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옛날이야기 (1)
아이리스는 아직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어를 이렇게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다.
나 때문이다.
내 모국이 한국이니까. 그리고 현재 거주하고 있는 구역도 한국이니까.
그래서 아이리스는 단 몇 주 만에 한국어를 완벽하게 흡수했다.
처음에는 한국어를 최대한 열심히 말하려고 했지만 발음 때문에 약간 어눌한 느낌이 나는 편이었다면, 이제는 머리만 금발인 한국인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발음이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주변에 한국인이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발음 교정까지 해낸 거야?”
“드라마 보고 노래 들으면서요. 리스닝이 뚫리니까 토킹은 자연스럽게 되더라고요.”
“그래? 부럽네.”
나는 공부 쪽에 소질이 없다.
예전부터 공부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다르다.
저렇게 보여도 이름 있는 대학교를 나왔으며, 수석 졸업까지 달성했다.
젊은 나이에 이미 석사, 박사 과정까지 마쳤을 정도로 매우 우수한 인재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모델 활동까지 겸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완성형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은 공평한 모양인지, 아이리스에게 단점 아닌 단점을 주고 말았다.
바로 나에 대한 집착이 심각하다는 거였다.
“오늘 우리하고 계약서 쓴다고 하니까 데이브는 뭐래?”
“언젠가 이날이 올 줄 알았다면서 마음대로 하라고 그러더라고요.”
“뭐, 그렇겠지.”
예상했던 반응이다.
데이브가 나한테는 까탈스럽게 굴어도, 여동생한테는 차마 그러지 못하니까 말이다.
물론 가끔씩 남매 싸움이 벌어지긴 하지만, 대부분은 데이브가 알아서 백기를 든다.
아이리스도 이걸 잘 알기에 적정선에서 오빠와 타협을 보곤 한다.
선을 막 넘진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런 남매 관계가 계속 유지되는 게 아닐까 싶다.
나는 우리 누나가 나를 너무 애기처럼 인식하고 있어서 싸울 일이 없다시피 하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아송 언니는 잘 지내시죠?”
“너무 잘 지내서 탈이야. 얼마 전에도 방송국에서 우연히 만나서 잠깐 이야기했는데, 그새를 못 참고 프로그램 하나 더 늘렸더라.”
“언니는 일 욕심이 많으신 거 같더라고요.”
“굉장히 많지. 그래서 내가 다 걱정이야. 나중에 한국에서 방송 활동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가 우리 누나 만나면, 나 대신에 일 좀 줄이라고 네가 말해 줘. 그래도 나보단 네가 말하는 게 더 효율적일 거 같아서.”
“제가요?”
“우리 누나, 귀엽고 예쁜 여동생들 엄청 좋아하거든.”
귀엽다는 말에 아이리스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저도 예쁜 언니 좋아해요.”
“우리 누나가 좀 예쁘긴 하지.”
남자들한테도 인기 많다고 들었는데.
정작 우리 누나는 결혼에 대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여서 좀 걱정이다.
언제까지 나 때문에 자기를 희생할 필요가 없는데 말이다.
나나 아이리스나, 서로 피곤한 오빠, 누나가 있어서 그런지 왠지 모를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오늘은 뭐 하고 싶어?”
“오빠는요?”
“나? 나는 아무거나 상관없어. 데이트하고 싶어 했던 사람이 원하는 걸 들어줘야지.”
계약서까지 써 줬는데, 오늘 하루만큼은 아이리스가 원하는 걸 다 들어줄 생각이다.
고민하던 아이리스가 내게 들려준 대답은 이러했다.
“그럼 한국 문화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것들로 소개해 주세요.”
미션명, This is Korea!
굉장히 어려운 임무가 하달되었다.
* * *
나는 외국에 굉장히 자주 나가는 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봤을 때에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문화가 뭔지, 외국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 어떤 걸 가장 궁금해하는지, 이런 것들을 매우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언컨대, 이건 오해다.
사실 나도 모른다.
왜냐.
외국을 나간 이유가 여행이 아니고 몬스터를 토벌하러 나간 거였으니까 말이다.
한가하게 여행지를 다닌다든지, 맛집 투어를 다닐 때가 아니었다.
