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아크레프 제국의 위기 (8)
붉은빛이 타오르기 시작하자 마르코스는 자지러지면서 몸을 감싸고는 소리를 지른다.
“허어어억! 요, 용서해주십시오! 마스터! 바로,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자비를….”
처절하게 용서를 구하며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마르코스. 그 모습을 보자 마스터는 다시 지팡이를 거두며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어서 서두르는 게 좋을 것이다. 알고 있겠지만 난 기회를 많이 주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알아서 잘 판단하길 바란다.”
“예, 마스터! 정말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기회를 얻은 마르코스가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하였다. 하지만 어느새 사라져있는 마스터.
그것을 확인한 마르코스는 허탈한 표정을 하며 다시 황좌에 앉았다. 그러고는 식은땀을 닦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꼼짝없이 뒈지는 줄 알았네.”
마르코스는 눈을 감은 채 나지막하게 말을 내뱉었다. 어느새 긴장이 풀렸는지 몸이 축 늘어졌다.
빌어먹을 놈.
마스터랍시고 계속해서 이것저것 요구를 한다.
뭐 그도 자신에게 많은 지원을 해주었지만 자신은 이제 황제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굽혀야 하는 신세를 못 벗어나다니.
도저히 맘에 들지가 않았다.
“젠장!”
화가 나지만 어쩔 수 없다.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당장 죽는 것은 자신이 될 터.
그렇기에 하루라도 빨리 지시했던 일을 이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눈앞의 가신들에게 명을 내렸다.
“어서 각 영지에 병력들을 소집하라 전하라! 이제 전쟁을 할 것이다!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이끄는 큰 전쟁을! 그러니 지체하지 말고 각 영지에 내 명을 전하도록 하라!”
그의 장엄한 말에 노예인 가신들이 기계적으로 대답하였다.
“예, 폐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마치 영혼이 없는 듯한 무심한 말투. 그 모습을 본 마르코스는 제법 흡족한 얼굴을 하였다.
방금 전까지 무척이나 기분이 안 좋았는데 이제야 황제가 된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이번만 그놈의 지시를 따라주면 된다.
그러면 자신은 명실상부한 이 제국의 황제가 될 것이다.
그런 상상을 하자 어느새 마르코스의 입꼬리는 찢어질 듯이 올라가 있었다.
* * *
마르코스의 명은 제국 각 영지에 내려졌다.
그로 인해 각 영지들이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하루아침에 전쟁을 벌이자고 하니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명분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반역자인 에르시오가 글래툰 왕국에서 병력을 모아 제국을 도모하려 한다는 것. 그렇기에 그것을 막기 위해 글래툰 왕국에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당연히 글래툰 왕국은 자신들은 그런 적이 없다고 하였다.
실제 그것은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제국 황실, 그러니까 마르코스는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그에게 진위여부 따윈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그저 전쟁으로 인해 생길 희생만을 원할 뿐이었다.
모두들 황제가 미쳤다고 생각하였다.
당연하였다. 글래툰 왕국의 전력은 고작 제국의 10분의 1밖에 안 되었다. 게다가 평소 제국과 사이도 안 좋았던 그들이 얼씨구나 하면서 에르시오를 받아줄 리도 없었다.
비록 반역자로 낙인찍혔긴 했지만 그는 황실의 중추였다.
그런 그를 위시해 제국을 쳐서 도모한다고 하니 그게 어찌 말이 되겠는가.
그런 명분을 차치하고서라도 글래툰 왕국을 침공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도 불분명하였다.
전쟁은 돈을 엄청 잡아먹는다.
그렇기에 엄청난 이득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하면 할수록 손해였다.
그런데 글래툰 왕국은 딱히 부유한 나라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가난한 왕국이라 볼 수 있었다.
땅도 척박해서 식량 생산도 저조할 뿐 아니라 자원이 많지도 않았다.
