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라를 구한 톱스타-46화 (46/250)

제13장. 잘못된 만남 (2)

데이브도 안 되고, 아이리스도 안 되고.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빈이한테 전화를 해 본 건데.

-네, 가능해요.

“진짜?”

나이스.

역시 우리 착한 후배밖에 없다.

-근데 무슨 방송인데요?

“아니, 뭐 별건 아니고, 예전에 내가 드래곤 쓰러뜨리고 본격적으로 방송 출연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나갔던 프로그램이 하나 있거든.”

-레이드 시대 끝나고 선배님이 처음으로 출연했던 방송 말씀하시는 거죠? 도정수의 미팅 타임이요.

“그걸 다 기억하고 있어? 아니, 그걸 봤어?”

-네. 선배님이 혹시나 또 우쭐해지셔서 협회장님이 말씀하지 말라는 거 말할까 봐 계속 모니터링했었어요. 녹화 때에는 그래도 실수 안 하고 잘하신 거 같던데요.

가끔 나빈이가 후배인지, 아니면 헌터 기본 교육 과정을 수료할 때 나를 가르치던 교관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그래도 이게 다 나한테 관심이 있으니까 그런 거겠지. 만약 관심도 없다면, 애초에 내가 출연한 방송을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데이브처럼 말이다.

-그럼 도정수의 미팅 타임에 출연하자는 걸로 전화 주신 거예요?

“아니, 나 그때 나왔을 때 보조 MC 맡았던 걸 그룹 멤버 있거든, 이진주 씨라고. 저번에 ‘다먹소’ 녹화할 때 오랜만에 만났는데, 얼마 뒤에 ‘스타 관찰기’에 그룹 전체가 출연한다고 해서. 그래서 내가 그쪽 숙소로 한번 놀러 가기로 했어.”

-이진주 씨라면…… 해피모드 아니에요?

“잘 아네.”

-나름 유명한 걸 그룹이니까요. 근데 거기 멤버분이 직접 선배님한테 숙소 놀러 오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정말로?

“그럼 가짜겠냐.”

아무리 나라도 허락도 없이 여자들만 사는 숙소에 쳐들어가지는 않는다.

그랬다간 나라를 구한 영웅이고 뭐고,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것이다.

잠시 뜸을 들이던 나빈이가 이내 알겠다고 답을 했다.

-그럼 저도 선배님이랑 같이 그분들 숙소로 가면 되는 거죠?

“어, 아무래도 남자인 나 혼자만 가기에는 좀 그러니까.”

‘스타 관찰기’는 리얼 관찰 예능을 표방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거의 대부분의 관찰 촬영은 스태프 없이, 무인 카메라를 통해서 진행한다.

해피모드 숙소에서의 촬영 역시 이런 방식으로 진행된다고 들었다.

스태프들도 없이, 8인조 걸 그룹 숙소를 남자인 나 혼자 들어간다는 건 아무래도 좀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나빈이한테 SOS를 요청하기로 한 거였다.

나빈이도 내 심정을 이해하는 모양인지, 별다른 고민 없이 알겠다고 답했다.

-날짜하고 장소 알려 주세요.

“그럴 필요 없이, 내가 네 번호 그쪽 작가한테 넘겨줄 테니까, 직접 한번 만나 보고 이야기를 나눠 봐. 시간은 많지?”

-네. 게이트가 없어진 덕분에 한가해요.

“뭐, 요즘 헌터들이 다 그러니까. 그럼 말 잘 나눠 봐.”

-네, 선배님. 들어가세요.

나빈이 덕분에 고민이 말끔히 사라졌다.

그래도 해피모드 숙소는 처음 들르는 건데.

‘집들이 선물이라도 사 가는 게 좋겠지?’

무엇을 사 갈까?

방송이니까 평범한 것 말고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선물을 주고 싶은데.

고민에 휩싸였던 내 눈에 마침 선물로 주기 딱 적합한 물건 하나가 들어왔다.

“좋아, 너로 정했다.”

벌써부터 촬영일이 기다려진다.

* * *

‘스타 관찰기’ 해피모드 편을 촬영하기 위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외출 채비를 갖췄다.

최대한 자연스러운 복장으로 와 달라는 스태프의 요구 조건에 부응하고자 드레스룸에 있는 캐주얼한 옷가지들만 꺼냈다.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옷들을 한 번씩 내 몸 위에 올려놓았다.

