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돌풍의 주역 (5)
거의 랩 수준으로 흘러나오는 BGM.
일반 사람이라면, 몸이 반응조차 못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누구인가.
세계 최초 헌터 보이그룹 아니겠나.
HTB라면, 일반 아이돌 그룹이 해내지 못하는 것도 할 줄 아는 모습을 시청자들에게 보여 줘야 한다.
헌터 자격을 걸고서라도 말이다.
멤버들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인지, 이를 악물고 처음부터 끝까지 8배속 안무를 완주했다.
나와 데이브는 멀쩡하지만, 멤버들은 이제 손발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8배속 안무를 완벽하게 완주한 팀은 우리밖에 없었다.
두 MC가 우리를 향해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역시! 이것이 HTB의 능력이군요!”
“제가 장담하는데, 오늘 이 장면은 레전드 짤로 계속 돌 겁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춤을 추는데, 눈으로 도저히 따라가질 못하겠더라고요.”
그게 정상이긴 하다.
나는 MC들이 우리에게 더 악독한 걸 시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이 약해서 의외였다.
아니, 8배속 정도면 충분히 무리한 요구를 했던 게 아닐까?
그냥 우리가 너무 잘해서 쉽게 끝났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 * *
‘아이돌 이력서’ 녹화를 마친 우리들은 그다음에 다른 방송국으로 바로 움직였다.
어디 식당에 들어가서 한가롭게 밥을 먹을 시간이 없었기에 이동하면서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기로 했다.
오늘의 점심은 햄버거 세트.
가장 큰 사이즈로 시킨 나는 먹기 전에 내 앞에 고정되어 있는 작은 카메라 앞에 햄버거를 보여 줬다.
먹방을 하기 전에 먼저 이렇게 음식을 한번 보여 준 다음에 먹는 것이 예의라고 들었다.
준서도 우리 그룹에서 가장 어린 멤버답게 먹방 같은 걸 자주 본 모양인지 내가 했던 것과 똑같이 행동했다.
반면, 다른 멤버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배부터 채웠다.
쯧쯧쯧. 아이돌이라는 녀석들이. 이런 서비스도 안 해 주고.
아직 카메라에 익숙해지려면 한참 멀었다.
딜런이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승훈이 형한테 물었다.
“매니저님은 안 드세요?”
“나는 너희 촬영할 때 먹고 왔어.”
“뭐 드셨는데요?”
“순대국밥하고 수육.”
“와…….”
햄버거가 초라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니암과 딜런, 데이브는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부터 대한민국 국밥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틈만 나면 국밥 먹으러 가자고 할 정도였다.
그래도 내심 다행이었다.
그 나라의 음식이 입에 맞고, 안 맞고에 따라서 삶의 질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 멤버들은 이걸 떠나서 나나 준서보다 더 K푸드에 집착한다는 점이다.
“오늘 저녁에 방송 끝나고 야식이나 먹으러 가자.”
우리는 헌터라서 야식을 먹어도 얼굴이 붓거나 살찔 걱정이 없다.
자기 전에 마력 한번 굴려 주면 되니까.
데이브가 웬일로 내 말에 가장 먼저 반응했다.
“야식? 좋지.”
배 많이 고픈가 보네.
저 까칠한 데이브마저 순종적으로 만들다니.
이것이 K푸드의 힘인가?
차오르는 국뽕에 ‘주모!’를 부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 * *
다음 날.
눈을 뜬 나는 어제처럼 멤버들보다도 먼저 화장실에 들어섰다.
‘아, 오늘은 카메라 없지.’
어제 나와 아이 컨택을 나눴던 카메라가 오늘은 부재중이었다.
이틀 동안 촬영을 하고, 그다음 주에 또 어제, 오늘처럼 카메라를 설치해서 촬영할 예정이었다.
한 달 내내 숙소에 카메라를 설치한 채 살아가면 너무 불편하기 때문이다.
누가 지켜보고 있다는 점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테고.
차라리 이렇게 촬영 때만 카메라를 설치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덕분에 우리들은 이틀 만에 자유로운 아침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어제처럼 승훈이 형이 우리 숙소를 방문했다.
“준비 다 됐어?”
“어.”
“애들은?”
“아직 자고 있어. 내가 미리 깨워 두고 갈까?”
