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아크레프 제국의 위기 (7)
무척이나 붉었다.
순간적으로 해가 기운 것이 아닌가 하고 착각이 들 정도로 주변에 붉은색이 만연하였다. 아니 저녁노을보다 훨씬 더 붉은 적색의 빛이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이, 이것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붉은 섬광에 흑마법사 무리의 대장은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강대한 마력과 함께 느껴지는 죽음의 공포.
순간 이전에 어느 책에서 보았던 구절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붉은 섬광 아래 모든 것이 파멸로 물들 것이니….
“이, 이것은 설마 8서클 마법….”
뜨거울 거라 생각했던 붉은 빛은 따뜻하였다. 마치 포근한 햇살이 연상될 정도로 말이었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
몸 안쪽부터 서서히 시작되는 끔찍한 격통.
마치 칼날로 속살을 갈아내는 것 같은 통증이 전신에서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
영겁처럼 느껴지는 고통 속에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며 몸이 산산이 바스러지는 그들.
눈알이 부서지고 뇌가 갈려 나갔다.
장기와 뼈, 심지어 살점 한 조각과 혈액 한 방울까지 미세한 입자로 변해가며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마치 영혼조차 살아남지 못할 것 같은 그들의 최후.
당사자가 아닌 보는 이들에게조차 그 모습은 매우 끔찍한 광경이었다.
칼슨 또한 그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자신의 비전 검술인 일섬이 범위형으로 바뀌면 저런 모습일까? 상상도 못 할 그 모습에 입이 벌어졌다.
이것이 바로 8서클의 마법.
정말이지 가공할만한 위력이었다.
일시에 흑마법사 무리들을 소거시켜버린 아드리안의 마법.
그것으로 구해진 에르시오 일행은 물론이고 칼슨의 일행에게도 매우 충격적이었다. 특히 마법사인 아르모는 더더욱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도 저 마법이 어떤 마법인 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8서클 마법인 ‘파멸의 광선’이었다.
말로만 들었던 그 마법을 눈앞에서 보게 되자 경탄을 넘어서 좌절감마저 생길 정도였다.
아직 6서클에 불과한 그녀로서 8서클의 마법은 가히 천외천의 경지로 보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말이다.
아무튼 그런 시선들 속에서 에르시오는 나이아와 상봉할 수 있었다. 근 1년 만에 만남이었지만 마치 몇 년 동안 헤어진 것처럼 부녀는 애틋하게 끌어 앉았다.
감격스런 부녀 상봉 이였지만 그 순간은 길지 않았다. 이윽고 에르시오가 고통스러워하며 주저앉았기 때문이었다.
“…크으윽!”
“아, 아버지! 괜찮으세요?”
나이아가 걱정하며 물어보지만 고통에 겨워 차마 대답하지 못하는 에르시오. 그때 제퍼슨이 나서며 이야기하였다.
“여기 혹시 최상급 포션을 가지고 계신 분 있으십니까?”
“네? 포션은 왜요? 게다가 최상급이요? 그렇게 상태가 안 좋으신 건가요?”
죽기 일보직전에 먹어도 회복시키는 최상급 포션. 그것을 필요로 하니 상처가 매우 심각한 듯 보였다. 하지만 제퍼슨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심각합니다. 최상급 포션으로는 일시적으로 고통을 줄일 뿐입니다.”
“뭐라고요? 도대체 상처가 어떻기에…?”
제퍼슨의 말에 사색이 되어버린 나이아. 전령으로 소식을 받았을 때 부상당했다고 쓰여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안 좋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가 당황스런 얼굴을 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그때.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드리안이 심각한 표정을 한 채 말을 하였다.
“아무래도 흑마법사로부터 저주를 받았나 보군요. 그것도 아주 지독한 고위급 저주를 말입니다….”
“네에? 저주요? 파울러 님,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인가요?”
아드리안의 말에 깜짝 놀란 나이아가 그것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아드리안은 조용히 에르시오의 상태를 살폈다. 옷가지를 드러내자 가슴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가 거뭇거뭇해진 것이 보였다.
가슴을 중심으로 거뭇한 혈관이 사방에 퍼져나간 모습. 보기만 해도 끔찍한 몰골에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다.
“아…….”