“무난하게 입을까?”

화이트 톤의 면바지에 베이지색 반팔 티.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스켈레톤 디자인의 오토매틱 시계까지.

“이 정도면 되겠지?”

황 PD와 이야기를 나눠 보니, 방송이라 할지라도 가급적이면 인위적인 장면들을 최대한 배제하는 그런 스타일의 방송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런 자연스러움이 시청자들에게 어필이 잘된 덕분에 ‘스타 관찰기’가 시청률이 잘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황 PD 나름의 비결과 방식이 있는데, 내가 불편하다고 거기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어디까지나 정당한 출연료를 받고 일하는 연예인이니까 말이다.

승훈이 형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거기까지 가면 아까 내가 말했던 작위적인 모습이 연출될 우려가 있다.

그래서 집에서 나올 때에도 나는 내 차를 직접 끌고 가기로 했다.

운전석 앞과 보조석 쪽에 달려 있는 여러 개의 카메라들.

‘녹화는 되고 있겠지?’

불빛이 점등식으로 들어오는 걸로 봐선, 작동은 제대로 되고 있는 거 같다.

이대로 차를 운전해서 나빈이가 있는 곳까지 가면 된다.

나빈이는 유빈 씨하고 같이 살고 있다고 기억한다.

그렇다면.

‘내가 이대로 나빈이 사는 집에 가면, 유빈 씨도 보는 건가?’

아니지, 바쁜 사람이니까 못 볼 가능성이 크다.

……라고 30분 전에 생각했었는데.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달랐다.

“안녕하세요, 태오 씨!”

나빈이를 배웅하기 위해 나온 유빈 씨가 환하게 웃으면서 내게도 인사를 건넸다.

나보다도 더 편안한 복장으로 잠시 나온 유빈 씨를 향해 나빈이가 버럭 화를 냈다.

“나오지 말라니까!”

“뭐 어떠니, 모처럼 태오 씨도 왔는데 인사라도 해야지.”

참고로 카메라는 차에만 달려 있다.

그걸 유빈 씨도 들었는지, 차 가까이는 접근해 오지 않았다.

거의 잠옷이라 할 수 있는 옷차림으로 카메라 앞에 설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우리 나빈이, 잘 부탁드려요.”

“네, 알겠습니다.”

“오늘 녹화도 힘내시고요.”

뭐랄까, 언니 동생 사이가 아니라 엄마와 딸 사이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유빈 씨를 보고 있자니 우리 친누나가 절로 떠올랐다.

정작 나와 유빈 씨는 동갑인데도 말이다.

차에 올라타기 전에 나빈이가 유빈 씨에 대해 말했다.

“근데 선배님, 저희 언니하고 말 놓기로 하셨다고 들었는데, 아닌가 보네요?”

“원래는 그랬었는데, 카메라 달려 있는 차가 있어서 일부러 존댓말 썼나 봐. 혹시 모르니까.”

“아, 그렇겠네요.”

한 치도 방심하지 않는 모습.

이런 걸 보면 확실히 짬이 느껴지긴 한다.

나 같으면 그런 거 상관 않고 그냥 편하게 말했을 텐데 말이다.

짧은 치마를 입은 나빈이를 위해서 뒷좌석에 챙겨 둔 무릎 담요를 건넸다.

그러자 나빈이가 수줍게 미소를 지으면서 내게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센스 있으시네요, 선배님. 설마 저 말고도 이런 식으로 여자들 많이 태웠던 건 아니죠?”

“걱정하지 마. 이 차에 탄 여자는 네가 처음이니까.”

“아송 언니는요?”

“바빠서 내 차 탈 일이 없었어.”

“하긴, 그렇겠네요. 아송 언니, 요즘 TV 틀면 안 보이는 곳이 거의 없더라고요. 프로그램 엄청 많이 맡아서 하시나 봐요.”

“내가 그렇게까지 열심히 일 안 해도 된다고 매번 잔소리하는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더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우리 친누나가 내 부모이자 우리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누나는 잠시도 쉴 틈 없이 계속해서 일을 했다.

돈을 벌어야 우리가 먹고살 수 있으니까.

내가 연습생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이유도 다 누나의 지원 덕분이다.