“놔둬. 시간 되면, 조금 있다가 강원이가 와서 깨울 테니까. 우리는 먼저 움직이자. 시간 없으니까.”
“오케이.”
나 혼자 일정을 소화할 때에는 어제 멤버들과 같이 탔던 차가 아닌, 그보다 작은 차를 이용해서 이동하기로 했다.
승훈이 형과 함께 차에 올라타자마자 왠지 모르게 그리움이 느껴졌다.
“형하고 이렇게 둘이서만 이동하는 거, 오랜만이네.”
“그런가? 나는 불과 며칠밖에 안 된 거 같은데.”
“우리가 그동안 너무 오래 붙어 있어서 그런 거 아니야?”
“그럴지도.”
주차장을 벗어난 승훈이 형이 멤버들 앞에서 하기에는 애매한 질문을 하나 꺼냈다.
“그룹 활동은 어떤 거 같냐?”
“할 만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떤 점이?”
“애들이 생각보다 잘 적응한다는 게 마음에 들더라고. 특히 데이브. 이 녀석이 제일 걱정이었는데, 어제 녹화하는 거 보니까 방송은 안정적으로 잘하더라고.”
“데이브도 너처럼 방송 짬밥이 좀 되는 편이니까.”
우리 둘은 평화의 시대가 찾아오고 그때부터 방송 활동을 부랴부랴 시작한 건 아니었다.
카메라, 기자들 앞에 서서 말하는 건 이전부터도 계속해 왔던 활동이다.
단지 활동 무대가 뉴스 같은 프로그램에서 예능, 가요 프로그램으로 넘어갔을 뿐이지.
그래도 그런 경험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매우 크다.
방송에 익숙한 사람이 그룹 내에 두 명이나 있어서인지 준서, 딜런, 니암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자신들의 분량을 챙겨 가는 모습을 보였다.
“두 번째 앨범 발표할 때쯤이면 아마 애들도 프로 방송인이 다 되어 있을 거야.”
“그랬으면 좋겠어.”
승훈이 형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 * *
오늘 내가 소화해야 할 촬영을 위해서 스튜디오가 아닌 스태프들이 일하는 사무실을 찾게 되었다.
사무실 벽면에는 눈에 띄는 포스터가 여러 장 붙어 있었다.
포스터를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던전 탐험대’라는 글자였다.
오랜만에 보는 박민진 PD가 나를 자리로 안내했다.
“축하드려요, 태오 씨. 노래 완전 대박 터졌던데요? 요즘은 어딜 가도 HTB 노래가 계속 나오더라고요.”
“아직 멀었죠. 더 노력해야 합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우리 HTB를 돌풍의 주역이라 칭하고 있었다.
가요계 전체를 뒤흔드는 전무후무한 헌터 아이돌.
HTG가 처음 사람들 앞에 무대를 선보였을 때보다도 훨씬 더 파급력이 있었다.
축하는 나만 받을 게 아니었다.
“박 PD님도 축하드립니다. 이번에 ‘던전 탐험대’ 정규 편성되었다면서요?”
“네, 맞아요.”
박 PD의 얼굴에 기쁨이 묻어 나왔다.
어떻게든 ‘던전 탐험대’를 정규 편성표에 올리는 것이 박 PD의 목표였다.
1화 마지막에 등장했던 나와 정령들의 교감 신이 큰 반향을 일으킨 덕분에 박 PD의 목적이 현실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날 태오 씨가 저희한테 마지막으로 그쪽에 한 번만 가 보자는 말을 안 하셨더라면, 정규 편성은 어림도 없었을 거예요.”
1화에 힘입어 2화까지 무난하게 촬영을 이어 갔던 ‘던전 탐험대’였지만.
마지막 3화에서 대형 사고가 터져 버렸다.
네크로맨서가 소환했던 돼지 괴물들과 마주치고 만 것이다.
그로 인해 3화는 제작이 취소되었고, ‘던전 탐험대’는 애초에 계획이 잡혀 있었던 편 수까지도 촬영하지 못한 채 그렇게 종영해야 했다.
그래서 나도 한때는 정규 편성은 힘들겠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바로 얼마 전, ‘던전 탐험대’가 파일럿 프로그램 신세에서 벗어나 정식으로 제작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를 의심했었다.