만약에 그랬다간 오히려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을 것이다.
몬스터 토벌하러 온 놈이 자기 나라에 와서 먹고, 즐기고, 마시고 이러고 있으면 이 사람은 놀러 온 거냐고 엄청 따졌을 게 분명하니까.
실제로 그런 민원을 받은 적이 있었다.
사람들의 목숨이 달려 있는 중요한 일이니까.
그래서 협회 측에서도 웬만하면 나가서 노는 건 자제하라고 통보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뭘 즐기란 말인가.
아무리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사는 성격이라 할지라도, 이런 것까지 싸그리 다 무시하면서 다니진 않는다.
아무튼 이것 때문에 외국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내에서도 잘 돌아다닐 시간이 나지 않았다.
그나마 레이드 시대가 끝나서 자유의 몸이 된 다음부터 돌아다니기 시작했지.
아이리스를 데리고 어디를 갈까 고민한 끝에 택한 첫 번째 장소는 바로…….
“영화나 볼까?”
“영화요?”
“어, 세계 모든 나라의 영화관들이 다 똑같진 않을 거잖아. 한국 영화관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봐 봐. 아, 영어 자막은 안 나올 텐데…… 괜찮지?”
“네, 물론이죠.”
“잘됐네.”
혹시 몰라서 물어본 건데,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까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어떤 영화를 볼까 고민하다가, 최근에 미국에서도 극찬을 받았던 한국 영화, ‘너울’을 보기로 했다.
로맨스 영화로, 남자와 여자의 미묘한 심리 변화를 디테일하고 은유적으로 표현한 연출이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이끌어 냈다고 한다.
나는 아직 안 봐서 구체적으로 어떤 면이 좋았던 건지 잘 모른다.
이제부터 보면서 확인하면 되겠거니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상영관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2백 석이 넘는데 한 열 명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다들 학교에 있거나 직장에서 일할 시간이긴 하니까.’
사람이 없는 것도 충분히 이해한다.
그리고 오히려 관객이 적으면 나야 땡큐다.
사람들 눈치 볼 일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나나 아이리스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헌터다.
웬만한 사람들은 우리를 보자마자 누군지 바로 알아차릴 것이다.
특히 아이리스는 100퍼센트다.
안 그래도 머리색 때문에 눈에 굉장히 띄는데, 사람들이 못 알아볼 리가 없지 않겠나.
그나마 상영관 내에서는 어두운 환경 덕분에 사람들이 아이리스를 바로 알아보진 못했다.
반면, 아이리스는 사람들이 많이 없어서 아쉽다는 반응을 보였다.
“좌석이 꽉 차 있는 게 좋아?”
“네.”
“불편할 텐데.”
“근데 이유가 있어요.”
“이유? 뭔데? 지금 거 취소하고 상영관 바꿔 달라고 하게.”
“아니에요. 그러면 밥 먹기 애매해지니까 그냥 이대로 봐요.”
괜히 그 이유라는 게 궁금해졌다.
이렇게 말을 하는 거 보니까 별로 중요한 건 아닌가 본데.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좀 더 추궁해 볼까 했으나.
중간에 영상이 바뀌면서 영화의 시작을 알린 탓에 차마 말을 이어 갈 수 없었다.
그래, 일단은 영화에 집중하자.
* * *
영화가 끝난 뒤에 우리들은 바로 식사를 하러 밖으로 나왔다.
예상대로, 사람들이 우리를 보자마자 여기저기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이리스는 이 혼잡함을 오히려 반기는 사람처럼 손을 흔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저, ‘태오 오빠’하고 같이 밥 먹으러 가는 길이에요. 명심하세요. ‘태오 오빠’예요.”
누가 보면 무슨 유세 현장에 온 줄 알겠다.
그보다 왜 이렇게 나를 강조하는 거야?
주변을 살피던 아이리스가 갑자기 짧게 혀를 차면서 아주 작은 혼잣말로 불평불만을 토로했다.
“기자로 보이는 사람이 없네…… 있어야 스캔들 기사 터지고 그럴 텐데.”
그게 목적이었냐.
영화관에서도 일부러 스캔들 기사 내고 싶다는 이유 때문에 그런 반응을 보였나 보다.
