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장. 세 번째 도전 (1)
카메오로 출연한 내 모습에 열광한 건 대중만이 아니었다.
영화 관계자들 역시 내 연기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날 내가 ‘너의 나그네’에 잠깐 출연했던 부분의 순간 시청률이 드라마 자체 신기록을 갱신했다고 듣긴 했는데.
설마 이런 기회가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어디서 그런 제안이 들어온 거야?”
출처가 궁금했다.
승훈이 형이 귀에 익은 어느 감독의 이름을 거론했다.
“최기호 감독. 누군지 알지?”
“우리나라에서 최기호 감독님 모르는 사람이 있나?”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대한민국 영화계의 거장이다.
최 감독의 영화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당시의 시대상을 관통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나까지 캐스팅하고 싶다는 건 혹시…….
“영화 소재가 헌터야?”
레이드 시대가 오랫동안 지속되다 보니까 헌터를 소재로 삼은 영화나 드라마, 웹툰, 웹소설이 꽤 유행했었다.
승훈이 형이 고개를 끄덕여 주면서 내 예상이 맞았음을 알려 줬다.
“어, 근데 주인공은 헌터가 아니야.”
“그러면?”
“일반인들. 레이드 시대를 철저하게 일반인의 시점에서 재해석하고 싶어서 이번 영화를 기획하셨대.”
레이드 시대에서 헌터란 존재는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최기호 감독은 헌터가 아닌 일반인을 주인공으로 삼으면서 ‘당하고, 도망쳐야만 하는 입장’으로서의 관점을 영화로 표현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새로운 도전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무슨 역할로 캐스팅된 건데?”
“헌터. 역할도 그대로야, 강태오.”
“내가 나를 연기하는 셈이네.”
“그런 셈이지. 근데 아무래도 영화니까 완전히 네 이름을 사용하진 않을 거고, 실제 너를 모티브로 삼은 캐릭터를 가공해서 만들 거래. 그래도 너하고 겹치는 설정들이 많으니까, 아마 연기하기에도 쉬울 거야.”
아직 연기 초보인 나로서는 당연히 환영할 만한 배역이다.
승훈이 형이 방금 말했던 것처럼 역할이 역할인 만큼 나에게도 부담이 훨씬 덜하고.
게다가 최기호 감독님의 작품에 출연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흔치 않다.
어찌 보면 영광스러운 자리라고도 볼 수 있다.
“어때, 이번 기회에 연기 쪽도 한번 도전해 볼래?”
승훈이 형은 드라마에서 보여 준 내 연기 실력에 꽤나 큰 인상을 받았나 보다.
이런 말까지 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원래 나는 연기 쪽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너의 나그네’에서 배우와 호흡을 맞추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나의 좋은 장면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점에서 뭐랄까…….
굉장히 큰 매력을 느꼈다.
그리고 레이드 시대가 끝나면, 그동안 못 해 봤던 것들뿐만 아니라 새로운 도전들도 마구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연기는 내게 있어서 최근에 후자로 포함된 항목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면 안 된다.
다른 배우들이 그러는 것처럼.
“일단 대본 보고 생각해 보겠다고 전해 줘.”
“그래, 알았어.”
이렇게 말하니까 벌써부터 전문 배우가 된 기분이 들었다.
* * *
최기호 감독이 기획하고 있는 영화, ‘그날, 우리’의 대본을 처음 받은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대본을 살피는 데에 몰두했다.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하면서 순식간에 대본 전체를 독파한 나는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여러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예상대로.
“역시 최기호 감독님이시네. 대본만 봐도 이 영화의 퀄리티가 얼마나 높은지 알 정도야.”
“그래? 나도 한번 볼까?”
승훈이 형도 궁금했던 모양인지 내가 건네준 대본을 빠르게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 이건 신선하네. 일반인의 시점에서 헌터와 괴물이 싸우는 현장에 휘말려서 도망치는 장면도 긴장감 있고. 액션물이라기보다는 재난 영화 콘셉트라고 봐도 되겠구만.”
“게이트 사건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재난이었으니까.”
