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장. 던전 탐험대 (3)
그날 전투의 흔적들이 천장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여기저기 뻥 뚫려 있는 구멍들.
그래도 덕분에 입구를 통과할 때처럼 손전등에 의지해서 걸어갈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다.
양성빈 배우가 내 쪽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저것들도 다 태오 씨 작품인가요?”
“다는 아니고요. 몇 개는 다른 헌터들이 했습니다. 여기가 미로 던전이라서, 통로를 따라 그대로 이동하면 길을 잃기가 쉽거든요. 그러면 몬스터들의 습격에 계속 노출될 테고. 또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고. 그래서 의도적으로 저렇게 군데군데 빛이 잘 통하게끔 추가로 구멍을 뚫어 놨습니다.”
“그랬군요. 왜 그런지 이야기를 직접 들어 보니까 저 구멍들이 다르게 보이네요.”
인류와 몬스터의 투쟁 속에 생긴 흔적들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헌터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걸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마음이 먹먹했다.
그렇게 3시간가량을 걷고 걸은 끝에.
마침내 이 던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미로 지역이 나왔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신에리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눈앞의 현장을 가리켰다.
“미로……라고 하지 않았나요?”
높은 돌벽들이 미로처럼 솟아 있어서 이 던전이 미로 던전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돌벽들이 온통 무너져 있었다.
출연자들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다.
“설마…….”
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주먹을 살짝 말아쥐었다.
“전투에 방해가 되는 건 없애 버리는 게 가장 좋더라고요.”
미로에서 미로라고 불렸던 것으로 지형이 바뀌어 버렸다.
윤선규가 아쉬운 마음을 드러냈다.
“미로 던전이라고 해서, 기대를 좀 하고 왔었는데.”
“세상에는 안전한 미로들이 많이 있으니까, 너무 실망하진 마세요.”
과연 내 말이 위로가 될 수 있을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다.
* * *
해가 저물었으니, 계속해서 던전을 탐험하기보다는 무너진 미로 지역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어차피 우리들에게는 2박 3일이라는 기간이 있으니까.
이제 고작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다.
스태프들도 여유 기간이 남아 있다는 사실 덕분인지 분량 걱정은 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애초에 이 던전 내부를 찍어서 잘 편집하기만 해도 충분히 분량은 나온다.
일반인들은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니까.
저녁 8시.
상당히 이른 시간에 취침을 취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출연자들은 바로 곯아떨어질 기세로 침낭을 펼쳤다.
그러나 나와 아이리스, 나빈이, 이렇게 셋은 쉽게 잠을 청할 수 없었다.
불침번 때문이었다.
“내가 먼저 서고 있을 테니까, 아이리스하고 나빈이가 둘번초나 삼번초 맡을래? 대신에 내가 좀 더 길게 설게.”
“괜찮겠어요? 오빠도 많이 피곤하실 텐데.”
아이리스가 나를 보면서 걱정 어린 목소리를 냈다.
“어차피 당장 잠도 안 오고. 그래서 딱히 상관없어. 내가 새벽 2시까지 혼자서 설 테니까, 나머지는 너희가 알아서 잘 분배해 봐.”
“네, 그렇게 할게요.”
아이리스와 나빈이가 알겠다면서 잠깐 자리를 비켰다.
그사이, 나는 모닥불 안에 미리 확보해 둔 장작들을 하나하나씩 던져 넣었다.
침낭 안에 막 들어가려던 양성빈 배우가 가만히 ‘불멍’을 때리고 앉아 있는 나를 보며 물었다.
“태오 씨는 안 주무시나요?”
“네. 저는 나빈이하고 아이리스하고, 이렇게 셋이 돌아가면서 불침번 설 겁니다.”
불침번이라는 말에 양성빈 배우뿐만 아니라 윤선규, 이아담, 신에리까지.
모든 출연자들이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때, 양성빈이 다른 출연자들에게 먼저 제안했다.