어찌 보면 데이브보다 아이리스가 더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예전부터 내가 단골집으로 찍어 둔 삼겹살 가게에 도착했다.
가게 주인이 나를 보자마자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은 예쁜 여자 친구 데리고 왔구만.”
“어머머, 여자 친구라니요, 아이 참.”
말과 다르게 아이리스는 좋아 죽겠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 건 둘째 치고.
“저희, 밥 먹으러 왔는데요. 가급적이면 사람들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자리로 주실 수 있나요? 저번에 저하고 승훈이 형이 먹었던 그 자리요.”
“오케이. 상훈아! 여기 손님들, 1번 테이블로 안내해 줘라!”
직원의 안내를 받으면서 도착한 자리.
메뉴는 내가 적당히 주문하기로 했다.
어차피 아이리스가 메뉴판을 봐도 뭘 시켜야 좋을지 모를 테니까.
숯이 먼저 불판 아래로 들어가고, 그 위를 선홍빛 삼겹살들이 채우기 시작했다.
자글자글 익어 가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다.
아이리스가 긴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기면서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머리 묶고 올 걸 그랬네요.”
쌈장, 기름장, 된장찌개 등등.
여성의 긴 머리카락에 묻을 만한 함정거리들이 많이 도사리고 있었다.
“밖에서 하나 사 올까?”
“아니에요. 이걸로 하면 돼요.”
핸드백 안에서 작은 끈 같은 것을 꺼낸 아이리스.
눈을 감더니, 일순간 아이리스의 주변에 맴돌던 마나들이 팔찌에 깃들었다.
동시에 약한 바람이 가게 안을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설마 그거, 아이템이야?”
“네.”
아이템을 활성화시킬 때 나오는 특유의 열풍 때문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원래 아이템을 발동시킬 때에는 지난번에 나와 나빈이가 했던 것처럼 아이템 활성화에 대한 경고를 주변에 주는 게 FM이지만, 저번에도 말했듯이 귀찮을 때는 그냥 생략하기도 한다.
그리고 방금처럼 본인이 아이템 컨트롤에 자신이 있다면 굳이 안 하는 헌터들도 있다.
아이리스가 마력을 불어 넣자, 긴 끈이 고무줄처럼 길게 늘어났다.
“그건?”
“원래는 물건을 단단히 고정할 때 사용하는 아이템이에요. 사용하면 내구성을 올려 주는데, 인체에는 무해해요.”
“머리카락이 막 딱딱해지거나 그러진 않겠지?”
“제가 한번 해 봤는데, 머리카락은 멀쩡하더라고요. 그래서 오늘처럼 머리끈 잊어버렸을 때 대신 사용하고 있어요.”
머리 끈은 잊을지언정, 아이템 챙기는 건 잊지 않는 아이리스.
헌터다운 자세다.
직원이 직접 와서 고기를 구워 주기 시작했다.
다 구워진 삼겹살 일부는 나와 아이리스 앞에 놓인 접시 위에 올려놨다.
아이리스가 젓가락을 들고선 내게 물었다.
“뭐 찍어서 먹으면 돼요?”
“소스하고 기름장, 쌈장. 셋 중에 취향에 맞는 거 먹으면 돼.”
젓가락질도 곧잘 하는 아이리스였기에 먹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어 보였다.
이 가게가 자랑하는 특제 소스를 가장 먼저 택한 아이리스.
“어머, 맛있네요!”
“그렇지?”
“예전에 저하고 태오 오빠가 처음 만났을 때 상대했던 그 돼지처럼 생긴 몬스터가 떠올라요.”
여기서 갑자기 몬스터가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하여간 아이리스는 참…… 비위도 좋다.
“오빠, 그때 기억나요?”
밥 먹는 중이라서 안 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렇다고 추억 보따리를 풀어 보려고 하는 아이리스 앞에서 기억이 안 난다고 거짓말을 하기엔 양심이 너무 찔렸다.
“물론 나지.”
“만약에 그때 오빠가 저 구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지금 저는 이 세상에 없었을 거예요.”
고기를 구워 주던 직원이 아이리스의 말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가요?”
“듣고 싶으세요?”
“네!”
직원 양반이 누르지 말았어야 할 스위치를 눌러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