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돌풍의 주역 (3)
축구 게임에서 준서한테 진 게 영향이 컸던 걸까?
데이브가 살살 좀 하라고 계속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게임이 끝날 때까지 소위 ‘진지충’ 자세로 임했던 내 덕분에 경기는 50 대 5라는 압도적인 차이로 끝나 버리고 말았다.
데이브는 어이가 없는 모양인지 내 능력을 견디지 못하고 너덜너덜해진 농구공을 집어 들면서 말했다.
“하여간 저 녀석은…….”
혀를 쯧쯧 차는 데이브.
이번만큼은 내 잘못임을 인정한다.
이런 거 말고 게임 실력을 더 키워서 다음에 준서한테 리벤지라도 신청해야겠다.
“사과의 뜻으로 내가 맛있는 거 살 테니까 가자.”
준서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제가 먹을 거에 독이라도 타는 거 아니죠?”
“안 그래, 인마. 내가 잘못했다고 몇 번이나 말했냐.”
아까 윤 PD하고 잠깐 미팅을 했을 때, 어느 곳에서 저녁 식사를 할지 미리 가게를 알려 줬었다.
덕분에 가게에 가서 식사하기 전에 스태프들이 미리 카메라들을 세팅하고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윤 PD가 카메라 밖에서 우리에게 어느 한 테이블을 가리켰다.
저기 가서 먹으면 된다는 뜻이었다.
탁 트인 시야.
가만히 앉아 있어도 절로 식욕이 끓어올랐다.
나와 딜런, 니암이 한자리에.
그리고 맞은편에 데이브하고 준서가 자리를 잡았다.
가게 유니폼을 갖춰 입은 젊은 직원이 우리에게 메뉴판을 건네줬다.
“메뉴 정하시면 언제든 불러 주시기 바랍니다.”
“예.”
내기에서 진 건 억울하지만, 그렇다고 멤버들에게 소극적으로 한 끼를 사 주고 싶지 않았다.
기왕이면 통 크게.
그래서 일부러 소고기 전문점을 찾았다.
“다른 건 몰라도 소고기 사 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그러던데요.”
준서가 인터넷에서 본 말을 인용했다.
“그래, 좋은 형이니까 다음에 게임할 때 좀 봐주면서 해 줘라.”
“정말요?”
“농담이야.”
데이브를 시작으로 각자 먹고 싶었던 것들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토마호크 850g, 소고기 세트, 육회, 그리고 각 부위별로 스테이크를 따로 시켰다.
다섯 명이 먹기에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PD가 놀랐는지 우리들에게 물었다.
“그거 다 드실 수 있으세요?”
“네. 저희는 에너지 소모가 많은 편이라서 소화도 굉장히 빠릅니다. 오히려 이렇게 먹어 줘야 ‘아, 이제 배 좀 부르네.’ 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물론 평소에도 이렇게 많이 먹진 않는다.
오늘처럼 마력을 좀 소모했다 싶을 때에만 그렇다.
마력을 사용하는 게 보기와는 다르게 상당히 힘들다.
정신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모든 신경을 집중해야 하기에 금세 지치기 마련이다.
수련을 통해서 이거에 익숙해지도록 점점 시간을 늘려 가야 한다.
이것 또한 강함의 척도가 되기 때문에 헌터들은 늘 수련을 게을리해선 안 된다.
요즘은 평화의 시대니 뭐니 해서 나도 훈련은 등한시하고 연예계 활동에만 집중하고 있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많이 먹어도 상관없다는 우리의 말을 PD에게 그대로 증명하듯, 나를 필두로 멤버들은 정신없이 먹거리들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그래도 예전에 비해선 준 거다.
쉬지도 않고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던 음식들을 모조리 비운 우리들.
직원들뿐만 아니라 요리사들도 우리들의 대식가적인 면모에 놀란 듯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PD도, 스태프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정도면, 어디 푸드 파이터 대회 같은 데에 나가도 괜찮을 거 같은데요?”
음, 정말로 그렇게 해 볼까?
나도 모르게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따로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고 각자의 침대에서 잠을 청했다.
원래의 내 집이 아닌 숙소에서 취침을 취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아무래도 낯선 환경이라 그런지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슬쩍 눈을 뜨자, 눈앞에 카메라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나 자는 모습도 찍고 있겠지?’
