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잘못된 만남 (3)
깔끔하게 디자인되어 있는 인테리어.
느낌 자체는 상당히 좋다.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오른 나빈이가 주변을 여러 차례 둘러보면서 말했다.
“이런 아파트도 좋아 보이네요.”
“아파트로 이사하게?”
“아니요. 언니가 아파트 싫어해서 이사는 안 갈 거 같아요.”
나빈이네도 나와 마찬가지로 따로 단독주택을 지어 살고 있었다.
나는 몬스터가 나오면 낮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바로 뛰쳐나가야 했기에 아파트가 아니라 단독주택에서 사는 게 훨씬 편했다.
지금이야 아파트로 이사해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살던 곳이 편했다.
그래서 나도 이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단지 이런 아파트는 어떨까 하는 단순한 호기심만 들 뿐.
나빈이가 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선배님 재력이라면 그냥 아파트 하나 매입해서 잠깐 생활해 보셔도 괜찮지 않나요?”
“우리 누나가 나한테 늘 하던 말이 있거든. 백 원이든 백억이든 액수만 다를 뿐, 결국 ‘돈’이라는 동일한 카테고리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다 같은 돈이니까 금액에 상관없이 절약할 줄 아는 습관을 기르래.”
“아송 언니 성격이라면, 확실히 그렇게 말하고도 남겠네요.”
나빈이도 우리 누나와 자주 만났던 적이 있기에 이렇게 말을 할 수 있었다.
도착했음을 알리는 띵! 소리에 이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2101호.
아파트에서 내려서 몸을 왼쪽으로 돌리니 바로 현관문이 나타났다.
우리가 먼저 벨을 누르기도 전에 알아서 현관문이 열렸다.
센스 있게 먼저 문을 열어 준 진주 씨가 우리를 반겼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빈이가 여기 오기 전에 사 온 집들이 선물을 먼저 건넸다.
“안녕하세요. 이거, 선물이에요.”
“어머나! 고마워요. 안 그래도 언니들이 과일 먹고 싶다고 했었는데.”
“그래요? 타이밍이 좋았네요.”
나도 집들이로 가져온 선물이 있긴 했지만, 진주 씨한테 선뜻 건네줄 수가 없었다.
매우 크고 무거운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진주 씨가 혼자서 들 만한 물건은 절대로 아니다.
“저도 선물 가져왔는데, 무거우니까 제가 들고 있을게요.”
“아, 네. 그러면……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우리를 집 안으로 안내하는 진주 씨.
안으로 들어서자, 부엌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겨 왔다.
멤버 중 몇 명이 우리를 위해 직접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를 하는 중이었다.
“어머머, 안녕하세요!”
“처, 처음 뵙겠습니다!”
“태오 씨, 실물이 훨씬 잘생기셨어요!”
걸 그룹 멤버들이 나를 보면서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한 번에 여덟 명이나 되는 아이돌과 마주하니까 내가 다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다들 성격이 발랄하고 쾌활한 탓에 말도 많았다.
여기서 말하면 저기서 말하고. 또 저기서 말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멤버가 그 말을 이었다.
이렇게 말하기엔 좀 그렇지만.
‘몬스터들하고 전투를 벌일 때만큼이나 정신이 없네.’
그냥 내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느껴진다는 뜻이다.
* * *
숙소를 방문하자마자 내 눈에 먼저 띈 게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숙소 여기저기에 설치되어 있는 무인 카메라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거, 저 아닙니까?”
내가 기자들 앞에서 전투복을 입은 채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거실 한쪽 구석에 걸려 있었다.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내 소속사인 BOO에서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던 나를 대상으로 만든 각종 굿즈들을 만들어 낸 적이 있었다.
물론 나는 별 관심 없었다.
내 주머니에 수익률의 일부가 꽂히긴 했지만, 당시에 내 벌이로 따졌을 때에는 굿즈를 팔아서 벌어들인 수익이 푼돈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굿즈가 엄청 안 팔렸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찍어 내는 족족 매진 행렬을 이어 갔다.
