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 카메오 (2)
오늘은 HTB 가요 프로그램 무대가 있는 날이다.
가요 무대에 서는 날만 되면 그 어느 때보다도 바빠진다.
다른 가수들의 무대도 같이 올라가다 보니까 대기하는 시간도 길고.
거의 하루 종일 일정을 빼놔야 한다.
체력적으로 상당히 고되지만, 우리가 누군가. 헌터 아닌가.
일반인들에 비해 체력이 뛰어난 편이어서 그렇게까지 피곤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단지.
“지루하군.”
데이브가 딱 내가 하려고 했던 말을 정확하게 캐치해 냈다.
요즘 데이브하고 자주 생각이 겹치는데.
그룹을 결성하고 난 이후부터 부쩍 녀석하고 손발이 잘 맞는 기분이 든다.
데이브가 나를 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뭐냐, 왜 그렇게 기분 나쁜 표정으로 쳐다봐.”
“기분 나쁘다니.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도 몰라? 나, 지금 웃고 있잖아.”
“그러니까 기분 나쁘다고 한 거라고.”
짜식, 마음대로 웃지도 못하게 만드네.
아무튼 지루한 대기 시간이 계속 이어졌다.
리허설 무대도 마쳤고.
무대 의상으로 갈아입은 상태로 다른 가수들의 공연이 끝날 때까지 우리들은 대기실에서 무한 대기를 해야 했다.
이럴 때에는 가장 마지막 순번으로 배치받은 게 치명적이다.
물론 우리만큼 화제성이 높은 그룹이 없어서 자연스럽게 HTB가 맨 마지막으로 가게 되었다는 건 좋은 일이고, 그건 나도 잘 알지만.
그래도 지루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까 고민하던 찰나.
마침 좋은 생각이 들었다.
“나예야.”
“네, 오빠.”
우리 두 번째 매니저를 찾았다.
“이 오빠 스마트폰, 어디다 뒀어?”
“여기요.”
“땡큐.”
나예한테서 스마트폰을 받아 든 나는 이어폰을 꺼내서 귀에 꽂았다.
준서가 이런 나에게 관심을 보였다.
“형, 무슨 노래 들으시려고요?”
“너도 들어 볼래?”
“네!”
호기심이 왕성한 준서답게 바로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블루투스 이어폰 한 짝을 준서에게 건네주고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했다.
흘러나오는 낯선 노래에 준서가 머리 위로 의문부호를 띄웠다.
“이거, 무슨 노래예요? 들어 본 적 없는 곡인데?”
“한번 맞혀 봐.”
“맞히면 상 줄 거예요?”
“그래, 줄게.”
맞힐 리 없겠지만 말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준서가 이내 GG를 쳤다.
“아, 모르겠어요. 알려 줘요, 형.”
“이번에 나 OST곡 새로 맡기로 한 거다.”
“아니, 그러면 처음부터 제가 무조건 지는 거였잖아요.”
“먼저 하겠다고 한 쪽은 내가 아니라 너야.”
“쳇…….”
할 말이 없는지, 준서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노래는 좋은 모양인지, 토라진 표정을 풀고 다시 말을 이었다.
“이거, 어느 드라마라고 했죠?”
“‘너의 나그네’일걸.”
“저번에 저하고 딜런 형하고 태오 형하고 셋이서 봤던 그 영화감독님 신작이죠?”
“잘 아네?”
“저도 그 감독님 작품 좋아하거든요. 부럽네요, 형.”
자기가 좋아하는 감독이 만든 작품에 OST곡 보컬로 참여할 수 있다는 건 큰 기쁨일 것이다.
나도 그걸 잘 알기에 준서가 느끼고 있을 부러움이 얼마나 큰지 대충 짐작이 간다.
“내가 곡 양보해 줄까?”
“괜찮아요. 형한테 들어온 의뢰인데, 중간에서 제가 가로채면 안 되잖아요.”
맞는 말이다.
물론 나도 정말로 양보를 해 줄 생각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그냥 해 본 말이다.
대신에 나중에 기회가 있다면, 마석인 PD에게 우리 HTB 멤버 중에 감독님 광팬이 있다고 슬쩍 귀띔이라도 해 줘야겠다.
그렇게 노래를 들으면서 연습을 하는 동안, 스태프가 우리를 찾았다.