그것을 본 나이아는 다리에 힘이 풀리며 제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딱 봐도 심각한 상태라는 것을 인식한 그녀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럼 그동안 저런 몸으로 여기까지 왔다는 말인데, 여태 고생하셨을 것을 생각하니 절로 눈물이 나왔다. 그때 상처를 살펴본 아드리안이 조용히 말을 하였다.
“그래도 다행히 아직 저주의 해주가 가능할 것 같아 보이는 군요.”
“네? 그게 정말인가요? 파울러 님?”
아드리안의 말에 나이아가 눈을 크게 뜨며 묻는다. 그녀의 눈에서 걱정과 기대, 그리고 간절함이 느껴졌다. 이에 아드리안은 미소 띤 얼굴로 부드럽게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황녀님. 원래대로라면 진작 목숨을 위험했을 뻔했는데 그동안 최상급 포션으로 꾸준히 치료를 했는지 저주가 크게 퍼지지 않았습니다.”
“아… 그렇군요! 파울러 님, 그럼 어서 저희 아버지를 치료해 주세요! 제발 부탁드려요!”
“물론이지요, 황녀님.”
흔쾌히 그녀의 청을 받아들이는 아드리안. 그는 뒤에 있는 레일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말을 하였다.
“레일리, 나를 도와줄 수 있겠나?”
“쳇, 저주 해제라면 상당히 귀찮은데…. 게다가 저런 고위 저주는 나도 꽤나 고역스럽다고.”
그의 말에 레일리가 인상을 쓰며 투덜거렸다.
아드리안은 해주를 하기 위해 상급 드루이드인 레일리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던 것. 그의 부름에 그녀는 귀찮은 일을 맡은 것마냥 투덜거렸지만 그래도 아드리안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결국 둘은 에르시오의 저주를 해주하기로 하였고, 그것을 위해 근처 가까운 마을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이런 야외에서는 아무래도 해주 작업을 하기가 상당히 곤란했기 때문. 그리고 꼭 저주 해주가 아니더라도 에르시오와 그의 일행은 꽤나 지쳐있던 상태였다.
그렇기에 꼭 휴식이 필요했으니 마을에 가서 여관을 잡는 것이 여러모로 합리적으로 보였다.
그렇게 그들은 간단한 응급치료를 한 후 그곳을 벗어나 마을로 향하였다.
* * *
제국의 수도 베이도스.
그 중심에 있는 황궁엔 오늘도 적막만이 가득하였다.
마르코스가 일으킨 반란으로 황제를 포함한 대부분의 황족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그와 함께 그들을 따르던 충신들 또한 모조리 숙청당하였고 마르코스에게 목숨을 구걸한 몇몇 가신들만이 충성을 강요당하며 그 삶을 연명하였다.
마르코스는 그들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그들에게 ‘인페러사이트’라는 벌레를 먹이게 하였다.
그 벌레는 어두운 초록빛의 새끼손가락만 한 크기의 벌레였다. 그것은 이 세상의 생물이 아니었다. 바로 흑마법사가 소환해서 나온 마수의 한 종류였다.
이것의 특징 중 하나는 인간의 몸에 기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벌레는 인간의 몸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재빨리 뇌 쪽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그곳과 융화되면서 숙주를 지배하였다. 그리고 그 숙주는 인페러사이트를 소환한 흑마법사의 말에 복종하게 되었다.
하지만 인페러사이트에게도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그것은 상대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먹이게 한다면 몸속으로 들어간 벌레가 반발 작용을 일으키며 터져버렸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숙주도 죽어버렸지만 굳이 그럴 것이면 아깝게 인페러사이트를 쓸 필요 없이 그냥 죽여 버렸으면 되었다.
어찌 됐든 목숨을 담보로 동의를 구하여 숙주로 만든 가신들.
마르코스는 그런 이들로 각종 정무를 담당하게 하고 거짓 정보를 뿌려 에르시오를 반역자로 몰았다.
어차피 황궁 안은 자신이 장악을 하였기에 누구도 그 말을 의심하지 못하였다.
그렇게 마르코스는 순조롭게 아크레프 제국의 새로운 황제가 되어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아보였다.
심기가 불편한 지 황좌에 앉아있으면서도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는 대전을 향해 내려다보았다.
대략 스무 병의 사람들이 양쪽에 열을 맞춰 서있었다.
그들 모두 황실에서 일했던 가신들이었으며 다들 인페러사이트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자신의 말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할 충성스런 노예들.