안 그래도 잠 안 오는 환경 속에서 카메라까지 저렇게 노골적으로 나를 보고 있으니까 졸리기는커녕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냉장고에 뭐 마실 게 있었나?’
슬쩍 방을 나왔다.
거실에 들어선 순간.
나보다 먼저 냉장고를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뭐냐.”
데이브가 퉁명스러운 반응을 보이면서 내게 무슨 볼일이냐는 식으로 물었다.
“잠이 안 와서. 뭐라도 좀 마시려고.”
딱 보니까 데이브도 나와 똑같은 목적으로 거실을 찾아온 모양인가 보다.
“너도 잠이 안 와?”
“나만 그런 거 아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소파 쪽을 가리켰다.
준서와 딜런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너희는 왜 나와 있어?”
“저희도 잠이 안 와서요.”
“영화 하나 보다가 잘까 해서 나왔습니다. 형도 같이 와서 보실래요?”
딜런이 비어 있는 소파 자리를 손으로 가볍게 팡팡 쳤다.
“데이브, 너는?”
같이 보러 가자고 말을 하려고 했는데.
“난 됐다. 소리 너무 크게 하지 마라. 나 자는 데 방해되니까.”
그렇게 말하고서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니암은 뭐 하나 싶어서 슬쩍 방문을 열고 확인해 봤는데.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자고 있었다.
우리들 중에서 유일하게 자는 데에 성공한 멤버였다.
“대단하네, 니암. 이 상황에서 잘 수가 있긴 하구나.”
나는 오늘부터 숙소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평소 니암의 수면 패턴이 어떤지 잘 모른다.
준서가 영화를 보면서 간단하게 먹을 것을 챙기는 도중에 말을 꺼냈다.
“니암 형, 눕자마자 바로 잠드는 스타일이에요.”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체질이었네.”
나는 저렇게 칼같이 자는 사람이 제일 부럽다.
리클라이너 소파에 앉아 침대처럼 몸을 최대한 눕혔다.
불 꺼진 거실에서 TV 화면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에만 의존하니 뭔가 운치가 있었다.
예전에 각성하기 전에 이렇게 누나가 늦게 들어오면 나 혼자 거실에 누워서 TV를 틀어 놓고 자곤 했었는데.
옛날 기억이 솔솔 새어 나왔다.
“영화 뭐 볼까요?”
딜런이 리모콘을 잡고서 내게 먼저 선택권을 줬다.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까 이렇게 여유롭게 영화를 본 것도 얼마 만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새벽 감성에 잘 어울릴 만한 영화 어디 없을까?”
“로맨스 보실래요? 얼마 전에 재미있는 영화 하나 나왔다고 하던데.”
“개봉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OTT로 풀렸어?”
“애초에 처음부터 OTT로 공개됐어요.”
“아, 그래? 그럼 그거 보자.”
“알겠습니다.”
딜런이 고른 영화는 시골에 사는 남성과 도시에 사는 여성의 장거리 연애를 그린 로맨스물이었다.
이쪽 장르의 영화는 잘 보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뭐랄까, 장면 하나하나가 아까 내가 말했던 것처럼 새벽에 보기 딱 좋을 정도로 아름다운 컷들이어서 이거 보는 맛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영화란 생각이 들었다.
스토리도 꽤 좋다.
게다가 여주인공 역할로 나온 인물이 나에게 익숙한 이빈이라서 그런지 몰입이 잘됐다.
거의 2시간 가까이 이어진 영화.
옆을 보니, 준서와 딜런은 영화를 보던 중간부터 잠이 들었는지 미동도 하지 않은 채로 있었다.
결국 나 혼자만 영화를 완주하는 데에 성공했다.
“짜식들.”
내일 아침부터 일찍 스케줄이 있어서 나가야 한다.
멤버들이 감기에 걸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혹시 몰라서 이불을 덮어 줬다.
“잘 자라.”
새벽 2시 반.
나도 이제 정말로 자러 가 봐야겠다.
* * *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카메라가 ‘위잉’ 소리를 내면서 내 쪽으로 앵글을 돌렸다.
거참, 신기한 녀석이네.
침대에서 벗어나기 전에 나는 먼저 명상 자세에 돌입했다.
