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아크레프 제국의 위기 (9)
아크레프 제국이 전쟁을 선포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글래툰 왕국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당연하였다. 난데없이 선전 포고를 하였으니 그럴 수밖에.
거기다 그 이유도 어이가 없었다.
대뜸 에르시오가 이곳에서 제국을 향해 역모를 도모하려 한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하였다. 그게 말이 되는가?
에르시오가 이곳 왕실과 혈연관계이면 모를까, 생판 남에 가까운, 아니 오히려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제국의 핵심 인물인데 이곳에서 병력을 일으켜 역모를 도모한다고 하다니, 그 이야기를 듣는다면 누구든지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세 살짜리 어린애도 안 믿을 명분에 글래툰 왕국의 수뇌부 또한 어처구니없어하였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건 그냥 대놓고 왕국을 침공하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혹시나 말뿐인 위협일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도 해보았지만 이미 국경에는 수만의 군사들이 집결해있는 것을 정찰로 확인하였다. 결국 선전 포고는 기정사실이 되고 말았다.
제국의 침공이 확실해지자 글래툰 왕국의 수뇌부는 이 위기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평소에 서로 정쟁으로 다투었던 대신들이 서로 머리를 쥐어짜며 방안을 내놓는다.
제 영지 건사하기에 바쁜 영주들 또한 국가의 위기가 발생하자 발 벗고 나서며 왕궁으로 모여들었다.
글래툰 왕국의 수도인 글래스톤.
근래 유례가 없을 만큼 많은 인파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어 왔다.
본래 5만의 인구로 어지간한 도시보다 번잡한 곳이었지만 각 영지에서 데리고 온 병사들과 5만여 명의 병력들이 들어서자 도시는 발 디딜 틈 없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로 인해서 도시의 여관 및 음식점들은 때아닌 호황을 누렸다.
그렇지만 그들은 마냥 기뻐하지는 못하였다.
이렇게 많은 병사들이 이곳에 왔다는 것은 그만큼 왕국이 위기라는 반증이었으니 말이다.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좋지만 자신이 살아가는 이곳이 파괴된다면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아무튼 그래도 장사가 안되는 것보다는 나으니 불안해하면서도 열심히 손님을 받아 매출을 올리는 그들이었다.
* * *
글래툰 왕성의 대전.
왕좌에 중년의 남성이 앉아있었다.
그는 글래툰 왕국의 국왕, 데리온 3세였다.
그를 중심으로 대전 양옆에 대신들과 영주들이 도열해 있었다.
평소에는 열이 좀 넘는 그 수가 이제는 오십 명 정도로 많아졌다. 국정을 다스리는 대신들뿐만 아니라 각 영지의 영주들까지 잔뜩 모였기 때문이다.
각 영지의 대표자인 영주들.
백작 이상의 대영주들은 물론이고 그 이하의 중소 영주들까지 한곳에 모두 모여 있으니 그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글래툰 왕국의 유력 귀족들이 모두 모인 한가운데 한 대신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그는 주름이 많고 흰머리가 가득한 노인이었는데 체구가 제법 건장해 보여 얼핏 보면 기사 같은 강인함을 자아내게 하였다.
그는 바로 노바크 공작.
글래툰 왕국의 재상이었다.
“폐하, 이제 다들 모인 듯합니다.”
그가 몸을 숙이며 조심스레 말하자 국왕인 데리온 3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바로잡는다. 그리고 위엄 가득한 어조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우려한 대로 아크레프 제국에서 우리 왕국을 침공하는 것이 현실이 되었소. 정말이지 어이없고도 지탄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잠자코 있을 수만은 없는 법. 이에 좋은 해결 방도가 있다면 누구라도 기탄없이 의견을 말하기를 바라오.”
그러나 대전은 조용했다.
국왕이 의견을 물었음에도 누구도 답을 하는 이가 보이지 않는다. 적막이 길어지자 국왕은 심기가 불편한 듯 미간에 주름이 잡히며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리고 곧이어 헛기침을 내뱉으며 자신의 기분을 표출하였다.
“크흠!”
단순한 기침에 불과하였지만 그것을 듣는 신하들에게는 호통과도 같은 소리. 그에 다들 쭈뼛거릴 뿐이었다.
그렇게 다들 눈치만 보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있을 때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말을 하였다.
