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 카메오 (1)
박 PD와 짧게 악수를 나누고서 나는 다음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승훈이 형을 찾았다.
“여보세요. 형, 어디야?”
-나? 잠깐만…… 아, 네. 그럼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마침 태오하고 같이 왔으니까, 일정 끝나면 말 전할게요. 감사합니다.
스마트폰 너머에서 들리는 승훈이 형과 낯선 이의 대화하는 소리.
누구랑 이야기하길래 저렇게 공손하게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잠시 뒤.
-미안하다, 태오야. 잠깐 업무 이야기 하느라고.
“나하고 관련된 거야?”
-어. 지금 나, 로비에 있는데, 어떻게 할래? 내가 그쪽으로 갈까?
“아니야. 어차피 차 타고 이동해야 하잖아? 내가 내려갈게.”
-오냐.
2층이라서 굳이 엘리베이터의 도움 없이 바로 계단을 통해 내려가기로 했다.
여러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방송국 로비 근처에서 승훈이 형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서 있었다.
“형.”
“어, 이야기 잘 마무리하고 왔어? ‘던전 탐험대’, 어떻게 하기로 했어?”
“출연한다고 하고 마무리 지었어.”
“괜찮겠어? 2박 3일이나 시간 비워야 하는데.”
“당일치기로 조정했대. 스태프들도 굳이 기간 길게 잡아서 갔다 올 필요가 있냐고 그랬더라고.”
“하긴, 안전상으로도 던전에 오래 남아 있으면 안 되니까.”
그리고 당일치기로 금방 왔다 갔다 하면, 촬영도 어렵지 않다.
대신에 한정된 시간에 어떻게든 방송에 내보낼 분량을 뽑아내야 한다는 스트레스에 시달리겠지만 말이다.
뭐, 던전 내부를 촬영한다는 발상만으로도 이런 스트레스는 덜할 것이다.
아직 던전은 민간인들에게 있어서 미지의 영역이니까.
‘던전 탐험대’ 2화만 봐도 알 수 있다.
2화는 1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시청자들의 뇌리에 각인될 만큼 인상적인 컷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은 1화보다 더 잘 나왔다.
1화에서 느꼈던 기대감이 2화에 그대로 반영되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확실한 건 사람들은 여전히 던전이라는 존재를 영상으로나마 자세히 보고 싶어 한다는 거였다.
2화 평도 나쁘지 않았고.
만약에 3화까지 방영되었다면, 앞선 화들보다 시청률이 더 잘 나왔을 것이다.
단지 네크로맨서가 다 된 밥에 재를 아주 팍팍 뿌려서 그렇지.
프로그램 자체는 문제없었다.
“나중에 우리 멤버들 몇 명 게스트로 데려가려고.”
“게스트 말고 고정은 어떠냐?”
“그것도 나쁘지 않긴 한데, 나빈이하고 아이리스가 있는데, 굳이 헌터가 또 필요할까?”
“뭐,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아무튼 이건 나중으로 미루고.”
승훈이 형이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처럼 화두를 다른 방향으로 전환했다.
“아까 너한테 재미있는 제안이 하나 들어왔어.”
승훈이 형하고 통화할 때 들었던 그 대화와 연관이 있는 내용이었다.
“이번에 드라마 하나 제작하는데, 너한테 OST를 맡기고 싶다고 하더라.”
OST라. 신선한데?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어졌다.
* * *
얼마 전에 제작 발표회를 가졌던 케이블 드라마가 하나 있었다.
제목은 ‘너의 나그네’로, 지난번에 내가 준서, 딜런과 같이 새벽에 봤던 영화의 감독을 맡은 사람이 제작한 드라마라고 한다.
감성적인 컷 연출이 굉장히 인상적이어서 그런 걸까.
나는 같은 감독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생각할 것도 없이 OST 의뢰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드라마 제작팀 음악감독과 마석인 PD, 이렇게 둘과 만남을 가졌다.
OST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하고.
그리고 마 PD에게 꼭 하고 싶은 말도 있었다.
“영화, 잘 봤습니다.”
“영화라면…….”
