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라를 구한 톱스타-55화 (55/250)

제15장. 옛날이야기 (2)

아이리스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도 반짝이기 시작했다.

손뼉을 한 차례 마주친 아이리스의 목소리는 마치 신이 난 어린아이처럼 하이톤을 유지했다.

“제가 막 헌터로 각성해서 처음으로 현장에 나갔을 때일 거예요. 그때 ‘딩챠’라는 몬스터를 상대해야 했었거든요.”

“딩챠?”

직원이 고개를 갸우뚱하길래 내가 대신 짧게 설명해 줬다.

“다리 여섯 개 달린 덩치 큰 돼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상상만 해도 별로네요.”

실제로 보면 더 그렇다.

그래도 어찌하랴, 헌터들이 몬스터가 귀여운지 아닌지로 가려서 상대하는 것도 아니고.

인류에게 위협이 되는 몬스터가 있으면 외형을 떠나서 목숨을 걸고 무조건 제거해야 한다.

그날도 그랬다.

“싸우는 도중에 제가 죽을 위기에 몰렸거든요. 그때 태오 오빠가 백마를 타고 등장한 거예요.”

“백마요?”

“네! 말 그대로 백마 탄 왕자님이었어요. 이렇게 검을 크게 휘두르니, 몬스터가 꽥! 하고 단숨에 죽더라고요. 그러면서 저를 안아 들고는 ‘괜찮아, 내 귀여운 아기 고양이?’ 이렇게 말하는데…… 그날 이후로 완전히 반해 버렸어요!”

직원이 내 쪽을 힐긋 바라봤다.

‘이거, 진짜입니까?’ 하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야 당연히 진짜일 리가 없지 않은가.

“저 중에서 믿어도 되는 말은 몬스터의 등장까지만입니다.”

“아하…… 그렇군요.”

아무래도 아이리스의 눈에는 내가 자신을 구하러 온 왕자님처럼 보였나 보다.

아이리스에게는 미안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로맨틱하지 않았다.

딩챠의 주된 공격은 몸통으로 들이받는 것이다.

당시 아이리스는 전투에 능숙하지 않았기에 딩챠들한테 이리저리 얻어맞고 진흙 바닥을 나뒹굴어야 했다.

각성 초반부터 랭크가 높게 나왔던 아이리스인지라 딩챠한테 아무리 몸통 박치기를 당해도 심각한 치명상을 입을 일은 없었다.

가벼운 찰과상 정도.

멀리서 처음 아이리스를 봤을 때에는 딩챠들이 가지고 노는 작은 공인 줄 알았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아이리스부터 먼저 구출한 나는 차례차례로 딩챠들을 쓰러뜨렸다.

그런 뒤, 정신을 잃은 아이리스를 깨웠다.

겨우 눈을 뜬 아이리스가 내게 들려준 첫마디는 이러했다.

멋있어……!

그날부터 아이리스는 나만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알고 보면 그렇게까지 낭만적인 이야기가 아닌데.

아이리스에게는 여러 가지 필터들이 씌고 씌여서 웬만한 로맨스 영화 못지않은 장면으로 거듭나게 되었나 보다.

아이리스가 살짝 볼을 부풀리면서 내게 불만을 드러냈다.

“그래도 오빠가 저 구해 준 건 맞잖아요.”

“맞긴 한데, 그냥 평범하게 구했어. 요즘 동화책 왕자들도 백마는 안 타겠다, 야.”

세상에 언제적 백마 타령인가.

아이리스의 취향에 대해서는 뭐라 할 생각이 없지만, 각색되는 대상이 나라면 문제가 있다.

옛날이야기는 여기까지.

“밥이나 먹자.”

“……네.”

투덜투덜하는 아이리스였지만, 그래도 삼겹살이 입맛에 꽤 맞는 모양인지 이내 먹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 *

밥을 먹고,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그렇게 짧은 데이트를 마친 우리는 차를 타고 아이리스의 집으로 향했다.

아니지, 데이브의 집이라고 하는 게 맞을라나.

둘이 현재 같은 집에서 지내고 있으니까 말이다.