“HTB 차례, 곧 올 거 같다고 준비해 달랍니다!”
“예, 알겠습니다.”
지루함의 시간이 마침내 끝났다.
이제 무대에서 신나게 즐기고 오기만 하면 된다.
* * *
우리 HTB의 첫 번째 앨범 타이틀곡, ‘지지 않는 태양’이 이번 프로그램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우리를 응원하기 위해 현장을 찾은 팬들이 응원 도구를 흔들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뜨거운 함성 소리에 맞춰서 우리들 역시 점점 분위기를 고조시켜 갔다.
무대가 잘 풀려서 그런지 고음도 깔끔하게 올라가고.
‘오늘 컨디션 좋네.’
리허설 때도 느꼈던 거지만, 이렇게 직접 무대를 가져 보니까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 오늘 좀 되는 날이라고.
열정적으로 꾸몄던 무대를 마치고.
대망의 1위 발표만 남았다.
“이번 주 영예의 1위! 과연 어느 팀이 차지했을까요?”
“화면으로 만나 보시겠습니다!”
“보여 주세요!”
우리 HTB와 커스티가 1위 자리를 두고 맞붙게 되었다.
오늘 가요 프로그램에 참석한 가수들 중에서 가장 오래 활동한 팀과 가장 최근에 데뷔한 팀이 맞붙었다.
결과는 예상대로.
“HTB! 축하드립니다!”
우리들이 무난하게 1위를 차지했다.
커스티 멤버들도 우리가 1위가 될 거라는 사실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는지, 아쉬움 없는 표정으로 축하까지 해 줬다.
MC가 우리들을 가운데에 위치시킨 상태로 마이크를 건넸다.
1위 수상 소감을 묻기에 내가 리더로서 대표로 마이크를 쥐기로 했다.
“저희 HTB를 응원해 주신 모든 팬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좋은 곡들 발표하면서 인류 수호에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노래로 버프를 줄 수 있는 우리들이기에 이런 거창한 수상 소감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1위에게 주어지는 건 꽃다발과 트로피만이 아니다.
앙코르 무대.
우리 다섯은 차례로 파트를 번갈아 가면서 프로그램의 마지막을 알리는 무대를 펼쳤다.
모든 방송이 끝나고.
무대 아래로 내려오자, 스태프들과 여러 가수들이 우리에게 다시 한번 축하한다는 말을 들려줬다.
커스티 멤버이자 동시에 나와 같이 ‘던전 탐험대’ 출연자로 활약했던 윤선규 씨도 내게 아낌없는 축하의 말을 건넸다.
“1위 축하드려요, 태오 씨.”
“감사합니다. ‘던전 탐험대’ 녹화 들어가기 전에 제가 크게 한턱 쏴야겠네요.”
“정말이죠? 저,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던전 탐험대’ 촬영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은 상태다.
그 전까지는 여유가 있으니까, 출연자들끼리 따로 시간을 맞춰 보든가 해야겠다.
‘그러고 보니 나빈이하고 아이리스 못 만난 지도 꽤 됐네.’
우리 귀여운 후배들도 요즘 바쁘게 활동하느라 정신이 없겠지.
서로 이렇게 일로 바쁜 게 좋은 거다.
몬스터 때문에 피 칠갑 신세가 되는 것보단 분명 나을 테니까.
승훈이 형과 매니저들이 양손 가득 짐을 챙기고 우리들에게 다가왔다.
“고생했다! 들어가기 전에 회식이라도 하고 갈까?”
“좋죠!”
내일이 바로 ‘너의 나그네’ OST 녹음이 있는 날이니까.
그 전에 목에 기름칠 좀 잔뜩 하고 가야겠다.
* * *
부스 안에서 헤드셋을 끼고 노래하는 게 이제는 많이 익숙해졌다.
설령 지금 있는 장소가 우리 회사 녹음실이 아닌 다른 녹음실이라 해도 낯설다는 느낌은 거의 들지 않았다.
음악감독이 부스 밖에서 내게 물었다.
-연습 한번 하고 갈까요? 아니면 바로 시작할까요?
“바로 시작하죠.”
의외로 첫 시도가 베스트인 경우가 종종 있다.
나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가끔씩 이럴 때가 있다 보니 연습 없이 바로 가고 싶었다.
전주가 흘러나오고.
천천히 호흡을 들이마시면서 도입부 가사를 읊었다.
