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1지망 (3)
그동안 연예계 활동에 집중하느라 미국에서 벌어졌던 몬스터들과의 전투에 대해서도 아직 제대로 보고를 받지 못했다.
대략적인 소식은 들었지만, 정보량이 어디까지나 일반인이 접할 수 있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철민 소장과 잠시 잡담을 나누는 사이, 협회장이 일정을 마치고 우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어, 태오야, 왔구나.”
“많이 바쁘신가 보네요, 협회장님.”
“정신없지. 저번에 미국하고 공동성명 발표한 이후부터는 특히나 더 바빠진 거 같아. 아, 미국 쪽에서 받은 데이터들, 확인했어?”
“이철민 소장한테서 대충 들었습니다. 자료는 뭐…… 나중에 집에 가서 천천히 살펴보려고요.”
“어차피 말로만 그럴 거지, 안 볼 거잖아.”
“저에 대해서 너무 잘 아시는 거 아닙니까?”
아니면 내가 알기 쉬운 사람이라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차례 크게 웃은 협회장이 이번에 미국을 습격했던 몬스터들에 대해 알려 줬다.
“오페니드였어. 어떤 몬스터인지 너도 알지?”
“네, 알죠.”
거대한 박쥐 형상을 한 비행 타입의 몬스터로, 음파를 이용해 적들에게 상태 이상을 거는 놈들이다.
“태오 네 추측대로 이번에도 소리에 관련된 몬스터가 나온 셈이지.”
당시 협회 관계자들 앞에서 브리핑을 했을 때, 세이렌처럼 음파를 주 무기로 사용하는 몬스터들의 비중이 더 클 거라고 했었다.
이 가설이 그대로 적중한 것이다.
“덕분에 협회 내에서도 네 의견에 대해서 힘이 실리기 시작했어. 각국의 정상들도 그렇고.”
“다행이네요.”
“아직 사례가 많지 않다는 게 좀 신경 쓰이긴 하지만, 그래도 네 노래가 헌터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건 이제 확실히 증명되었으니까. 가수 활동은 어때, 잘되어 가고 있지?”
“네.”
“이러다가 글로벌 톱스타 되는 거 아니냐?”
“글쎄요. 모르죠.”
연예계에서 활동하면서 내게 한 가지 습관 같은 게 생겼다.
겸손 차리기.
협회장도 이걸 알아차렸는지, 다시 한번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래, 열심히 활동하고. 그리고 저번에 나한테 준 한정판 앨범 있잖아. 남은 거 있으면 또 줄 수 있을까? 사인도 같이 해 줘. 우리 조카딸들이 너 엄청 좋아하거든.”
“그러면 여러 개 준비해야겠네요. 더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하하! 그래, 그래.”
예전에는 등급 높은 몬스터가 나타났으니까 네가 좀 나서 줘야겠다는 부탁이 대부분이었는데.
이제는 이런 부탁이 일상으로 변했다.
이런 걸 볼 때마다 확실히 시대가 많이 변했음을 느낀다.
이철민 소장이 ‘어흠!’ 하고 헛기침 소리를 내면서 화두를 전환했다.
“방금 태오 씨의 신곡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신곡?”
“예. 오늘 오전에 협회장님께도 보고드렸던 그 내용입니다만.”
“아, 그랬지. 같은 노래를 반복적으로 들으면 버프 효과가 떨어지니까 주기적으로 곡을 바꿔 가면서 들을 수 있도록 신곡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였었나?”
“예, 그렇습니다. 아주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역시 우리 협회장.
기억력이 좋구만.
“다음 신곡 작업은 하고 있어?”
“아니요. 오늘 가서 직원들 모아 가지고 미팅 한번 해 보려고요.”
“그래. 앨범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뚝딱하고 나오는 건 아니니까. 나야 뭐…… 아예 모르는 분야다 보니까 도움이 될 만한 조언 같은 건 못 해 주겠지만, 그래도 네 노래를 여기저기 홍보할 수 있게끔은 해 줄 테니까 좋은 노래로 뽑아 봐라.”
