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장. 반전을 품은 연습생 (2)
나뿐만이 아니라 현장을 지키고 있던 모든 스태프들, 출연자들까지 전부가 다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송유별과 같이 곡, 팀원 선택권이 있는 상위 7위권 연습생들은 선택 못 한다 치더라도.
8위 연습생부터는 충분히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70명 중 68위를 달리고 있는 진슬혜를 가장 먼저 팀원으로 데려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조윤혁도 당황했는지, 대본에 없는 질문을 던졌다.
“진슬혜 양을 데려가려는 이유가 뭡니까?”
“슬혜가 노래든 춤이든, 뭐든 잘하거든요.”
“그런가요?”
“네. 단지 카메라 앞이라서 너무 지나칠 정도로 긴장한 탓에 제 실력을 발휘 못 하는 것일 뿐이에요.”
그럴 수 있지.
나도 충분히 공감한다.
만약에 내가 사람들 앞에 서는 경험을 자주 하지 않은 채로 데뷔를 했다면, 첫 무대부터 바로 방송 사고를 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카메라 앞에 선다는 일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엄청난 중압감을 준다.
사석에서 만나면 정말 재미있는데, 이상하게 무대에만 올라서면 너무 긴장해서 본인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 못 하는 연예인들도 많이 있다.
프로도 이런데, 아마추어 연습생은 아마 더 그럴 것이다.
저 두 사람의 관계가 궁금해졌다.
“PD님, 송유별 양하고 진슬혜 양, 친한 사이인가요? 마치 서로에 대해 잘 안다는 것처럼 말해서요.”
“같은 소속사 연습생 출신입니다. 지금은 아니지만요.”
“아니라고요? 왜요?”
“중간에 소속사가 망했습니다. 그래서 데뷔도 무산되고, 각자 프리로 다른 소속사 들어가려고 오디션 준비하고 있다가 저희 프로그램 모집 공고 보고 지원했다고 하더라고요.”
PD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유별이 말이 틀린 건 아닙니다. 오디션 볼 때, 제가 직접 모든 연습생들을 다 체크했거든요. 오디션 성적만 놓고 본다면, 유별이하고 슬혜가 1, 2위를 다툴 겁니다.”
68위의 숨은 정체.
그래서 PD는 더 안타까워했다.
“재능은 있는데, 아직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익숙하지 않은가 봅니다. 시선 처리도 불안하고, 다른 연습생들 무대 보고 있으면 오버하더라도 리액션이라도 크게 해 줘야 카메라도 자주 비춰 주고 그럴 텐데, 도통 그럴 기미가 안 보입니다.”
그래서 진슬혜 연습생의 출연 빈도가 낮았던 거로군.
이제야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아까운 인재네요.”
“네. 이번에 투표 순위 68위 나온 거 보니까, 아마 다음 생존 미션 때에는 살아남기 힘들 거 같습니다.”
진슬혜 연습생에게 필요한 건 대중 앞에 설 때 느끼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일이다.
그게 선행되지 않으면, 설령 가수로 데뷔한다 할지라도 이 두려움이 계속해서 그녀의 발목을 붙잡게 될 것이다.
‘어려운 문제네.’
내가 여기 프로그램의 제작진도 아닌데.
괜히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 * *
늦은 시간.
녹화를 마치고 회사로 돌아오니, 다 퇴근한 줄 알았는데 아는 얼굴이 아직 한 명 남아 있었다.
“최 프로듀서님, 퇴근 안 하세요?”
작업실에서 헤드셋을 착용한 채 홀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최 프로듀서가 나를 보더니 놀란 얼굴로 물었다.
“이사님이야말로 이 시간에 회사에는 어쩐 일이세요?”
“두고 간 물건이 있어서요. 잠깐 들렀습니다.”
원래는 GSS 녹화 끝나고 바로 집으로 가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녹화가 재미있어서 결국 끝날 때까지 현장에 남아서 구경을 하다가 오게 되었다.
“이사님, 오늘 GSS 녹화하고 오셨다면서요?”
“예, 승훈이 형한테 들었나요?”
