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아크레프 제국의 위기 (12)
“예? 아, 네 영주님!”
멍하니 있던 에드가 뒤늦게 정신 차리며 대답하였다.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
그들의 얼빠진 모습에 칼슨은 살며시 웃었다. 그러고는 곧장 몸을 돌려 한쪽 통로를 향해 앞서나가기 시작하였다.
순식간에 앞서나가는 칼슨을 본 일행들 또한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갔다.
잠시 뒤 다르칸트 공작과 그의 병력들이 이곳에 진입하였다. 그들은 이곳 여기저기 널려있는 괴물들의 주검들을 보자 소름이 돋았다.
그들 또한 이 변형된 괴물들을 상대해보았기에 이들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았다. 그런데 이미 여기까지 오면서도 이 괴물들의 시체를 여럿 보았고 심지어 이곳에는 수백 개로 짐작되는 사체들이 보였다.
어림잡아 세어 봐도 그 수가 대략 500은 넘어 보였다.
그 많은 수의 괴물들을 고작 6명으로 전부 처리해버리다니. 그것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린 것도 아니었다.
그것을 보며 다르칸트 공작은 생각하였다.
절대 드레이크 공작과는 척을 지지 말아야겠다고.
깊은 한숨을 쉰 그는 다시 병사들에게 명을 내려 이동하였다.
아직 이 싸움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 * *
마르코스는 심기가 매우 불편하였다.
그 이유는 바로 웬 놈들이 황궁에 침입을 했다는 것이다.
감히 자신이 황제로 있는 이 황궁을 공격하다니.
그것도 이미 내성 안에 들어왔다고 한다.
딱히 방비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내성에 들어올 때까지 모를 수가 있는가?
비록 그가 황궁을 점령할 때 수많은 병사들을 죽여 그 수가 줄었다고 해도 이것은 말이 안 되었다.
아마도 황궁의 사정을 잘 아는 놈이 이 사단을 벌인 게 확실하였다. 그렇게 생각이 좁혀지자 떠오르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에르시오…….’
그 당시 황궁을 빠져나간 자신의 배다른 동생.
그때 놈을 놓쳐서 얼마나 찝찝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결국 그놈이 이곳으로 돌아왔다. 하긴 그 성격에 가만히 도망만 다니고 있을 녀석이 아니었다.
분명 그놈의 잘난 세치혀를 굴려 몇몇 귀족들을 구워삶은 것이 틀림이 없었다.
차라리 잘되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번에는 놓치지 말고 놈을 잡고야 말 것이다.
아니 영악한 놈이니만큼 본인은 오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괜찮다.
비록 놈이 이곳에 오지 않더라도 몇 놈을 사로잡아 족치다 보면 놈의 족적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 반역자들까지 모조리 축출할 수 있는 기회였다.
얼마나 많은 병력이 들어왔는지 아직 파악은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황성에는 이미 많은 수의 변형체들과 마수들이 있었다. 그리고 몇몇 흑마법사들에게서 마족을 소환하게끔 지시도 해두었다.
그렇기에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소란스런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이윽고 대전 문이 열리며 일단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총 12명이었는데 그 중 몇은 얼굴이 낯이 익었다.
특히 백금발의 미청년이 유독 눈에 띄었는데, 마르코스도 그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칼슨…드레이크…….’
지난번 연회 때 황위를 도모할 수 있었는데 저놈으로 인해 실패를 했었다. 게다가 팔 하나까지 잃었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저기 자신의 팔을 자른 기사도 보였다.
으드득.
이미 아물었던 팔에서 쓰라린 통증이 느껴졌다. 그동안 잃었던 팔을 볼 때마다 칼슨을 생각하며 이를 갈고 있었는데, 때마침 이곳에 찾아와 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때의 복수를 해줄 생각을 하자 절로 입가가 올라갔다.
그런데 그때, 한 남성이 자신에게 호통치듯 소리쳤다.
“이 더러운 흑마법사 놈! 네놈의 악행도 오늘로써 끝이 날것이다!”
“…….”
용사가 악당에게나 외칠 전형적인 대사를 듣자 마르코스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감히 황제인 자신에게 저따위 망발을 하다니.
마르코스는 그를 유심히 보았다.