대한민국 국민들만을 대상으로 판 것도 아니고, 전 세계인들을 대상으로 한 장사였으니까.
당연히 수익이 어마어마했다.
그런 와중에도 특히나 구하기 어려운 굿즈들이 있었다.
선반에 진열되어 있는 파란색의 캡 모자가 그렇다.
“이거, 제가 헌터 초창기에 한창 쓰고 다녔던 모자를 따서 만든 굿즈였는데, 이걸 실물로 보는 건 오랜만이네요.”
딱 5백 개만 한정으로 팔렸던 굿즈다.
우리나라에 몇 개 없는 것으로 아는데, 설마 걸 그룹 숙소에서 이걸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멤버들이 진주 씨를 가리키며 말했다.
“진주가 모은 거예요.”
“여기에 있는 거 전부 다요?”
“아니요. 멤버들 소장품도 각각 섞여 있어요. 그중에서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건 진주지만요.”
내 팬이었다는 건 지난번 촬영 때 들어서 알긴 했는데,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다.
나빈이가 무의식적으로 혼잣말을 흘렸다.
“선배님 엄청 좋아하시나 보네요.”
좋아한다는 말에 진주 씨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시키기 위해서인지, 진주 씨가 우리와 멤버들을 독촉했다.
“시, 식사하셔야죠! 태오 씨하고 나빈 씨 배고프시겠다. 이, 이쪽으로 와서 앉으시면 돼요!”
부끄러워하는 건가.
다먹소 녹화 때에도 그러더니만.
그래도 귀여우니까 괜찮다.
* * *
오랜만에 누군가가 만들어 주는 음식을 먹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여기에 맛까지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라 할 수 있다.
해피모드 멤버들 중에서 연장자 라인들이 요리를 잘한다고 듣긴 했었는데, 이 정도로 맛있을 줄은 몰랐다.
진심으로 감탄하는 우리를 보면서 해피모드의 리더이자 메인 보컬을 맡고 있는 연해 씨가 말했다.
“저희 언니들, 예전에 요리 대결 프로그램에 나가서 우승까지 한 적 있거든요. 그래서 시청자들 사이에서 엄청 유명해요.”
“우승했다면야 안 유명해질 수가 없겠네요.”
“근데 그런 것치고는 언니들이 요리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생각보다 많지 않거든요.”
하긴, 충분히 이해한다.
멤버들의 직업은 요리사가 아니라 아이돌이니까.
무대 위에 서서 춤추고 노래하는 게 이들의 업인데, 언제 부엌에 들어가서 요리하겠나.
해 봤자 이렇게 숙소 내에서 멤버들끼리 차려 먹을 때 정도가 다일 것이다.
“선배님 따라서 여기 오길 잘했네요.”
나빈이가 내 속마음까지 같이 표현을 해 줬다.
나도 처음에 진주 씨한테 출연 요청 부탁을 받았을 땐 긴가민가했었는데.
이런 호강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식사를 대충 마무리 짓고 난 뒤.
해피모드의 막내 멤버, 다진 씨가 내게 물었다.
“근데 저희 집들이 선물로 가져오셨다는 저 물건은 어떤 거예요?”
아까부터 거실에 비스듬하게 세워진 채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집들이 선물이 굉장히 신경 쓰이는 모양인가 보다.
딱 봐도 평범한 물건처럼 보이진 않을 것이다.
공개하기 이전에 멤버들에게 먼저 생각을 물었다.
“어떤 물건처럼 보입니까?”
멤버들의 추측을 들어 보자면.
“서핑 보드 아닌가요?”
“골프채가 들어 있는 골프 가방?”
“아니야, 아니야. 내가 보기에는 옷 같아.”
“그래? 근데 옷치고는 너무 크지 않아? 심지어 무겁기까지 하잖아. 마치 돌기둥 같아 보이던데.”
마지막에 의견을 제시한 연해 씨의 추리가 가장 날카로웠다.
“별건 아니고요.”
방송각 충분히 만들어 줬으니까.
슬슬 공개할 때가 된 거 같다.
천을 한꺼번에 촤락! 걷어 젖혔다.