그는 우락부락한 덩치에 험상궂게 생긴 중년의 남성이었는데 그 모습만큼이나 목소리도 제법 굵고 거칠었다.
“폐하,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왕국의 전력이 모두 모였습니다. 비록 그 수가 제국의 전력에 미치지 못한다 하나 자그마치 5만이나 됩니다.
이들과 함께 죽을 각오로 적과 맞선다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을 겁니다.”
거창하게 말을 하지만 그냥 이대로 전면전을 벌이자는 말.
그 단순한 생각에 국왕의 표정이 절로 찌푸려졌다.
“비브리오 백작! 그대는 짐을 바보로 아는가? 어떻게 그런 생각 없는 의견을 내놓을 수 있나? 지금 제국의 병력이 우리 2배인데 전면전을 펼치자는 겐가?”
거침없는 호통에 비브리오 백작이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선다. 의견을 내놓으라고 해서 그런 것뿐인데 이리 매몰차게 대하니 왠지 모를 서운함이 몰려왔다.
그가 그렇게 깨지자 다른 이들은 더욱더 의견을 내기가 조심스러워졌다. 그렇게 아무도 의견을 내놓지 못하자 국왕인 데리온 3세는 답답한 듯 왕자의 팔걸이를 세게 쳤다.
쾅!
점점 험악해지는 분위기.
그때 재상인 노바크 공작에게 누군가 다가와 귓속말을 하였다. 무슨 말인지는 잘 안 들렸지만 듣고 있던 공작의 눈이 점점 커지는 것을 보아하니 꽤나 놀라운 이야기가 분명해 보였다.
이야기를 들은 노바크 공작은 이내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며 말하였다.
“폐하, 신이 감히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진중한 태도로 그가 말하자 국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물론이오, 좋은 의견이 있으면 언제든지 환영이오. 그러니 어서 말하시오.”
“예, 폐하.”
대답을 한 노바크 공작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다시 말을 이어갔다.
“신이 앞서 말하기 전에 소개해드릴 사람이 있습니다.”
“소개할 사람이라니? 그게 도대체 누구요?”
“다들 아실 겁니다. 이번 제국에서 열린 검술 대회의 우승자이며 벤투스 왕국을 흑마법사들로부터 지킨 구국의 영웅…….”
그가 미사여구를 붙여 소개를 하는 동안 누군가가 대전으로 들어왔다. 백금발의 훤칠한 미남. 큰 키와 더불어 다부진 체격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사를 자아내게 하였다.
그가 대전에 들어서자 몇몇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노바크 공작의 말.
“…소드 마스터를 넘어선 새로운 대륙 10강. 바로 드레이크 공작입니다.”
그의 소개에 대전에 있던 이들 모두가 칼슨을 주목하였다.
국왕인 데리온 3세 또한 눈에 이채를 띠면서 칼슨에게 호기심을 보였다.
힘차게 대전을 걸어온 그가 국왕에게 가까이 오자 근위 기사들이 그를 막아 세웠다.
“물러나십시오. 더 이상 접근을 허용하지 않겠습니다!”
그 모습을 본 데리온 3세가 손을 저으며 근위 기사들에게 말을 하였다.
“괜찮다, 어서 물러서도록 해라.”
왕의 명에 근위 기사는 잠시 멈칫하더니 뒤로 물러선다.
그리고 칼슨과 대면하는 국왕.
어느 정도 다가가자 칼슨이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하였다.
“벤투스 왕국의 칼슨 드레이크입니다.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폐하.”
자신에게 예를 표하며 인사를 하자 데리온 3세도 흡족해하며 반갑게 맞이하였다.
“나도 명성이 자자한 자네를 보게 되어 무척이나 영광이네. 그래, 여기엔 어쩐 일로 왔는가? 설마 벤투스 왕국에서 우리를 도와주는 것인가?”
다른 왕국에서 도움이 없어 곤란하던 차에 벤투스 왕국이 도와준다면 상당히 힘이 될 터. 국왕인 데리온 3세는 내심 그것을 기대하였다. 하지만 이내 칼슨의 입에서 나온 답은 그것과 거리가 멀었다.
“송구스럽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현재 벤투스 왕국의 사정이 좋지 않습니다. 최근 연이은 전쟁으로 인해 그것을 수습하느라 등골이 휘어질 지경입니다.”