그저 제국과 인접해 있어 그 중간 무역으로 간간이 먹고사는 나라라고 볼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제국의 기생충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였다. 뭐 딱히 틀린 말도 아니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 왕국이 제국과 사이가 안 좋은 것이 아이러니이긴 하였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곳이 전쟁을 일으킬만한 먹음직스러운 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손쉽게 그곳을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땅이 척박한 만큼 산세도 험하였고 사람들도 그만큼 억세었다.
반골 기질이 강해서 평소에 악감정이 많은 제국이 침공한다고 하면 왕국민 전체가 나서며 필사적으로 저항할 것이 분명하였다. 그렇게 되면 장기전으로 갈 확률이 높아지고 비용은 천문학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결국 아무런 이득 없이 손해만 남는 전쟁을 하자는 이야기.
마르코스는 그 점을 노려 이곳과 전쟁을 하려 한 거였지만 영주들의 생각은 달랐다.
아무튼 그런 날벼락 같은 황명에 골치 아파하고 있을 무렵 그들에게 새로운 소문이 들려왔다.
그것은 바로 새 황제인 마르코스가 반역자라는 것이었다.
그의 정체는 흑마법사였으며 그가 전 황제와 황족들을 모두 죽인 다음 그 죄를 에르시오에게 뒤집어씌웠다는 내용이었다.
그 이야기의 출처는 아마 에르시오 측이라 추측되었지만 공교롭게도 그것은 꽤나 설득력이 있었다.
애초에 조용하고 은둔적인 성격으로 알려진 마르코스가 갑자기 영웅처럼 반역자를 제거하고 나섰다는 것이 이상하였을뿐더러 여태 조용했던 마르코스에게 영민했던 에르시오가 당해서 쫓겨났다는 것은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은 상황.
처음엔 마르코스가 건 보상에 눈이 멀어 그의 말에 믿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야기의 아귀가 맞지 않았다.
오히려 새롭게 들리는 소문이 더욱 믿을만해 보였다.
특히 최근 마르코스의 행적을 보면 그의 정체가 흑마법사라는 말에 더욱더 확신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모든 영주들이 전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오히려 전쟁으로 기회를 잡으려 하는 이들도 있었다. 대부분 상황이 좋지 않아 뭔가 활로가 필요한 영지들이 그랬다. 그들은 영지민들을 더욱더 쥐어짜 전쟁 준비를 하였다. 심지어 징집도 감행하여 자신이 지원하는 병력의 수를 부풀리기까지 하였다.
결국 제국 내에서도 의견이 갈리면서 마르코스의 명에 따른 영지는 고작 제국 내 4분의 1에 불과하였다.
그것도 사정이 여의치 않은 중소 영지가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모여 이룬 병력의 수는 대략 3만여 명.
거기다 제국 본대의 수가 더해지니 5만여 명이나 되는 대규모 병력이 구성되었다.
예상보다 영주들의 협조가 저조하자 마르코스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감히 황제인 자신의 말을 거역하다니 당장이라도 그 영주들을 족치고 싶었지만 지금 당장 그들을 벌한다면 제국은 쑥대밭이 되고 만다.
기껏 황제가 되었는데 제국이 망해버리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는 끓어오르는 화를 꾹 참으며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놈들은 나중에 차근차근 한 놈씩 처리하면 되었다.
지금은 당장 마스터의 지시를 행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5만의 병력이 적은 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일국을 점령하기에 충분해 보이는 수도 아니었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글래툰 왕국의 정규 병력은 모든 영지에서 끌어모은다는 가정하에 대략 3만 가량 예상되었다. 하지만 원정이라는 악조건과 더불어 저들은 유사시 징집병들을 쓸 수 있기 때문에 5만 정도의 병력으로 그들을 침공하기엔 좀 부족해 보였다.
그래서 마르코스는 제국 동쪽을 지키는 국경 수비대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마르코스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국경 수비대 동부 사령관인 그레고리는 그 요청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본래라면 황제의 명을 받는 국경 수비대 사령관은 당연히 그 요청에 따라야만 했다. 그러나 최근 들려오는 이야기가 그의 결정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3 황자는 죄가 없다. 오히려 현 황제가 부친을 죽인 반역자이며 패륜아였다.
-그의 본래 정체는 흑마법사다.