“네, 알겠습니다.”
헌터들에게 내 노래를 익숙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협회장까지 나서서 마케팅을 도와주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번에 바슬라 엔터테인먼트 뒷조사할 때처럼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 이 소장, 또 할 말 없지?”
“네, 신곡 이야기가 메인이었으니까요. 더 할 말은 없습니다.”
“오케이. 그럼 일정이 있어서 나 먼저 가 볼게. 고생해라, 태오야. 이 소장도.”
“들어가세요, 협회장님.”
협회장이 자리를 뜨자마자 이 소장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요즘 특히나 더 바빠 보이시더군요.”
“협회장님이요?”
“예, 나중에 정계라도 진출할 생각인지,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러 다니는 걸 보니 레이드 시대 때보다 훨씬 바쁘게 움직이시는 거 같습니다.”
“뭐, 슬슬 각자도생을 해야 하니까요. 이 소장님도 뭐 준비하고 있는 거 있습니까?”
“저는 몬스터 토벌로 얻은 아이템 기술들을 현대 과학하고 어떻게 융합시킬 수 있을지 연구해 볼까 합니다. 안 그래도 요즘 제 연구에 관심을 보이는 투자자들이 많이 있더라고요.”
기업들은 늘 신기술을 원한다.
신기술을 선점하는 자가 혁신을 주도하는 법이니까.
그렇다 보니 이 소장이라는 인물을 탐내는 것이다.
몬스터, 헌터 그리고 아이템에 관해서는 이 소장만큼 전문가도 없을 테니까.
“새로운 각성자들은 이제 안 나오고 있다고 했죠?”
“예, 게이트가 사라졌으니까요.”
몬스터와 게이트의 존재, 그리고 동시에 각성 능력이 사람들에게 발현되는 이유 역시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나마 가장 신빙성이 있는 가능성은 ‘게이트의 영향으로 인해 차원의 힘이 넘어와 선택받은 인간에게 각성 능력을 강제로 심어 주고 있다.’였다.
이 가설을 제시한 사람 역시 눈앞에 있는 이철민 소장이다.
“게이트가 사라진 이후부터 각성에 눈을 뜬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이 소장님 가설이 제대로 적중했네요.”
“모릅니다. 그저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으니까요. 대신에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이 소장이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새로운 헌터들의 유입이 사라진 지금, 현재 각성 능력을 가지고 있는 헌터들의 존재 가치가 더욱 올라갈 거라는 사실 말이죠.”
나에게는 나쁘지 않은 소식이다.
이 소장이 내게 한 가지를 더 추가해서 물었다.
“지나가다가 우연히 들은 거긴 합니다만, 요즘 데이브 씨하고 자주 만나십니까?”
“예. 제가 데이브를 HT 엔터테인먼트로 데려오고 싶어서요.”
“그렇군요. 꼭 성사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뒤, 이 소장은 자신도 해야 할 일이 생겼다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짧은 미팅이 끝난 뒤.
차로 돌아온 나는 이 소장이 방금 했던 말을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꼭 성사되었으면 좋겠다고? 데이브와 계약하는 게?”
이 소장이 남의 일에 이렇게 많은 관심을 드러낼 때가 있었나 싶다.
* * *
HT 엔터테인먼트에 특별한 손님이 찾아오는 날이다.
데이브의 여동생, 아이리스.
금발의 미인이 회사에 얼굴을 비친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절로 화사해졌다.
오늘은 아이리스가 우리 회사와 정식으로 계약서를 쓰는 날이다.
계약 담당하고 나, 이렇게 두 명만 있어도 괜찮은 자리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양석정 팀장, 최용하 프로듀서, 홍수홍 실장, 그리고 마진수 트레이너까지.
“많이들 오셨네요. 요즘 다들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가 보네.
아니면 내가 헛것을 들었든지.
내 지적에 사람들의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바쁩니다. 근데 마침 시간이 나서요.”
“마, 맞습니다, 하하!”
누가 봐도 거짓말이다.
아이리스를 직접 실물로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다는 걸 누가 모를 줄 아나.