아이리스는 아쉬움이 가득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하고 좀 더 오랫동안 놀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지. 데이브하고 해야 할 일이 있다니까.”

“하여간 우리 오빠는 진짜 못됐어요. 하필이면 이렇게 중요한 날에 강제로 일정을 잡다니.”

내가 보기엔 일부러인 거 같다.

나하고 데이트할 거라는 사실을 데이브가 모를 리 없을 테니까 말이다.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하는 데이브의 집.

입구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데이브가 내 차를 알아보고 계단을 내려왔다.

“왜 이렇게 늦었어.”

데이브가 아이리스에게 곧바로 잔소리를 쏟아 냈다.

그러나 아이리스는 데이브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늦었긴 뭘 늦어! 아직 저녁도 안 됐다고!”

“다 큰 처녀가 저녁에 함부로 돌아다니는 거 아니야.”

아이리스가 데이브를 찌릿 노려보더니, 화가 잔뜩 묻어 나오는 걸음걸이로 집에 들어가 버렸다.

잘 들어가라는 내 말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화가 어마어마하게 난 모양인가 보다.

짧게 혀를 찬 데이브가 내게 손을 훠이훠이 내저었다.

“너도 후딱 사라져라.”

“왜, 멀리까지 왔는데 물이라도 줘.”

“차 끌고 온 주제에 물은 무슨. 네놈이 가면서 편의점에서 사 마셔.”

“정 없긴.”

뭐, 데이브에게 이 이상의 친절을 바란 건 아니었으니까, 나도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근데 진짜로 우리 회사에 올 생각 없어?”

“없다.”

“섭섭하게 굴긴. 방송 하다 보면 매니저도 필요하고, 코디도 필요하고, 일정 관리해 줄 사람이나 영업해 줄 사람도 필요하고 그럴 텐데. 우리가 잘해 줄게.”

“널 뭘 믿고 내가 글로 가겠냐.”

“내가 적어도 뒤통수는 안 치잖아. 알지?”

“…….”

데이브는 입을 다문 채 반응하지 않았다.

나한테 틱틱거리긴 해도, 내가 누군가를 함부로 배신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데이브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저런 반응이 나온 것이다.

“아무튼 잘 생각해 보고 결정해 봐. 언제든 나한테 연락 주고.”

“평생 연락할 일 없을 거다.”

“사람 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몰라.”

처음에는 아니겠지 하는 일도 나중에 가면 갑자기 벌어지고 그럴 때가 많다.

내가 몇 차례 겪어 봐서 잘 안다.

* * *

최 프로듀서가 만든 데모곡을 듣던 나는 살짝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런 내 반응에 최 프로듀서가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멜로디가 마음에 안 드시나 보군요.”

“네. 뭐랄까, ‘나의 길’하고 너무 비슷한 느낌이라서요. 새로운 맛이 느껴지지 않아요.”

나는 작곡에 대해서 잘 모른다.

하지만 내가 부를 노래니까, 이 정도 의견은 표출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 프로듀서도 오히려 내가 적극적으로 말을 해 주는 편을 더 좋아했다.

“그러면 장르를 바꿔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예를 들자면?”

“발라드라든지요.”

발라드라…….

“나쁘지 않은데요?”

최대한 많은 헌터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한 장르만 파면 안 된다.

‘이 중에 네 취향 하나 정도는 있겠지.’라는 전략으로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

첫 앨범에서는 댄스곡만 있었으니까.

두 번째 앨범은 발라드로 가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실제로 사람들 앞에서 라이브로 노래를 불러야 했던 프로그램에서 ‘나의 길’ 발라드 버전을 부르니 반응이 나쁘지 않았었다.

어쩌면 난 그때부터 다음 곡은 발라드로 내야겠다고 미리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최 프로듀서가 내가 들려준 의견을 수첩에 따로 정리해 뒀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사님이 원하시는 콘셉트에 맞춰서 멜로디 다시 뽑아 보겠습니다.”

“미안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많이 번거로우시죠?”