“뭐라? 그럼, 그대는 왜 이곳에 온 것인가? 우리를 도우러 온 것이 아니었던가?”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데리온 3세는 표정을 굳히며 딱딱한 어조로 칼슨에게 반문하였다. 그 물음에 칼슨은 가벼운 미소를 띠며 답해주었다.
“물론 도움을 드리러 온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병력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계책을 제안해드리러 온 것입니다.”
“계책이라고?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칼슨의 말에 눈썹을 치켜세우며 의문을 표하는 데리온 3세. 이윽고 이어지는 칼슨의 설명. 그것을 들은 국왕은 처음에는 신통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듣더니 점점 눈이 커지며 놀라움을 표하기 시작하였다.
“그, 그게 사실인가?”
“예, 그렇습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는 저의 계책에 따라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흠, 아무리 그래도 자네 말만 듣고서 섣불리 결정할 수가 없지. 뭐 그래도 계책은 좋으니 생각은 해봐야겠군 그래.”
국왕은 팔짱을 끼며 다소 퉁명스럽게 말하였지만 이미 칼슨의 말에 반쯤 넘어갔다. 그의 계책 상당히 좋았다. 아니 그의 말대로만 된다면 이것보다 나은 방법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였다.
게다가 그의 말이 거짓이라 하더라도 자신들은 크게 손해 볼 것은 없었다.
그것을 알기에 칼슨 또한 여유를 부리며 이 자리에 나올 수 있었던 것.
결국 표정을 애서 감추며 태연한 척하던 국왕도 칼슨의 계책을 적극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렇게 약조를 한 둘은 웃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악수를 하였다.
악수를 하면서 칼슨은 생각하였다. 이제 자잘한 일은 이들에게 맡기고 놈만 처리하면 되었다.
아비와 친족을 죽이고 형제에게 누명을 씌운 그 쓰레기 흑마법사를 말이다.
* * *
칼슨이 에르시오를 구해 치료를 한 후 곧장 한 일은 바로 제국에 있는 영주들, 백작 이상의 대영주들에게 서찰을 보내는 것이었다.
제국 내에서 추적으로 인해 여유가 없어 하지 못하였는데 이제는 안전해졌기에 나름 친분이 있던 영주들을 위주로 서찰을 보내었다.
서찰을 받은 영주들은 사건의 전말을 파악하였다.
본래부터 에르시오가 반역자가 된 거에 의문을 품고 있던 터라 더욱더 서찰의 내용을 확신하게 되었다.
에르시오는 그들과 통하면서 도움을 청하였다.
병력을 일으켜 마르코스를 처단하자고.
마침 그 영주들 또한 병력을 소집하라는 마르코스의 명을 거역하였던 터라 조금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이야 마르코스가 전쟁으로 인해 잠자코 있다고 하지만 만약 전쟁이 끝난다면 자신들에게 화살이 돌아올 것이 뻔하였기 때문에.
그래서인지 그들은 에르시오의 일에 동조하기로 하였다.
그래도 황성을 공격해야 한다는 것에 조금 부담감이 있었지만, 대륙 10강인 칼슨과 아드리안이 참전해 준다고 하니 기뻐하며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국경에 주둔하고 있는 10만의 제국군.
아드리안은 흑마법사들이 제국군과 글래툰의 군대를 상잔시켜 마왕의 강림에 필요한 제물로 쓰려한다는 것이라 말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칼슨이 직접 글래툰 왕국의 국왕인 데리온 3세에게 계획의 일부를 말해주면서 제안을 하였다.
가급적 직접적인 전투를 피하면서 최대한 그들의 진군을 늦춰달라고 이야기하였다.
말 그대로 양동작전.
자신들이 시간을 끄는 동안 에르시오를 중심으로 제국 내에서 병력을 도모해 마르코스를 쳐 폐위시키고 침공한 제국의 병력을 물리는 것이 그 계획의 골조다.
글래툰 왕국도 병력의 열세로 인해 전면전을 최대한 피하려고 하였고 소극적인 국지전 전략을 취하려 하였기에 흔쾌히 칼슨의 제안에 수락하였다.
그렇게 서로 합의하고 준비가 되었을 때.
국경에 모여 있던 10만의 제국군이 국경을 넘어 글래툰 왕국으로 침공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 시각 칼슨과 아드리안의 일행은 이미 제국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