 쪽 바다 근처에서 수중 촬영을 하던 중이었는데, 바다 밑에서 뭐가 엄청 올라오길래 다들 놀라서 기절할 뻔했죠.”
“그래도 감독님의 신고 덕분에 저희가 조기에 몬스터들을 진압할 수 있었습니다. 그 신고가 아니었으면 서귀포에 더 큰 피해가 발생했었을 거예요.”
멋쩍은 미소를 흘리는 최기호 감독.
그래도 이건 사실이니까.
“저희야 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저 전화 몇 통 했을 뿐인데. 태오 씨하고 다른 헌터분들이 다 하셨죠. 아무튼 그날 저희도 현장에 있었는데, 태오 씨가 몬스터들을 토벌하는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 드라마 출연한 거 보고 어떻게든 태오 씨를 섭외하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나에게 이런 제의를 하게 되었는지, 속사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줬다.
연기 실력도 실력이지만, 과거의 스쳐 지나가다시피 했던 연이 내게 이런 기회를 가져다준 셈이었다.
사실 나는 제주도 서귀포에서 몬스터들을 때려잡던 그 자리에 최기호 감독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당시에 내 눈에는 오로지 몬스터들만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이런 식으로 내게 고마운 마음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나타나면 솔직히 좀 당황스럽긴 하다.
그래도 뭐, 욕하거나 시비 거는 것보다야 나으니까.
말이 길어지긴 했지만, 결국 이러이러해서 나한테 강재오 역할을 맡기고 싶다는 게 결론이다.
“아직 많이 부족한 초보 배우지만, 최대한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대부분 태오 씨 설정을 따온 캐릭터니까, 막 어려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난이도 있는 연기력을 요구하는 장면도 많지 않고요. 대본은 이미 보셨으니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게 어떤 건지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최기호 감독의 말대로였다.
애초에 내가 소화해야 할 대사량도 엄청 많은 편이 아니었다.
헌터로서 몬스터를 퇴치하는 액션 신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최기호 감독도 이제 막 연기자 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첫걸음을 내디딘 나에게 이 역할을 맡기려고 하는 거였다.
“다른 배우들은 캐스팅 진행 중이니까, 정해지는 대로 태오 씨한테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시간은 아마 오래 안 걸릴 겁니다. 이미 어느 정도 협의는 본 상태거든요.”
“그러면 진행은 빨리 되겠네요.”
“네. 그래도 최대한 태오 씨 일정에 방해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이런 건 차차 조율해 나가면 되는 거니까.
최기호 감독이 내게 추가로 물었다.
“대본 보시다가 궁금하신 점 같은 거 있었다면, 지금 저한테 물어보셔도 됩니다.”
안 그래도 가장 궁금한 게 있었다.
“실제 괴물하고 싸우는 건 아니죠?”
당연한 말을 묻는 나를 향해 최기호 감독이 허허 웃었다.
“예, 몬스터들은 전부 CG로 처리할 겁니다.”
“크로마키 스튜디오에서 혼자 싸우는 척 연기해야겠네요.”
내 상상력이 열심히 일해야 할 때가 왔나 보다.
* * *
HTB 그룹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최기호 감독의 영화 ‘그날, 우리’에 대한 소식을 직접 찾아서 봤다.
주연 캐릭터라 할 수 있는 홍민수 역과 윤재영 역에 각각 용수현 배우와 민진연 배우가 캐스팅되었다.
두 사람 다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탑 배우들이다.
하긴, 최기호 감독의 영화니까, 배우들 역시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대본도 좋았고.
내가 용수현, 민진연 배우였어도 하겠다고 나섰을 것이다.
기사들을 찾아보는 동안, 준서가 어깨 너머로 내 스마트폰을 몰래 훔쳐봤다.
“형은 좋겠네요.”
“뭐가?”
“연기자로 정식 데뷔하시는 거잖아요. 나도 연기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은데.”
“그쪽으로 욕심 있었어?”
“처음부터 있던 건 아니지만요. 그냥 방송 활동 하다 보니까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그렇게 되더라고요.”
욕심이 많은 녀석이구만.
뭐, 의욕이 넘친다는 건 좋은 현상이니까.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 앉아 있던 딜런이 우리 둘의 대화에 관심을 보였다.
“그럼 준서 너, 연기 한번 짤막하게 해 봐. 나하고 태오 형이 평가해 줄 테니까.”
“지금 여기서요?”
“어. 괜찮죠, 태오 형?”
이제는 나를 형이라고 부르는 게 자연스러워진 딜런.
마침 다음 스케줄 장소까지 가는 데 시간이 꽤 걸리기도 하고.
심심풀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럼 해 볼게요.”
내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도전은 해 보는구나.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은 준서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사를 아무거나 읊었다.
“네가 한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어. 오로지 네 생각뿐이었다고.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는 거야!”
어디서 들어 봤다 싶더니만.
드라마 ‘너의 나그네’에 나오는 대사 일부를 발췌한 거였다.
준서가 기대감이 잔뜩 담긴 눈빛으로 나와 딜런을 바라봤다.
“어때요, 형들?”
우리 둘의 대답은 공교롭게도 일치했다.
“넌 당분간 연기는 도전하지 마라.”
“그냥 지금 일에만 충실해.”
너무 냉정하게 말해 줘서 그럴까.
이동하는 내내 준서의 불평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