“다 같은 출연자인데, 누구만 불침번 서고, 그러면 안 되잖아. 우리도 돌아가면서 같이 서자.”
“네, 그게 좋겠어요.”
PD가 따로 지시한 것도 아닌데.
출연자들이 자발적으로 우리처럼 한 명씩 불침번을 서겠다고 나섰다.
나는 괜찮다고 여러 차례 말을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저희가 몬스터가 나왔을 때에는 아무 도움도 못 되어 드리겠지만, 그래도 심심하지 않게 말 상대 정도는 해 드릴 수 있어요. 그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저 군대 갔을 때에는 그랬는데.”
양성빈 배우의 말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설마 여기서 군대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아니지, 불침번이라고 하니까 오히려 군 복무 시절이 연상되었을지도 모른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죠.”
우리는 근무 서고, 저들은 편히 자고.
이러는 장면이 방송에 그대로 나가면, 시청자들에게 욕을 먹을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괜히 우리 따라서 불침번 교대로 안 서도 된다면서 말렸던 나도 미안해지고.
그래서 그냥 허락하기로 했다.
출연자들끼리 가위바위보를 한 결과.
양성빈과 이아담이 나와 같이 불침번을 서게 되었다.
윤선규는 아이리스와, 신에리는 나빈이와 한 조가 되었다.
아이리스는 헌터들을 제외한 연예인 참가자 중 유일한 홍일점인 신에리가 나와 같은 조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크게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여간 쟤는 왜 이렇게 질투가 심한지 모르겠다.
나하고 신에리 씨가 서로 친한 사이도 아닌데.
오늘 촬영하면서 처음 본 관계다. 그런데 방송을 계기로 갑자기 사이가 가까워지고, 결혼까지 골인할 리가 없……진 않을 거다.
실제로 연예계에는 그런 사례가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신에리에게 관심이 있다는 건 아니다.
“저희 먼저 잘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아니지, 근무 힘내세요!”
후번초들이 잠을 청하기 위해 각자 깔아 놓은 침낭 속으로 향했다.
나는 양성빈, 이아담, 이렇게 셋이서 같이 모닥불 앞에 모여들었다.
스태프들도 내일을 위해서 거치 카메라만 몇 개 설치해 두고, 텐트 속에서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무서우리만치 고요해진 던전 내부.
뻥 뚫린 천장에서 들어오는 달빛이 오늘따라 운치 있어 보였다.
양성빈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신기하네요.”
“지금 이 상황이요?”
양성빈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 말이 맞음을 알렸다.
“예. 게이트 열렸다는 경보를 받고, 스케줄 다 캔슬하고 도망치고. 이러는 게 일상이었는데, 이제는 몬스터들의 본거지였던 곳에서 이렇게 캠핑을 하고 있으니까 기분이 굉장히 묘해서요. 이게 꿈인 것처럼 느껴지고. 정말 레이드 시대가 끝난 게 맞긴 한가 봐요.”
헌터들만 레이드 시대가 종결되었다는 사실에 해방감을 느낀 건 아니었다.
양성빈과 같은 일반인들 역시 우리만큼의 해방감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야 몬스터들과 싸우는 게 일이지만, 아무런 힘도 없는 일반인들은 몬스터에게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이유도 없이 언제 어디서 죽음의 공포가 찾아올지 모른다는 사실에 매일매일이 두려웠을 것이다.
나도 충분히 이해한다.
각성자가 되기 전에는 나 역시도 그랬으니까 말이다.
양성빈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태오 씨가 저보다 더 힘드셨을 텐데.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았네요.”
“아닙니다. 힘듦에 크고 작고는 없으니까요. 내가 힘든데, 남이 더 힘든 일을 겪고 있다고 내가 행복해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양성빈이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태오 씨가 저보다 더 어른이시네요.”
그 말에 이번에는 내가 웃었다.