그러자 멤버들의 놀라는 표정이 생생하게 보였다.
“이, 이게…… 뭐예요?”
“아, 이거 말입니까.”
성인 키만 한 철판때기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알고 보면 대단한 물건이다.
“제가 초기에 헌터로 활동할 때 쓰던 대형 방패 아이템입니다.”
“아이템……이요?”
“예.”
아이템은 상당한 고가에 거래된다.
그중에서도 특히 내가 썼던 아이템의 경우에는 그 값어치를 더 높게 인정받는 경우가 많다.
“제가 썼다는 증거들도 많이 있으니까, 잘 진열해 두시면 됩니다.”
진주 씨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겨우 제정신을 차린 모양인지 방패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이거, 엄청 비싼 거 아닌가요?”
“비싸다고 하면…… 네, 그렇죠.”
최근에 들었던 제시가가 여기 아파트의 매매가 두 배 가격 정도 된다.
수십억에 육박하는 아이템 시세에 멤버들은 다시 한번 경악했다.
“이런 귀한 물건을 저희들한테 주셔도 되나요? 정말로?”
“어차피 저는 이제 안 쓰는 아이템이니까요. 그리고 이런 거, 저희 집에 많이 있습니다. 안 그래도 레이드 시대도 끝났고. 그래서 지인들에게 하나씩 선물로 나눠 드릴까 했었으니까 부담 가지지 마시고 받아 주세요. 아니면 너무 크니까 작은 걸로 바꿔서 드릴까요?”
내 말에 멤버들이 고개를 격하게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어렵게 여기까지 가져오셨는데, 바꿔 달라고 하면 염치없죠!”
“감사합니다, 태오 씨. 소중하게 보관할게요.”
생각지도 못한 고가의 선물로 인해서 멤버들은 한동안 어안이 벙벙한 얼굴 표정을 유지했다.
반응을 보니까 역시 가져오길 잘했다는 보람이 느껴졌다.
* * *
숙소에서의 녹화가 끝나고.
나와 나빈이는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카메라가 꺼진 사이, 멤버들이 다시 한번 내게 고마운 마음을 드러냈다.
“평생 가보로 간직할게요, 태오 씨!”
“네, 진짜로요!”
가보까지야 뭐.
“다들 바쁘실 테니까, 관리하기 좀 힘들다 싶으면 소속사에 말해서 대신 관리해 줄 사람 구해 달라고 하셔도 됩니다.”
소속사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뭐라고 해야 좋을까, 소속사는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아 하는 그런 반응이었다.
“그쪽에다가 이 아이템을 맡기면…… 분명 팔아먹을 거예요.”
“맞아. 여기서만 하는 이야기인데, 우리 이사님 완전 나쁜 사람이거든요.”
소속 가수가 업체 간부직에 있는 사람을 보고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
갑자기 궁금증이 들었다.
“숙소도 좋고, 그래서 저는 소속사가 여러분들에게 나름 잘해 준다고 생각했는데.”
“겉보기에만 그래요. 진주야, 너도 한마디 해 봐.”
말을 아끼고 있던 진주 씨의 입에서 처음으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사님이 보여 주기식을 엄청 좋아하시거든요. 저희가 사는 곳만 좋지, 계약서도 불공평 그 자체고…… 저희 데뷔하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정산 못 받았어요.”
“예? 그게 가능합니까?”
“가능하긴 하더라고요.”
대체 얼마나 불공정한 계약서를 작성했기에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럼 소속사를 옮기시면 되지 않습니까?”
“저희도 그러고 싶은데, 그것도 내부적으로 문제가 좀 있어서 쉽지가 않더라고요.”
아마 멤버들의 이적까지도 고려해서 계약서를 작성했겠지.
원래 머리 나쁘면 악당 역할도 못 하는 법이니까 말이다.
이쯤 되니, 그 이사라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졌다.
“혹시 그쪽 이사님, 성함이 어떻게 됩니까?”
“장수복 이사님이에요.”
“장수복……이요?”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인데.
가만.
‘나 연습생 시절 때 실장으로 일했던 사람 이름하고 똑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