“하하, 아닙니다. 이게 제 일이니까요. 그리고 제가 만든 노래를 가수도 좋아해 줘야 그만큼 시너지가 발생한다는 게 제 신념입니다. 당연한 과정이니까 이사님께서 너무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역시. 이런 마인드를 가지고 있으니까 히트곡 제조기라는 별칭을 거머쥘 수 있었겠지.

최 프로듀서를 우리 쪽으로 데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럼 작업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도 스케줄 있으신가요?”

최 프로듀서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협회 쪽에 볼일이 있어서요.”

어제저녁, 아이리스를 집에 바래다준 뒤에 돌아가는 길에 협회장한테서 호출이 왔다.

내일 점심쯤에 잠깐 협회 좀 들를 수 있겠냐고.

문화체육관광부 쪽에서 제안이 온 게 있다고, 그거 들어 보고 가라고 했다.

‘귀찮네.’

나는 헌터로 활동하던 시절 때부터 정부와 엮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뭐랄까, 나를 정치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하는 모습이 자꾸만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만남을 싫어한다는 걸 협회장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 대신에 협회장이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곤 했다.

아마 이번 건도 그런 유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차를 끌고 협회로 향했다.

협회장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무실로 바로 직행했다.

나를 보자마자 정부 관계자들이 허리를 깊게 숙이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나 역시도 최대한 예의를 차리기로 했다.

나를 보자고 한 이유인즉슨.

“저희 쪽에서 이번에 강태오 씨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보려고요.”

“다큐멘터리는 저번에도 한번 찍었습니다만.”

“이번에는 태오 씨가 헌터로 각성했던 초창기 시절 때부터 그 일대기 전체를 다뤄 보려고 합니다. 공중파 채널에서 특별 편성으로 해서 2부작으로 제작해 보려고 합니다만.”

2부작이면 최소 1시간이 넘는 분량이다.

내 일대기에 그 정도 분량이 나오나 싶긴 하다.

그냥 각성하고, 몬스터 때려잡고 이게 다인데. 할 이야기가 있긴 할까?

내가 협회장을 바라보자, 협회장도 다큐의 필요성에 대해 열심히 어필했다.

“헌터들 중에서 아직 너에 대해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도 많이 있으니까. 헌터들에게 호감을 얻으려면, 우선 네가 어떤 사람인지 먼저 보여 줘야지.”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 가수의 스토리를 알고서 노래를 들으면, 와닿는 게 더 많아질 것이다.

나부터가 그랬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죠.”

내 허락이 떨어지자, 관계 부서 사람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면서 ‘해냈어!’라는 반응을 보였다.

내가 거절하면 어쩌나 많이 조마조마했나 보다.

그렇게 미팅을 끝낸 뒤, 바로 회사로 돌아갈까 고민하던 나는 잠시 다른 생각을 품었다.

‘온 김에 이철민 소장이나 잠깐 보고 갈까?’

어차피 이 소장은 낮이나 밤이나 연구소에 있을 테니까. 굳이 어디 가서 이 소장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연구소로 향한 나는 이철민 소장의 개인 연구실로 걸음을 옮겼다.

똑똑똑.

노크를 하자, 안쪽에서 이철민 소장의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연 순간, 나는 눈을 의심했다.

“데이브,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그러는 너야말로.”

데이브는 왜 하필이면 이때냐는 식으로 나를 노려봤다.

처음에는 데이브가 이철민 소장을 일부러 찾아온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데이브 씨는 제가 불렀습니다.”

“왜요? 이 녀석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습니까?”

내가 묻자, 이철민 소장은 오히려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태오 씨, 데이브 씨에 대해 알고서 HT 엔터테인먼트하고 계약 맺게끔 만들려 했던 거 아닙니까?”

“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 소장이 아무래도 나와 데이브에 대해 오해하고 있나 보다.

이 소장이 더벅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구나, 몰랐구나.’ 하는 혼잣말을 흘리던 이 소장이 우리에게 충격적인 말을 들려줬다.

“데이브 씨도 태오 씨와 같은 능력을 지녔다는 게 밝혀졌습니다.”

같은 능력이라면, 설마…….

“노래로 버프 줄 수 있다는 거요?”

“네, 그겁니다.”

이거 봐라.

사람 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른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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