아이리스는 한때 대한민국에서 거의 컬트적인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예쁘고, 몸매도 좋고, 그리고 헌터로서 S랭크도 찍었으니 강하기까지 하다.
예쁜 여성이 몬스터들을 때려눕히고 다니는데, 싫어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래서인지 아이리스는 미국 본토를 넘어서 전 세계적으로 상당히 많은 팬들을 거느리고 있다.
우리 착한 후배인 나빈이도 나름 한가락 하긴 하지만, 나빈이의 경우에는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인기가 많은 편이고, 아이리스는 세계 무대에서 노는 클라스다 보니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이 수두룩한데도 불구하고 직원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든 것이다.
그렇다고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니들 알아서 하라는 심정으로 가만히 놔두기로 했다.
“전 소속사와는 미리 정리된 거 맞지?”
혹시 몰라서 아이리스에게 확인차 물었다.
아이리스는 나에 관한 일이라면 일단 저지르고 보는 성격이다.
그래서 전 소속사와 미리 협의도 안 된 상태에서 우리와 계약서를 쓰려는 건 아닌지, 이런 걱정이 덜컥 들었다.
그러면 이중계약이 되고, 곤란해지는 건 아이리스가 될 테니까 말이다.
아이리스는 싱긋 미소를 보내면서 당당히 말했다.
“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오빠. 그리고 HT 엔터테인먼트가 생긴 이후부터 제 마음속 1지망 업체는 늘 여기였어요. 그래서 언제든 이적할 수 있도록 항상 준비를 해 뒀으니까, 마음 놓으세요.”
이렇게 말해 주니까 고맙긴 하다.
그런데 늘 1지망이었다고 한다면.
“왜 처음부터 나한테 말 안 해 준 거야?”
“아, 처음에는 오빠 혼자서 활동하려는 목적으로 HT 엔터테인먼트를 만든 줄 알았거든요. BOO는 아무래도 헌터 매니지먼트 업체니까. 이래저래 제약이 많을 거 같아서 오빠만을 위한 1인 기업이라고 제멋대로 착각했었어요.”
최근에 해피모드의 이적 기사를 보고 자신의 생각이 오해였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원래는 해피모드보다 우준이기 먼저긴 했는데.
우준이의 경우에는 거의 무명에 가까운 가수였다 보니 기사가 많이 나간 것도 아니고. 그래서 아이리스가 눈치채는 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던 거 같다.
“오빠네의 처음을 가져가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그래, 아쉬운 거 다 이해하는데, 남들이 오해할 만한 말은 좀 자중해 줄래?”
안 그래도 사람도 많은데.
이러다가 아이리스하고 스캔들이라도 터지면 곤란하다.
아마 데이브가 칼 들고 나를 쫓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데이브와의 계약은 물 건너갔다고 보는 게 좋다.
계약 담당자가 계약 조항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려고 했지만.
“괜찮아요.”
아이리스가 그럴 필요 없다고 먼저 답했다.
“제 조건은 이미 말씀드렸거든요. 그러니까 그냥 바로 사인할게요.”
“말씀……드렸다고요?”
담당자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작게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게 바로 마지막 장으로 향한 아이리스가 펜을 들고 자신의 사인을 적어 넣었다.
이것으로 계약 완료.
“그러면…….”
아이리스가 나를 향해 눈웃음을 보냈다.
마치 자기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오빠가 한번 맞혀 보라는 듯한 그런 반응이었다.
작은 한숨을 몰래 삼킨 나는 억지로 웃으면서 어깨를 한 차례 으쓱였다.
“계약 조건, 지금 바로 이행해 달라는 뜻이지?”
“네, 맞아요.”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나 때문에 미국에서의 활동을 접고 한국까지 넘어왔는데.
이제 와서 없던 이야기로 돌릴 수는 없다.
상대가 나한테 신뢰를 보내는 만큼, 나 역시 그에 합당한 모습을 보여 줘야 하니까 말이다.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아이리스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오케이, 데이트 가자.”
내 말에 주변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경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