대략 30대 후반 정도 돼 보이는 진갈색 머리의 남성이었다. 긴 머리를 뒤로 묶었는데 얼굴은 누구에게나 호감을 살만큼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의 모습을 보니 문득 떠오르는 이랑 무척이나 닮았다. 혹시 그가 왔는가 하고 순간 긴장하였지만 마르코스는 고개를 절로 저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그의 나이는 이미 일흔이 훌쩍 넘었다.
저렇게 젊은 남성은 도저히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만약 8서클의 마법사라면….’
그래도 아니었다.
그렇게 가정해도 저 얼굴은 말이 안 되었다.
기껏해야 장년쯤 보이겠지.
하지만 그와 얼굴이 지나치게 닮았다.
그러면 혹시 그의 아들인가?
여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아니지 남들 모르게 여기저기 씨를 뿌리고 다닐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마르코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그 남성이 주문을 외운다. 순간 강력한 마력이 느껴지면서 마르코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것은 분명 8서클의 마력.
그러면 이자는 분명 자신이 생각하는 그자가 맞았다.
대륙 10강인 아드리안 파울러.
8서클의 마법사인 그가 이곳에 온 것이었다.
“제길!”
마르코스는 이를 악물며 품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서둘러 무언가를 꺼내었다.
휘릭─
그것은 양피지였다.
그것을 꺼낸 마르코스는 몇 마디 주문과 함께 그것을 찢었다.
그러자 섬광이 일며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곧 붉은 빛이 그곳을 덮으며 모든 것을 파멸시켜버렸다.
콰과과과과광!
아드리안의 마법으로 인해 황좌가 있던 곳이 박살나 버렸다. 그곳에 있었던 마르코스 또한 무사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였다. 허나 칼슨과 아드리안은 그가 주문에 적중되기 직전 몸을 피했다는 것을 알았다.
“쯧, 쥐새끼 같은 놈이 그새 도망을 쳤군.”
혀를 차며 인상을 찌푸리는 아드리안.
다잡은 줄 알았는데 눈앞에서 놓쳤다. 그 순간 공간이동 마법을 쓸 줄이야. 그것도 이렇게 빨리 시전을 할 줄 꿈에도 몰랐다.
“젠장!”
다 잡은 줄 알았는데 놓쳤기에 그로서는 짜증이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칼슨 또한 비슷한 심정으로 아쉬움이 몰려오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때 에르미온의 제자인 레이나가 한마디를 하였다.
“그런데 흑마법사도 공간이동 마법을 쓰나요? 게다가 저것은 저희가 쓰는 공간 이동마법과는 좀 달라 보이던데요?”
“응? 그러고 보니….”
그녀의 말에 아드리안의 표정이 묘해졌다. 자신이 쓰는 공간 마법은 시전시간이 제법 걸렸다. 게다가 놈은 흑마법사. 공간 마법 개념이 자신들과는 그 궤가 달랐다. 그러고 보니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탁!
아드리안이 손바닥을 치며 말하였다.
“그래, 저것은 귀환 마법이군. 흑마법 중에 우리 공간이동이랑 비슷한 게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좌표를 계산해서 가는 것이 아닌, 특정 장소를 지정해서 그곳만 이동하는 마법. 그렇다면 놈은 자신이 지정한 장소로 이동했을 걸세. 아마도 자신이 제일 안전하다고 여기는 그런 장소겠지.
그렇다면 놈이 제일 안전하다 여길 만한 장소는 어디일까? 지금 같이 황궁이 공격받는 상황이 아니고 평소라는 가정하에 말이야.”
그의 물음에 다들 선뜻 떠오르는 장소가 없었다. 그때 칼슨이 뭔가가 떠오르는 듯 말을 꺼내었다.
“아마도 황궁 어딘가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래도 명색이 황제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곳이 제일 안전하다 여기지 않겠습니까?”
“아….”
그 말에 모두 눈을 크게 뜨며 수긍을 하였다.
제법 일리 있는 말이었다. 지금 같이 황궁이 공격당하는 상황은 평소에 생각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곳이 그에게는 제일 안전한 장소. 분명 이곳 어딘가에 안식처를 마련했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설사 그게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 밑져봐야 본전이 아닌가.