그들을 보고 있자니 자신이 황좌에 올라있다는 게 실감이 난다.
그때 그의 옆에 한 남성이 다가왔다.
후드를 쓴 창백한 피부의 남성.
어비스의 흑마법사였다.
그는 마르코스의 부하 중 하나였다.
그를 본 마르코스가 심드렁하게 말을 건넸다.
“그래, 에르시오를 쫓아간 녀석들에게서 온 소식은 아직도 없느냐?”
“예, 그렇습니다. 지부장님.”
“뭐? 설마, 그것들이 실패한 것이 더냐?”
“그,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연락이 오지 않으니 도저히….”
“그게 실패한 것이 아니더냐! 하여간 그까짓 일 하나 처리 못 하고 연락마저 두절되다니…. 도대체 제대로 하는 일이 뭐냐 말이다!”
“소, 송구합니다. 지부장님.”
“에이, 이런 밥버러지 같은 놈들!”
잔뜩 화를 내는 마르코스.
목소리가 크진 않았지만 어조를 보아하니 매우 화가 난 것이 분명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에르시오 놈을 없애기 위해 그는 흑마법사 셋에 일류 암살자 열을 딸려 보냈다.
게다가 흑마법사 중 한 명은 6서클의 흑마법사.
현재 에르시오를 죽이는데 부족함이 없는 전력이었다.
분명 마지막 전령을 받았을 때만 해도 놈들의 길목을 막았다고 하였다. 그럼 분명 전투가 벌어졌을 테고 에르시오 놈을 처리할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이틀 전부터 아무 소식이 없었다.
이제까지 이런 적이 없었기에 놈들이 늦장을 부릴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암살에 실패한 것이다.
에르시오는 반드시 없애버려야만 하였다.
놈은 눈에 가시같은 녀석이었다.
자신의 권좌에 기둥뿌리를 썩게 만들 곰팡이와도 같은 존재였다.
지금이야 자신이 황좌를 잡고 있지만 놈이 살아남아 그 세치 혀를 굴린다면 그 말에 넘어갈 놈들이 꽤나 많을 것이다.
여태까지 그래왔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확률이 높았다.
앓던 이를 빼다 못 뽑은 그런 찝찝함에 기분이 더러워졌다.
마르코스의 심기가 불편해지고 있을 때 갑자기 의문의 인물이 이곳에 나타났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모르지만 어느 누구도 그가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는 몰랐다.
붉은 후드를 쓴 남성.
그가 입고 있던 로브마저 붉은색이었는데 그 재질이 일반 천의 느낌과는 다르게 은은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입은 붉은 로브에도 금실로 수를 놓은 아름다운 문양으로 가득했으며 그로 인해 굉장히 고급스런 느낌을 자아내게 하였다.
그가 다가오자 마르코스의 부하인 흑마법사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였다.
“마, 마스터를 뵙습니다!”
그 말을 들은 마르코스 또한 표정이 변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하였다.
“마스터께서 여긴 어쩐 일로…….”
어비스의 마스터.
흑마법사들의 우두머리인 그가 이곳에 나타난 것이었다.
마르코스는 긴장하며 그가 온 연유를 물었다.
그의 말에 마스터라고 불리는 남성은 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일을 제대로 추진하고 있는지 확인하러 왔다, 마르코스.”
마치 졸린 것 같은 느낌의 나른한 목소리. 거기다 목소리까지 굵은 편이어서 듣는 이로 하여금 굉장히 늘어지는 기분을 들게 하였다.
그러나 막상 그와 마주한 마르코스는 전혀 그렇지 못하였다.
오히려 더욱더 긴장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살짝 떠는 목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 자, 잘 되고 있습니다, 마스터! 조만간 강림을 위한 제물, 제물이 마련될 것입니다! 예!”
잔뜩 긴장했는지 마르코스는 횡설수설하면서 말하였다.
그의 대답에 마스터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잠시 바라보더니 이윽고 그가 들고 있던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검은색의 지팡이였다.
그 재질이 나무인지 금속인지 알 수 없던 그것은 마치 가지가 뒤틀린 채로 꼬인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꼬임은 상단부까지 이어지더니 붉은색 보석을 감싸는 모습을 하였다.
짙은 붉은색을 띤 아름다운 보석.
그 보석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