-마왕에게 제물을 바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 소문은 그레고리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솔직히 그도 황제의 명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반역자인 에르시오가 그곳에서 제국을 도모한다는 명분도 어이없었지만, 설사 그런다고 하여도 이렇게 대뜸 전쟁을 하려 하는 것이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오랫동안 동부를 관할했던 그는 글래툰 왕국 사람들이 어떤 이들인지 잘 안다.
부러질지언정 꺾이지 않는 기질을 가진 그들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이는 것은 정말이지 어리석은 짓이다.
오히려 그들이 병력을 모아 제국을 도모한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그때를 맞춰 그들을 상대해야 하는 게 효과적이었다.
그러면 그들을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들은 전쟁으로 인해 재정이 피폐해질 것이고 그 이후로 내부적으로 무너뜨리는 것 또한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황제는 그런 전략이나 전술은 고사하고 그냥 무작정 병력의 수적 우위를 이용한 정벌만을 원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소중한 병사를 내줬다간 글래툰 왕국에서 허무하게 희생될 것이 뻔하였다.
절대 그런 꼴을 볼 순 없었다.
그레고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거절의 의사를 내비친 서찰을 쓰려하였다.
하지만 그때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누구냐!”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소리친 그레고리는 검집에 검을 뽑으며 자세를 잡았다.
조명에 닿지 않은 어둠이 진 구석.
그곳에 낯선 이가 서 있었다.
그 모습이 또렷이 보이지 않았지만 상대가 후드를 걸쳤다는 것은 실루엣으로 알 수 있었다.
상대가 말이 없자 그는 큰 소리로 호위들을 불렀다.
“여기! 침입자가 있다! 어서 들어와 포박하라!”
크고 굵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장 호위 기사들이 방 안으로 들어올 줄 알았지만 수초가 지났음에도 잠잠하였다.
그렇게 정적이 흐르기를 한참.
왜 밖에 있는 이들이 오지 않는 지 의문을 가질 무렵.
어둠 속에 있던 침입자가 자신을 향해 말을 하였다.
“감히 황제의 명을 거역하다니? 아주 불충한 녀석이로군.”
기분 나쁘고도 음침한 목소리가 그레고리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는 불쾌한 음성보다도 그 말이 더욱 신경이 쓰였다.
“황제의 명이라고? 네놈은 대체 누구냐?”
“큭, 그것은 알 거 없다. 나는 그저 할 일을 하러 왔을 뿐이니까.”
“뭐? 그게 무슨…….”
뜻 모를 말에 그레고리가 의문을 표하던 그때, 상대의 손에서 검은 기운이 자신을 향해 쏟아졌다.
“헉, 이건 뭐야!”
갑작스런 무언가에 깜짝 놀라는 그레고리. 하지만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 검은 기운이 뾰족한 형태로 변하면서 그레고리의 이마를 꿰뚫어버렸기 때문.
퍽!
피가 흥건히 튀며 주변을 어지럽혔다.
머리에 구멍이 난 그레고리는 그대로 눈을 뒤집히며 쓰러졌다.
죽은 그를 내려다본 상대는 다시 마법을 사용하였다.
검은 기운들이 뿜어져 나오며 죽은 그레고리의 얼굴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를 죽인 사내가 다가오더니 시신의 얼굴에 손을 갖다 대었다.
그러자 그레고리의 얼굴이 낯선 사내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것을 확인한 의문의 사내. 그는 곧장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후드에 가려져 있던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런데 그의 얼굴은 바로 방금 죽었던 그레고리의 얼굴과 같았다. 도대체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완벽하게 그레고리가 되어버렸다.
남성은 자신의 얼굴을 몇 번 매만지더니 제법 맘에 드는 듯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그레고리의 책상을 향해 다가갔다.
그곳을 보니 그레고리가 쓰려하였던 서찰이 눈에 띄었다.
그는 그것을 집어서 천천히 읽어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내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말았다.
씨익.
이제 그 형태를 알 수 없이 찢어진 종잇조각을 보며 남성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음 날.
국경 수비대 5만이 글래터 왕국 원정군에 합류하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