“이빈이가 주연으로 나왔던 로맨스 영화요. ‘우리가 떨어져 있어도’, 마 PD님 작품이시죠?”
“아, 네. 맞습니다. 보셨군요.”
마 PD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초면에 내가 마 PD의 작품에 대해서 칭찬하자, 부끄러워하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옆에 음악감독이 키득키득 웃으면서 내가 몰랐던 마 PD의 정보 하나를 흘렸다.
“우리 PD님, 쑥스러움이 좀 많아서요. 성격도 내성적이십니다.”
“그러셨군요. 전혀 그렇게 안 보이시는데.”
“저번에 제작 발표회 무대 오르기 싫다는 걸 저희가 억지로 어르고 달래서 올려보냈다니까요? 아니, PD가 나가서 드라마에 대해 설명을 해 줘야 기자들이 이러이러한 드라마가 나온다고 시청자들한테 기사로 알려 주든가 할 거 아닙니까. 그걸 안 하겠다고 하니까, 저희 입장에선 엄청 답답했죠.”
마 PD가 금세 쭈글이 모드가 되었다.
“나 말고도 다른 사람이 올라가도 될 일이었는데…….”
“PD님 말고 누가 올라가요. 그렇다고 배우들한테 하라고 할 수도 없잖아요. 시놉시스나 디테일한 설정, 촬영 일자 등등. 전부 PD님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는데.”
“…….”
음악감독의 잔소리가 이어질수록 마 PD의 큰 덩치는 점점 쪼그라들었다.
이렇게 보니까 참 귀여운 사람이다.
감수성이 꽤 있어 보이는데, 그래서인지 성격도 굉장히 유하게 보였다.
승훈이 형이 ‘어흠!’ 하면서 음악감독의 잔소리를 멈추게 만들 목적으로 일부러 크게 헛기침 소리를 냈다.
그제야 마 PD를 향해 쏟아지던 음악감독의 잔소리가 멈췄다.
마석인 PD가 승훈이 형을 향해 살려 줘서 고맙다는 눈빛을 보냈다.
아무튼 마 PD의 성격이 이렇다는 건 아주 잘 알았고.
“제가 부를 OST곡은 이미 나와 있나요?”
“예. 가이드곡 한번 들어 보실래요?”
“여기서 바로요?”
“이야기가 빨리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좋으니까요. 사실 저희가 제작 기간이 많이 촉박하거든요. 그렇죠, PD님?”
마 PD가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였다.
“이런 이유로 가급적이면 모든 작업들을 다 빨리빨리 진행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태오 씨가 저희한테 OST곡 부르겠다고 일찍 연락 주셨을 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라요.”
의도치 않게 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게 되었다.
뭐, 다행이라니까, 나도 좋긴 하다.
“잠시만요. 기왕 들어 보실 거, 제대로 들으셔야죠. 헤드셋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딱 봐도 고가의 헤드셋임을 알 수 있었다.
노래를 재생하기 직전, 승훈이 형이 슬쩍 떠보듯 물었다.
“제 건 없습니까?”
“매니저님도 들어 보시려고요?”
“예. 궁금해서요.”
“이어폰으로 들으셔야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네, 상관없습니다.”
음악감독이 승훈이 형에게 블루투스 이어폰 한 짝을 건네줬다.
그사이, 나는 헤드셋을 통해 흘러나오는 노래에 집중했다.
어쿠스틱 기타가 가장 먼저 내 귀를 사로잡았다.
‘곡 분위기는 경쾌하고 좋네.’
마치 여행지에 가서 기타 하나 들고 신이 난 채로 노래를 부르는 듯한 그런 기분 좋음과 자유가 연상되었다.
가이드곡이라 그런지 아직 완성도는 많이 떨어져 보였다.
그러나 어떤 곡인지 파악하기에는 충분했다.
노래를 모두 다 듣고 난 뒤.
헤드셋을 벗는 내게 음악감독이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어떻습니까?”
“노래 좋네요.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요.”
“예, 말씀해 보세요.”
“왜 하필 저한테 이 곡을 맡기려고 하시는 건가요?”