이제는 내가 누나를 편하게 해 주고 싶은데, 정작 누나는 아직도 젊다는 이유로 한창 아나운서 일을 할 때보다 더 많은 일을 소화하고 있었다.

“하여간 우리 누나는 일 욕심이 너무 많아서 탈이야.”

“선배님도 그렇지 않아요?”

“내가?”

“레이드 시대 끝나고, 돈도 많이 버셨고 명예도 있으시니 놀고먹으면서 쉬실 수 있으셨을 텐데도 이렇게 연예계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계시잖아요. 저야 오늘처럼 일이 있을 때만 나오지만, 선배님은 이제 연예인 다 되신 거 같아요.”

하긴, 나빈이 말이 맞다.

집에서 가만히 쉬고 있으니까 좀이 쑤셔서 죽을 맛이었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이 부지런함은 아마 집안 내력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저건 뭐예요?”

나빈이가 뒷좌석에 놓아둔 커다란 물건 하나를 가리켰다.

천으로 둘둘 싸 둬서 무슨 물건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저거? 집들이 선물.”

“선물치고는 뭔가 엄청 본격적인 물건 같은데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예술품이지.”

해피모드 멤버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목적지까지 20분 정도 남았을 때.

나빈이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뉴스 보셨어요, 선배님?”

“어떤 뉴스?”

“미국에서 몬스터들이 나타났다는 거요.”

뉴스 이전에 나는 협회한테 직접 그 소식을 들었다.

아마 나빈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러 뉴스를 통해 들은 것처럼 말을 꺼냈다.

카메라가 우리들의 대화를 찍고 있으니까. 이게 이유였다.

“세 차례 정도 전투가 벌어졌다고 그러더라고요.”

“세 번 다 대승이라는 말도 들었어.”

“선배님 노래 덕분이라던데요?”

미국에서 펼쳐진 세 번의 전투 덕분에 헌터들 사이에선 벌써부터 내 노래에 대한 소문이 무성하게 퍼졌다.

노래 덕분에 버프를 받아서 전투력이 상승되었다고.

아마 협회 측에서도 조만간 이에 대해 공식으로 안내문을 내려보낼 것이다.

조사 중이기는 하지만, 내 노래가 헌터들에게 이로운 효과를 부여한다는 게 어느 정도 증명이 되었다고.

이미 협회장이 직접 자료도 준비해 뒀다.

한참 전에 밝혀진 내용이었지만, 우리는 이것을 한 번에 까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텀을 두고 천천히, 단계별로 공개할 예정이다.

그걸 나빈이도 알기에 내 노래 버프에 대한 이야기는 쏙 빼놓고 대화를 이어 나가려고 했다.

“선배님, 당분간은 많이 바쁘시겠네요.”

의미심장한 말을 흘리는 나빈이.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한, 나빈이가 왜 이 상황에서 이렇게 말을 했는지 제3자는 전혀 모를 것이다.

“바쁜 게 좋지.”

역시.

나도 누나를 따라서 부지런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 * *

나빈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세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스태프 몇 명이 나와서 내 차를 발견하자마자 손으로 어딘가를 계속 가리켰다.

‘저쪽에다가 차 대라는 건가?’

내 예상이 제대로 적중했다.

차를 주차시킬 만한 공간을 미리 확보해 둔 스태프들이 카메라와 조명 장비를 들고 대기 중이었다.

나와 나빈이가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촬영했다.

황 PD에게 사전에 들은 바에 의하면.

‘내가 여기서 나빈이하고 같이 엘리베이터 타고 멤버들 숙소로 올라가는 장면까지만 촬영하고 빠질 거라고 했었지.’

지하 주차장을 통해서 엘리베이터가 있는 쪽으로 쭉 걸어갔다.

나빈이가 주차장 주변을 둘러보면서 짧은 소감을 말했다.

“주차장 엄청 넓은데요?”

“그러게. 집 좋네.”

아직 놀라기엔 일렀다.

자동문이 열리고, 길게 펼쳐진 복도가 우리를 반겨 줬다.

벽에 군데군데 걸려 있는 각종 미술 작품들.

‘연예인들이 사는 아파트라서 뭐가 달라도 다르네.’

이쯤 되니 멤버들이 살고 있다는 숙소 내부는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