최 프로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럽습니다, 이사님. 저도 가 보고 싶었는데.”
“거기에 아는 분이라도 계세요?”
“아니요. 연습생들 보러요. 저도 요즘 그 프로그램 열심히 챙겨 보고 있는데, 재능 있는 친구들이 엄청 많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제가 데려와서 키우고 싶은 친구들도 몇몇 있었습니다.”
인재들이 많긴 하지.
오늘 현장에 가서 직접 보고 온 나였기에 이 말에 깊게 공감할 수 있었다.
연예인은 단순히 노래, 춤 실력만 좋다고 뜨는 게 아니다.
스타성이 있어야 한다.
GSS 제작진이 엄선하고 또 엄선해서 뽑은 인원들답게 한 명 한 명이 다 스타성을 가지고 있었다.
송유별이야 말할 것도 없고.
아직 제대로 된 주목을 못 받아서 그렇지, 어마어마한 잠재 능력을 품고 있는 연습생들도 더러 보였다.
단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보여 줄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모두가 다 평등하게 출연 비중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게 아쉽더라고요.”
현장에서 보면 ‘왜 저 연습생은 인기가 없을까, 저렇게 재미있는데?’ 하는 생각이 많이 들곤 했었다.
최 프로듀서도 몇 차례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심사위원까지 맡아 본 사람이었기에 이 점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거든요. 특히 방송의 세계는 더더욱 그렇고요. 한 명의 스타를 배출하기 위해 수백, 수천여 명의 연습생들이 묻힌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씁쓸함만이 밀려왔다.
이렇게 보면 나는 운이 참 좋은 편이다.
만약 그때 각성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내게 이런 강함이 없었더라면.
아마 나도 진슬혜 같은 신세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최 프로듀서가 헤드셋을 잠시 내려놓고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보니까 요즘은 오디션 프로그램이 유행인 거 같더라고요.”
“그렇죠. 웬만한 채널에서는 꼭 한 개씩은 편성하는 거 같으니까요.”
GSS가 인기를 끄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비슷한 포맷이라 할지라도 그 소재 자체가 인기 있으면, 기본적인 시청률은 보장된다.
그래서 PD들은 자가 복제라는 소리를 들어 가면서도 자신들에게 익숙한 프로그램을 계속 만드는 것이다.
욕먹는 건 잠시뿐이니까 말이다.
“이사님, 그래서 말인데요.”
최 프로듀서가 내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꺼냈다.
“저희도 오디션 프로그램 하나 기획해 볼까요?”
“오디션 프로그램을요?”
“네, 예전에 어떤 회사도 그랬지 않았습니까. 자기 회사 소속 걸 그룹 데뷔시키려고 연습생들 데리고 오디션 프로그램 편성하고. 그 프로그램 덕분에 데뷔 때부터 인기 왕창 끌고 시작했었던 거, 이사님도 기억하시죠?”
“예, 압니다.”
좋은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시청자들이 원하는 걸 그룹 멤버를 직접 구성할 수 있게 해 주고. 그리고 회사는 그 걸 그룹을 통해 인지도와 수익적인 면 등 많은 부분을 챙겨 갈 수 있어서 좋다.
하지만 최 프로듀서의 아이디어는 기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우리가 그렇게까지 연습생들을 많이 데리고 있지 못하니까요.”
“하긴……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요.”
이번에 새로 뽑은 멤버들이 있긴 하지만,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가한 지원자들과 달리 데이브와 기타 멤버들은 가수를 꿈꿨던 사람들이 아니다.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지금 단계에선 상대적으로 시청자들이 원하는 기대치를 충족시켜 줄 수가 없다.
만약에 최 프로듀서의 아이디어대로 어찌어찌 프로그램 편성에 성공했다고 치자.
방송이 나가는 순간, 시청자들은 이 실력으로 어떻게 가수 데뷔를 꿈꾸고 있냐며 엄청난 독설을 날릴 것이다.
이런 미래가 빤히 보였기 때문에 최 프로듀서의 아이디어를 수용하는 건 현실적으로 많이 어렵다.
하지만.