그러니 이곳을 수색해서 마르코스를 못 찾는다고 해도 딱히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냥 멍하니 있다 놈이 도주하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아무튼 지금으로서는 이곳 어딘가에 놈이 있다고 가정을 하고 찾아보는 것이 최선이라고 볼 수 있었다.
* * *
황궁 안 낯선 공간.
이곳은 마르코스가 황제가 되기 전 자신의 집무실로 쓰던 곳이었다. 이 방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는데 황궁 안 여러 곳으로 이어진 통로가 있다는 것이다.
마르코스가 황제가 된 이후 한동안 비어있던 이곳.
그 방 한 가운데 갑자기 어두운 빛의 구체가 나타났다.
그 구체는 점점 크기가 커지더니 대략 2미터 정도까지 커졌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주변으로 확산되면서 한 남성이 그곳에 나타났다.
팟─!
철퍼덕!
“커허어어억!”
조금 전 대전에서 마법을 사용해 탈출한 마르코스는 이곳으로 이동되었다.
평소에 만들어 놓은 귀환 스크롤.
예전부터 위급할 때를 위해 몇 개를 만들어 놓았었는데 그때 귀환 위치를 이곳으로 해놓았었다.
“이런 빌어먹을!”
정신을 차린 후 화를 토해내는 마르코스.
하나 남은 귀환 스크롤을 썼는데도 불구하고 기껏해야 도망친 곳이 이곳이라니.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갑작스레 황궁으로 침입할 줄 몰랐으니까.
게다가 아드리안 파울러.
8서클의 대마법사가 이곳에 나타날 줄이야.
방금 같은 긴박한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절대 귀환 마법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놈이 대전까지 들어왔다는 것은 황궁에 있는 변형된 병사들은 물론 마수와 마족들까지 처리한 게 분명하였다. 그렇다면 이곳은 위험하였다. 어서 황궁에서 빠져나와야 했다.
당분간 황제의 자리를 내려놔야겠지만 그것도 살아있어야 누릴 수 있는 것. 일단 지금은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제일 우선이었다.
그는 서둘러 황궁을 빠져나가기 위해 움직였다.
간단히 챙겨야 할 것만 챙기고 눈에 안 띄는 검은 망토를 둘러맨 채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그때 누군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흐어억! 누, 누구냐!?”
갑작스런 누군가의 출현에 마르코스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이내 들려오는 그자의 목소리가 익숙한 자의 것임을 알았다.
“뭔가 일이 잘 안 풀리는 것 같아 보이는구나, 마르코스.”
“허억! 마, 마스터. 어, 언제 이곳에…?”
어비스의 마스터가 그의 앞에 나타나자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마스터, 놈들을 없애야 합니다! 도와주십시오!”
“…….”
자신이 아는 마스터라면 그들을 능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간곡한 태도로 부탁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스터의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그 모습에 마르코스는 알 수 없는 한기를 느꼈다.
왠지 모를 불길함과 더불어 심장이 얼어붙을 것만 같은 두려움이 동시에 마음속을 두드렸다.
그것은 경고였다.
바로 죽음이 가까이 왔으니 도망가라는 경고.
위기를 직감한 마르코스는 하나뿐인 손으로 마력을 끌어모았다.
“씨발! 네놈이 시키는 대로 했잖아! 이 새끼야!”
욕설을 퍼부으면서 그에게 마법을 발현하였다.
검은색 기운이 순식간에 생성되며 상대를 위협한다.
마치 사신의 손길과도 같은 그것이 마스터의 몸을 감싸고 있을 때.
딱!
마스터가 손가락을 튕기자 마르코스가 만든 검은 기운이 단숨에 사라져버렸다.
자신의 마법이 허무하게 사라지자 마르코스의 눈에 당혹감이 서렸다. 그리고 점차 두려움으로 물들더니 반사적으로 엎드리며 용서를 빌었다.
“요, 용서해주십시오! 제가 잠시 미쳤었나 봅니다! 그러니 제발 한 번만….”
“전에 말했었지.”
마르코스가 미처 말을 마치기 전에 마스터는 그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마스터의 말.
“나는 기회를 많이 주는 사람이 아니라고.”
그 말과 동시에 마르코스의 몸에서 불길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