헌터 활동을 할 때에도 늘 아침에 하던 루틴이 있다.
명상, 그리고 스트레칭.
이 두 개는 꼭 하는 편이다.
원래 목적은 몬스터와의 전투를 위해서였지만, 지금은 건강을 위해서다.
만족할 만큼 명상과 스트레칭을 한 다음에 방을 나섰다.
화장실에 들어서자, 바로 카메라와 아이 컨택을 하고 말았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본의 아니게 생얼을 너무 적나라하게 공개하고 말았다.
개인적으로 이건 편집해 줬으면 하지만…….
‘절대 그럴 리 없고.’
나도 관찰 예능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요즘 대세 아이템이라서 그런지, 채널을 돌리다 보면 관찰 예능은 거의 무조건 보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기서 개근상이라도 노리는 것처럼 꼭 등장하는 연출이 있다.
바로 지금처럼 연예인들이 아침에 막 일어나서 화장실로 왔을 때 보여지는 ‘쌩얼’이다.
과연 연예인의 생얼은 어떨까?
관찰 예능 프로그램이 아니면 보기 힘든 장면이었기에 이 샷은 무조건 살릴 거다.
‘뭐, 상관없지.’
헌터로 활동할 때에는 맨날 생얼로 다녔다.
때로는 몬스터 피를 뒤집어쓴 채로 기자들 앞에 선 적도 있었다.
이미 대중한테 못 볼 꼴 다 보여 줬기 때문에 이제 와서 생얼 보였다고 내 멘탈에 금이 가거나 할 일은 절대로 없다.
단지 신경이 쓰이는 게 있다면.
‘볼일 보는 건 정말로 안 보이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생리 현상을 해결할 때에만 다른 화장실을 이용하기로 했다.
간단하게 씻고 나오자, 내 뒤를 이어서 두 번째로 기상한 멤버가 모습을 드러냈다.
“데이브, 일어났냐? 화장실 써도 돼.”
“난 저쪽 화장실 쓸 거다.”
“왜? 카메라 여기에 설치되어 있는데.”
“그것 때문이잖아.”
뭐, 본인이 싫다니까.
굳이 강요할 생각은 없었기에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놔줬다.
다음으로 준서와 딜런, 그리고 우리들 중에서 가장 빠른 취침을 선보였던 니암이 마지막으로 기상을 마쳤다.
다들 나갈 준비를 서둘렀다.
때마침 승훈이 형이 우리들을 데려오기 위해 집을 방문했다.
“친구들, 준비 다 끝났어?”
“예!”
“차 밑에 세워 뒀으니까 바로 출발하자고. 오늘은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하니까 졸리면 차에서 자고. 커피도 사 뒀으니까 마시고 싶은 사람은 가서 마셔.”
승훈이 형 덕분에 우리는 편하게 촬영이 예정되어 있는 방송국으로 향할 수 있었다.
오늘처럼 5인이 단체로 이동할 경우에는 승훈이 형이 메인으로 우리를 데리고 다닌다.
하지만 각기 다른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경우에는 매니저 2와 매니저 3이 출동한다.
이렇게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었기에 바빠도 혼선이 펼쳐질 일은 없었다.
나 혼자 활동할 때 끌고 다니던 차는 회사 차로 넘겼다.
인원수가 늘어난 만큼, 더 큰 차량으로 바꾸게 되었다.
처음 타는 새 차.
승훈이 형도 나름 바빴던 모양인지, 차 안에 타고 보니 아직 비닐을 안 뜯은 부분이 군데군데 존재했다.
내가 탄 좌석을 기준으로 오른쪽 A필러 부분 역시 여전히 비닐이 붙어 있었다.
“승훈이 형, 이거 내가 떼도 괜찮아?”
“뭔데?”
“비닐.”
“아, 거기 남아 있었어? 뭐, 상관없어. 근데 그런 것까지 허락받고 떼려고 그래? 그냥 떼어 버려도 상관없는데.”
“원래 새 차 비닐 떼는 건 차 주인만의 특권이잖아.”
승훈이 형이 갑자기 피식 웃었다.
“이거, 회삿돈으로 산 거라서 내 차 아니야.”
그렇다면야, 보이는 족족 떼 버려야겠다.
샵 가는 길에 소일거리 하나가 생긴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