‘다른 시각으로 접근해 보면 괜찮을 거 같기도 한데.’
생각을 좀 더 해 봐야겠다.
* * *
오후에 가요 프로그램 하나를 녹화한 후에 승훈이 형이 몰고 온 차에 올라탔다.
“새벽부터 고생했다, 태오야.”
“형도.”
다른 프로그램과 달리 가요 프로그램 촬영이 유독 더 빡센 느낌이 든다.
하기야, 새벽부터 일어나서 샵에 들르고. 현장에 도착하면 같이 무대에 오르는 가수들하고 인사도 나눠야 하고. 리허설 하고. 그리고 본촬영하고. 또 순위 발표 때까지 기다렸다가 축하 무대까지 해야 한다.
이렇게 하다 보면 거의 하루가 다 지나가 있었다.
원래 이런 날에는 바로 집에 들어가서 쉬는 게 정석이지만.
오늘은 들를 곳이 있었다.
“형, 미안한데, GSS 기숙사 좀 들렀다가 갈 수 있을까?”
“이 시간에?”
“연습생들은 이보다 훨씬 더 늦은 시간까지 연습하고 있다니까. 그리고 지금쯤 되면 몸도 마음도 지쳐 있을 시간이잖아. 이때 먹을 거라도 사서 가 줘야지. 연습도 좋지만, 숨 돌릴 틈도 필요하잖아. 안 그래?”
“그렇긴 한데. 안 피곤하냐?”
“형, 나, 드래곤하고 몇 날 며칠 동안 싸워도 멀쩡했던 사람이야.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일반인의 기준에서 봤을 때에는 이미 쓰러지고도 남았을 테지만, 우리는 일반인이 아니다.
딱히 피곤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기숙사로 향하기 전에 미리 제작진에게 연락을 취했다.
어차피 스태프들도 번갈아 가면서 기숙사 바로 근처 건물에서 같이 숙식을 해결하고 있는 중이었기에 내가 이 시간에 갑작스럽게 연락을 해도 바로바로 촬영 준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차를 타고 30분 정도 지났을 무렵.
저 멀리 연습생들이 머물고 있는 기숙사의 모습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정이 다 되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숙사에 불이 꺼진 곳이 한 군데도 보이지 않았다.
“다들 열심히 하나 보네.”
승훈이 형이 진심으로 놀란 모양인지 여러 차례 혀를 찼다.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미션 다음이 바로 첫 투표니까.”
GSS가 방영된 이후 처음으로 생존자, 탈락자를 가릴 대국민 투표가 시작될 예정이다.
3차 미션에서 자신의 모든 것들을 시청자들에게 보여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탈락이지.’
이번이 마지막 무대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연습생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습에 매진 중이라고 들었다.
입구에 조용히 들어서자, 최소한의 스태프들만이 나를 따랐다.
어차피 오랫동안 촬영할 것도 아니고.
괜히 스태프들이 대규모로 우르르 몰려가 봤자 연습생들에게 부담감만 주는 꼴이 될 테니까 말이다.
“어디로 가면 되나요?”
PD가 아직도 졸린 모양인지 반쯤 감긴 눈으로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가리켰다.
“2층으로 올라가서 바로 오른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계단을 기점으로 복도 끝까지, 전부 다 안무 연습실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찾기는 쉬워서 다행이었다.
연습생들에게는 최대한 들키지 않도록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 혼자였더라면 아예 내 존재감을 숨기고 연습생들의 바로 뒤까지 접근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 나는 촬영을 하러 온 거지, 잠입 액션 게임을 하러 온 게 아니었기 때문에 관두기로 했다.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온 나는 가장 먼저 보이는 안무 연습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하지만 이때.
연습생들의 밝고 환한 미소보다 우리를 먼저 반기는 게 있었다.
“그딴 식으로 할 거면, 차라리 때려치워! 하지 마! 나도 PD님한테 가서 너희랑 도저히 못 해 먹겠다고 말할 테니까!”
찢어질 듯 날카로운 외침 소리에 나와 PD, 그리고 스태프들의 걸음이 동시에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