“연예계 생활은 좀 어떠십니까? 벌써 앨범만 두 번째 내셨으니까, 웬만큼 다 적응하셨을 거 같은데.”
“그래도 여전히 모르는 것투성입니다. 선배님이 많이 알려 주셨으면 좋겠네요.”
“태오 씨한테 선배님이라고 불리니까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한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우리가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이아담은 계속해서 모닥불에 마른 나뭇가지들을 던지고서 부채로 공기를 주입했다.
불씨를 살리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아담 씨는 자세를 보니까 서바이벌 전문가 포스가 느껴지네요.”
“예전에 ‘무인도에서 일주일 버티기’ 프로그램에 나간 적이 있었거든요. 거기서 생존 전문가분한테 이것저것 많이 배웠습니다. 라이터 없어도 불 피울 수 있는 법도 배워 뒀어요.”
“좋은데요?”
“근데 뭐, 오늘은 쓸모가 없네요.”
그런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처음에는 던전 탐험이라는 이색적인 촬영 때문에 출연자들끼리 서로를 알아 가는 시간조차 없었는데.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니까 이제야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 가게 되었다.
그래, 이런 시간도 필요한 법이지.
정신이 없던 낮 시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잔잔한 새벽 타임을 보내는 우리들.
이 와중에 양성빈이 잠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장실 갈까 하는데, 혹시 같이 가실 분?”
“저도 가겠습니다.”
양성빈 혼자서 보내기에는 위험했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몬스터가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굳이 마렵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일부러 양성빈과의 동행을 자처했다.
따로 화장실로 사용할 공간이 없다 보니, 캠프 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알아서 해결하고 와야 했다.
남자끼리니까, 양성빈은 가까운 곳에서 바로 지퍼를 내렸다.
그동안 나는 주변을 살폈다.
‘조용하네.’
소변 보는 소리 빼고 말이다.
하긴, 협회도 수십 번 넘게 이 던전이 위험한지 안 위험한지 확인을 했을 텐데.
내가 너무 과민반응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볼일을 다 본 양성빈이 ‘어라?’라고 말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태오 씨는 볼일 안 보세요?”
“깜빡했네요.”
기왕 온 김에 작은 걸 해결하고 가는 게 좋아 보였다.
양성빈이 기다려 주는 동안 나도 똑같이 바지 지퍼를 내리려고 했다.
그 순간.
따스한 바람이 불어왔다.
“……?”
이 던전에 들어오고 나서 느껴 본 적 없는 이질적인 바람의 감촉.
누군가의 숨결 같기도 했다.
‘뭐지?’
이 주변을 빠르게 훑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양성빈이 헛숨을 삼켰다.
“왜 그러십니까?”
“태오 씨…….”
양성빈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나를……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지퍼가 내려가 있는 내 하반신 쪽을 가리켰다.
“다 좋은데, 남대문은 닫아 두고 돌아다니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
다른 의미로 위험할 뻔했다.
* * *
둘번초를 맡게 된 나빈이에게 다가갔다.
“홍나빈 병장님, 근무 시간입니다.”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선배님.”
“아니, 그냥. 왠지 모르게 이렇게 깨우고 싶어졌거든.”
아까 양성빈한테서 군대에서 후번근무자를 깨울 때 어떻게 하는지 재미 삼아 들었다.
그게 떠올라서 나빈이한테 한번 써먹어 보고 싶어진 거였다.
나빈이는 눈을 뜨자마자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어디서 또 이상한 걸 배워 오신 거예요.”
“이상한 거 아닌데.”
회심의 깨우기라고 생각했는데, 우리 후배님은 그렇게 안 보이나 보다.
침낭 속으로 들어가 잠을 정하기 전에, 나빈이가 나를 불러세웠다.
“인수인계하실 거 있나요?”
인수인계라.
“아니, 없어.”
신경 쓰이는 게 하나 있긴 했지만.
내 착각에 불과했던 건지, 확실하지가 않아서 일단은 보류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