노래를 듣는 도중에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장르의 노래를 주로 다루는 가수들은 많다.
그런데 그 많은 가수들을 제치고 왜 내게 이 곡을 불러 달라고 요청했는지.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그것이 궁금했다.
음악감독이 마 PD 쪽으로 눈을 돌렸다.
“PD님이 직접 말씀하실래요?”
“내, 내가?”
“또 부끄러워하신다. 그럼 제가 말합니다?”
“아, 아니, 내가 말할게.”
나는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물어본 것뿐인데.
당사자들은 상당히 심각한 반응을 보이니까 갑자기 나까지 마른침을 삼켰다.
뭐지? 외부에 퍼지면 안 되는 비밀이라도 숨겨져 있나?
궁금증이 한창 치솟을 때.
마 PD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제가…… 태오 씨 팬이라서요.”
뭐야, 별거 아니었잖아.
“저는 무슨 대단한 사정이 숨겨져 있는 줄 알았네요.”
“저한테는 굉장히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예전에 드라마 PD로서, 영화감독으로서 마음이 크게 꺾인 적이 있었거든요.”
마 PD가 옛날 일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나는 재능이 없는 걸까. 그냥 이 길을 포기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한창 이런 슬럼프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태오 씨의 노래를 들었죠. 뭐랄까요…… 노래를 듣자마자 의욕이 활활 타오르더라고요. 이대로 주저앉지 마! 포기하면 안 돼! 계속 앞으로 나아가! 이 노래 가사들이 마치 저를 위한 것들로 들렸습니다.”
원래부터 헌터들의 전투력과 사기를 고양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가사를 짰으니까.
듣기만 해도 파이팅 넘치는 노래인 건 맞다.
“그 덕분에 다시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작품 활동에 매진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 위치까지 올라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게 다…… 태오 씨 덕분입니다.”
……라고 말을 하더니.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감사합니다, 태오 씨!”
“아…… 네.”
다 좋은데, 손 좀 놔주면 안 될까?
어찌어찌 마 PD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데에 성공한 나는 몰래 쓴웃음을 삼켰다.
내 노래가 반드시 헌터들에게만 도움이 되라는 법은 없다.
마 PD처럼 자기가 하는 일에 자신감을 잃고 넘어진 사람에게, 내 노래는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용기를 심어 줬다.
‘그러고 보니 여태껏 헌터들의 반응에만 관심을 쏟았었는데.’
이렇게 헌터가 아닌 일반인의 소감을 적나라하게 들어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마 PD의 말에 나는 그동안 놓치고 있던 것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오히려 마 PD 덕분에 내가 더 큰 도움을 받은 듯한 기분이다.
음악감독이 잠깐 감정이 올라왔던 마 PD를 위로하기 위함인지 손으로 등을 토닥여 줬다.
“이러이러해서 결국 태오 씨에게 OST를 맡기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저희 입장에서 보면, 태오 씨만큼 요즘 장안의 화제로 거듭나고 있는 인물도 찾아보기 힘드니까요. 유명하신 분이 저희 드라마 OST를 불러 주시면, 그만큼 홍보도 될 테고. 이런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어떻게, 태오 씨가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이 되었을지 모르겠네요.”
“충분합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빙빙 돌려 말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렇게 스트레이트로 말씀해 주시는 걸 더 좋아하거든요.”
“다행이네요.”
음악감독이 크게 안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동기도, 노래도. 다 좋다.
여기에 추가로 하나만 더 확인하고 넘어가고 싶었다.
“이 OST곡 제가 부르게 되면, 헌터들이 몬스터하고 전투할 때 듣는 플레이리스트에 넣어도 될까요?”
“네, 물론이죠! 저희 드라마 OST가 인류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만큼 기쁜 일도 없을 겁니다. 그렇죠, PD님?”
마석인 PD도 음악감독의 말에 공감하는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곡 사용에 대한 허가도 받았고.
“그러면 이 노래, 레코딩 들어갈 때까지 최대한 연습 많이 해 오겠습니다.”
이 OST곡을 내 노래로 만들기 위한 과정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