불어오는 바람에서
당신이 다녀갔음을 느껴요.
이 초록 물결 속에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흔적을 찾아요.
잔잔한 멜로디에 어울리게.
최대한 담담하게 가사를 읊었다.
이때, 음악감독 대신 마 PD가 의견을 보탰다.
-방금보다는 약간 더 서정적으로. 노래를 부른다는 느낌이 아니라 한 편의 시를 읊는다는 느낌으로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알겠습니다.”
역시 우리 감수성 풍부한 PD님답다.
정확한 비유 덕분에 나는 PD가 요구한 것을 바로 노래에 적용시킬 수 있었다.
아까보다 확실히 내 목소리 톤이 더 얌전해졌다.
이번에는 과연 어떨까?
음악감독이 마 PD와 여러 차례 논의하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뒤.
-네, 다음 파트로 넘어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 한 번의 경험으로 인해 나는 마 PD가 추구하는 게 뭔지, 내게 바라는 게 뭔지를 확실하게 알아낼 수 있었다.
이것 덕분인지, 이다음부터 이어지는 녹음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이어질 수 있었다.
생각보다 빠른 시간 내에 모든 녹음을 마친 나는 부스로 나와 물을 마시면서 마른 목을 축였다.
쉬는 동안, 음악감독이 내게 ‘쌍따봉’을 날렸다.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태오 씨. 정말 고생하셨어요.”
“만족하실 만한 결과물이 나왔나요?”
“네! 나중에 믹싱 끝나면, 제가 한번 들려드리겠습니다. PD님도 만족하시죠?”
마 PD는 말해 무엇하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연달아 끄덕였다.
“아, 그렇지. 태오 씨, 저희, 촬영 들어가는데 괜찮으시다면 구경이라도 와 보실래요?”
“제가요?”
“네, 태오 씨도 엄연한 저희 드라마 출연자가 되었으니까요. 어떤 드라마인지 많이 궁금해하시는 거 같으니까 현장에 직접 와 보셔서 확인하셔도 됩니다.”
“음, 그럴까요?”
문득 어느 한 인물이 뇌리를 스쳤다.
“PD님, 혹시 괜찮으시다면, 한 명 더 데려가도 될까요?”
“네, 언제든지요.”
“마 PD님 열혈 팬이 한 명 있거든요. 데려가면 엄청 좋아할 거 같아서요”
“제 팬이요……?”
마 PD가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보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본의 아니게 서프라이즈를 기획하게 되었다.
* * *
오랜만에 찾아온 달콤한 휴일.
이날, 나와 준서는 내 차를 타고 ‘너의 나그네’ 드라마 촬영 현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옆에 앉은 준서는 출발할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하이 텐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진짜로 우리, 마 PD님 드라마 촬영장 가는 거 맞죠? 네?”
“그러면 가짜겠냐.”
내가 이 순진무구한 녀석을 속여서 무슨 득을 본다고.
야외 촬영장이었기 때문에 서울 도심이 아닌 지방 쪽으로 내려가야 했다.
드라이브 간다는 느낌으로 차를 끌고 1시간가량을 달려 도착한 어느 넓은 공터.
차에서 내리자마자 나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우리나라에 이런 곳이 다 있었네.”
마 PD님이 아주 기가 막힌 장소를 찾아냈다.
여러 개의 초록 언덕이 그림 같은 장면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양 손가락을 이용해 직사각형을 만들었다.
“그림 좋네.”
“여기도 마 PD님만의 비밀 장소가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고. 어디 보자, 저쪽이 촬영 현장인가 보네.”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는 걸로 봐선, 틀림없다.
“가자, 준서야.”
“네!”
우리 막내가 기운차게 답하더니 내 뒤를 얌전히 따랐다.
이렇게 설레는 모습을 보니까 데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가서 PD한테 인사하고, 그다음 촬영에 방해가 안 되게 멀찍이 떨어져서 현장을 구경할 생각이었다.
먼저 마 PD부터 찾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현장이 소란스러워졌다.
“형, 분위기가 요상한데요?”
“그러게. 왜 저러지?”
우리의 궁금증은 이내 어느 한 스태프의 외침으로 단번에 해결되었다.
“뭐? 오늘 출연하기로 했던 배우가 연락이 안 된다고?”
하필이면 우리가 왔을 때 대형 사고가 벌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