이것을 재난으로 해석한 최기호 감독의 남다른 시선에 존경 어린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그러면 태오, 네가 연기할 캐릭터가 이 ‘강재오’라는 인물이지?”
“그렇지 않을까?”
강재오는 작중에서 나를 대신해 유일한 SSS랭크이면서 헌터 랭킹 1위를 달리고 있는 실력자로 설정되어 있다.
딱 나와 같다.
“강재오, 강태오. 이름 많이 헷갈리겠다, 야.”
“뭐, 영화 찍다 보면 적응되겠지. 그나저나 비중이 꽤 높던데? 이 정도면 조연급 중에서도 출연 빈도 상위권 아니야?”
“기왕 출연하는 거, 얼굴 많이 비칠 수 있으면 좋은 거지.”
하긴, 이번에는 승훈이 형의 말이 맞다.
어렵게 시간 쪼개서 하는 촬영인데, 아주 깔짝 나오고 끝나면 폼이 안 난다.
“다른 배우들은 캐스팅 다 정해졌대?”
“아직. 지금 조율 중이라고 그러더라. 근데 괜찮겠어? 지금 너, HTB 활동에다가 헌터 업무도 있고. 회사 일에 나중에 솔로 앨범도 계속 내기로 했잖아. 그런데 여기에 영화 촬영까지 겹치면, 이거 다 소화 못 하는 거 아니야?”
나도 그걸 생각 안 해 본 게 아니었다.
“우리 그룹 활동이야 어차피 다음 달까지만 하다가 2집 앨범 준비 들어갈 테고. 회사 일은 난 결정만 하면 되는 역할이니까. 그리고 헌터 업무는 형도 잘 알잖아? 요즘 몬스터들 많이 안 나오는 거.”
네크로맨서의 경우가 굉장히 예외적이었을 뿐이지, 드래곤이 사라지고 게이트가 존재를 감춘 이후부터는 딱히 위기로 볼 만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몬스터들의 등장 빈도도 매우 낮아졌고.
설령 몬스터들이 단체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우리 회사에서 제공하는 헌터들을 위한 노래만 있다면, 각 지역에서 나뉘어 활동 중인 헌터들만으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더.
“어차피 크랭크인 바로 안 들어갈 거잖아. 그렇지?”
“뭐, 아직 주연 배우들 캐스팅도 안 끝났다고 하니까. 제작 발표회는 할지 말지 모르겠고. 네 말대로 한참 남긴 했지.”
“그러면 얼추 시기들이 맞아떨어질 거야.”
겉으로 봤을 때에는 내가 무책임하게 그냥 연기 해 보겠다고 말한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머릿속으로 이런 것들을 다 계산하고 난 뒤에 맡겠다고 한 거다.
승훈이 형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가 건넨 대본을 챙겼다.
“알았다. 그러면 그쪽에다가 연락해 둘게.”
“잘 부탁해, 형.”
“오냐.”
설마 내가 최기호 감독의 영화에 캐스팅되는 날이 올 줄이야.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생긴다.
* * *
HTB 그룹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나와 준서, 이렇게 둘만 따로 방송국을 찾았다.
데이브와 니암, 딜런은 비슷한 시간대에 다른 곳에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렵게 곡도 냈으니까.
여러 방송에 동시다발적으로 출연하면서 최대한 앨범 홍보에 나서야 하지 않겠나.
그래도 멤버들이 방송이라는 걸 재미있어해서 그런지,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피곤한 기색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반응들뿐이었다.
덕분에 추가 일정들을 계속 잡느라 매니저들하고 회사만 바빠졌다.
다들 ‘관종기’가 있어서 다행이다.
어느 정도 방송 욕심을 가지고 있어야 이 일도 오래할 수 있는 거니까 말이다.
방송 욕심은 우리만 많은 게 아니었다.
지금 나와 준서가 승훈이 형과 함께 향하고 있는 방송국의 프로그램 진행자 역시 우리들 못지않게 방송 욕심…… 아니, 일 욕심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다.
BLT 9시 뉴스 프로그램 특별 스튜디오로 향한 우리들.
준서가 바짝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저, 뉴스에는 처음 출연해 봐요.”