“박 PD님의 노력이 통해서 다행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걱정되는 게 있네요.”
“어떤 걸까요?”
박 PD가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태오 씨가 저희 프로그램에 계속 나와 주실지가 가장 걱정이에요.”
그래서 오늘, 이렇게 나를 직접 보자고 한 거였다.
박 PD가 이렇게 말을 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왜냐하면 얼마 전에 내가 헌터보이즈, HTB의 리더로 두 번째 데뷔를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룹 활동도 초대박을 쳤다.
내일도, 모레도.
연달아 스케줄이 잡혀 있다.
“태오 씨가 워낙 바쁘시니까 저희가 섭외 요청을 드리기가 좀 그렇더라고요. 이걸 말씀을 드려야 좋을지, 어떨지…… 이미 한창 잘되고 계신 분인데, 괜히 저희가 발목 잡는 느낌도 들고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저는 그런 거 신경 안 씁니다.”
그리고 애초에 박 PD가 이런 말을 할 수도 있다고 예상했었다.
미리 대답도 정했다.
“출연해야죠.”
“정말인가요?”
박 PD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굉장히 시무룩했던 분위기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네, 제가 출연했던 프로그램이니까요. 시청자분들도 당연히 제가 나올 거라고 기대하고 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정규 편성 때 저만 쏙 빠져 있으면, 당연히 말이 나오겠죠.”
나도 ‘던전 탐험대’ 1, 2화를 직접 모니터링했다.
둘 다 내 비중이 상당했다.
주인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과찬인 거 같고. 그래도 영화로 치면 최소 조연급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1화만 놓고 본다면 주인공이 맞다.
내가 하드 캐리 한 건 맞으니까.
이런 와중에 내가 빠지면 큰일이다.
어렵게 정규 프로그램을 승격했는데 막상 공개하고 나니까 시청률이 계속 하락세를 이어 가면, 노력한 보람이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던전 탐험대’라는 프로그램이 꽤 마음에 들었다.
몬스터와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던 그 현장을 이제는 여유를 가지고 한번 돌아본다는 느낌이 굉장히 신선했기 때문이다.
단, 내가 출연하려면 조건이 하나 걸려야 했다.
“혹시 이전처럼 2박 3일로 날을 잡아서 촬영하실 건가요?”
“기간이 너무 오래 걸리죠?”
“네, 2박 3일이나 시간을 비우기에는 좀 어려울 거 같아서요.”
그리고 1, 2, 3화에 돌았던 던전들의 경우에는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크기를 자랑하는 던전들이다.
그런 곳은 2박 3일 동안 날을 잡고 돌아도 볼거리가 계속 나오긴 하지만.
대부분의 던전은 DN-219처럼 넓지 않다.
솔직히 하루 정도면 충분히 돌아보고도 남는다.
이런 내 생각이 박 PD에게도 통했는지, 그녀가 먼저 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저희도 내부 회의를 좀 해 봤는데, 안 그래도 태오 씨가 지적하셨던 기간 이야기가 많이 나왔습니다. 오래 촬영한다고 영상에 쓸 만한 분량이 계속 나온다는 보장도 없고요. 차라리 시간을 단축하고, 그 안에 최대한 효율적으로 방송 분량을 뽑아 보자는 의견이 압도적이더라고요.”
“스태프들도 2박 3일 동안 던전에서 지내고 싶진 않을 테니까요.”
“사실 그게 가장 큰 요인이었던 거 같아요.”
박 PD도 3화 촬영 때 겪어 봐서 알 것이다.
아무리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 할지라도, 던전은 여전히 위험한 곳이라고.
“그래서 이번에는 야외 숙영을 없애고, 그냥 당일치기로 갔다 오려고요. 이렇게 일정을 조율하면, 태오 씨는 어떠신가요? 참가 가능하시죠?”
“네, 물론이죠. 좋은 생각입니다.”
그냥 그날 하루만 비우면 되는 거니까.
이 정도면 나도 일정을 잡는 데 부담감을 훨씬 덜 수 있다.
“그리고 태오 씨.”
“네.”
“혹시 괜찮으시다면…… HTB 멤버들도 게스트로 초대해도 될까요?”
“왜 안 되겠습니까. 제가 멤버들한테 말해 보겠습니다.”
오히려 내가 먼저 멤버들도 데려가고 싶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