“별거 없어. 요즘은 예전처럼 막 나와서 격식 차리고, 이런 것도 없어지는 분위기니까. 나도 저번에 솔로 데뷔했을 때 여기 프로그램에 나와서 그냥 토크 예능 녹화하는 것처럼 편하게 말하다가 갔어.”
“그, 그래요?”
“어. 그리고 진행자가 우리 누나니까, 너하고 나 곤란하게 만들 깜짝 질문은 안 할 거야.”
저번에 모 뉴스 프로그램처럼 말이다.
뉴스 촬영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스태프들이 정신없이 움직이는 모습이 들어왔다.
이들 사이에서 가지런히 정장을 차려입은 누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누나!”
내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자, 누나가 반갑게 미소를 보냈다.
나와 짧게 인사를 나눈 누나가 준서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태오 누나인 강아송이라고 해요.”
“최준서입니다! 태오 형하고는 분위기가 엄청 다르시네요.”
“어머, 그래요?”
“네. 누님…… 아, 이렇게 불러도 되나 모르겠네요. 아무튼 야무지시고, 엄청 꼼꼼하신 그런 성격처럼 보이십니다. 게다가 굉장히 미인이시고요.”
“고마워요.”
아니, 그러면 나는 야무지지 않고, 꼼꼼하지도 않다는 뜻인가?
이 꼬맹이 녀석에게 어떤 꿀밤을 먹여 줄까 고민하는 사이, 누나가 우리 외의 다른 일행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승훈 씨.”
“아, 안녕하세요!”
승훈이 형이 우리 누나를 보자마자 바짝 긴장한 얼굴로 답했다.
“아, 아송 씨, 오랜만입니다. 요즘 많이 바쁘시죠?”
“바쁜 게 좋은 거니까요. 일 안 하고 집에서 쉬고 있으면, 오히려 좀이 쑤셔서 제가 못 버티더라고요.”
“태오도 아송 씨의 이런 부지런함을 본받았으면 좋겠는데.”
여기서 나를 공격한다고?
예상치 못한 기습에 바로 반론을 가했다.
“형이 얼마 전에 나 일 많이 한다고 걱정해 줬던 거 기억 안 나? 내가 얼마나 부지런한데.”
“일 많이 하는 거하고 부지런한 건 다르지. 뭐랄까, 아송 씨처럼 매사에 일찌감치 모든 준비를 끝내고 임하는 태도 같은 거. 성실함이라고 해야 하나. 반대로 너는 맨날 내가 아침에 깨우러 가잖아.”
“이 형이 오늘따라 왜 이래? 자꾸 이렇게 나오면 형하고 누나 안 이어 준다?”
“뭐, 뭐라는 거야!”
승훈이 형이 황급하게 내 입을 틀어막았다.
나름 오랫동안 승훈이 형을 봐 왔던 나지만, 방금처럼 이렇게 빨리 움직인 건 처음 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누나는 내가 하는 말을 미처 못 들은 모양인 듯했다.
근처에 있던 스태프가 누나를 찾았다.
“아송 씨, 광고 곧 끝난다니까 스튜디오에서 준비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조금 있다가 봐.”
누나가 내게 짧게 손을 흔들어 준 뒤에 빠른 속도로 자리를 이탈했다.
그제야 내 입을 막고 있던 승훈이 형의 손이 떨어졌다.
“쓸데없는 말을 왜 해!”
“그러니까 형이 먼저 나한테 선전포고를 하지 말았어야지. 그리고 말이야, 언제까지 우리 누나한테 말 한마디 못 붙이고 그렇게 바짝 긴장만 하고 있을 거야. 그러다가 누나한테 다른 남자 생기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 그건…….”
“용기 좀 내라고, 형. 나하고 같이 작전 수행할 때에는 엄청 적극적으로 달려들더니만, 이럴 때는 꼭 소극적이네.”
“…….”
승훈이 형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때.
우리들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준서가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물었다.
“승훈이 형, 태오 형 누님 좋아하세요?”
이 말을 듣자마자 승훈이 형의 표정은 이러했다.
걸리지 말아야 할 녀석에게 걸려 버리고 말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