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아크레프 제국의 위기 (5)
검은색 후드를 쓰고 있는 십여 명의 사람들.
모두 말을 타고 있었지만 대부분 천으로 된 로브나 가죽옷을 입고 있었으며 기사로 보이는 이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중 로브를 입은 자들.
그들의 옷 밖으로 드러난 피부를 보니 매우 창백해 보였다. 그 피부를 보건대 분명 외부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아닌 것 같았다.
그들 중 가죽옷을 입은 자들이 말에서 내려 에르시오의 일행이 머물렀던 자리를 유심히 살피기 시작하였다. 그러기를 한참. 이윽고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로브를 입은 자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이에게 귓속말을 하였다.
그 말을 들은 그는 잠자코 그 말을 들었다.
그런 다음 곰곰이 생각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놈들은 저쪽으로 갔다! 부지런히 가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비열한 웃음과 함께 흘러나온 말.
그 말에 가죽옷을 입은 이들이 곧장 말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들이 먼저 달려 나가자 다른 이들 또한 그들을 뒤따르며 나아갔다. 그리고 어느덧 그 신형이 점점 멀어져만 갔다.
그들마저 사라지자 이제 아무도 없는 들판.
어느덧 서늘한 바람만이 이곳을 채우며 잠시나마 쓸쓸함을 달래주었다.
* * *
칼슨 일행이 드레이크 영지에서 출발한 지 닷새가 훌쩍 지났다.
칼슨은 떠나기 전에 대략적인 상황을 엘리시아에게 전하였다. 흑마법사에 의한 제국의 참사. 그리고 3 황자의 위기. 이전에 흑마법사들을 상대해본 경험이 있던 그녀는 바로 그것을 이해하고 파악하였다.
하지만 현재 왕국에 여력이 되지 않아 적극적인 지원은 해줄 순 없었다. 자신이 직접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국왕으로서 국정을 운영을 해야 했기에 나설 수 없었다. 그래서 그나마 그들이 이동하는 데 최대한 편의를 봐줄 수 있게 하였다.
칼슨도 엘리시아에게 전력의 지원 따윈 기대하지 않았다. 지금 벤투스 왕국은 흑마법사인 세르보의 사건 이후 좀처럼 전력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많은 인재들이 죽어 나갔고 그 이후로 북방 야만족의 침입으로 인해 왕국이 많이 피폐해지고 말았다. 지금은 그것을 회복하는 데 집중해야만 했기에 도저히 여유가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지원을 바라는 것은 벼룩의 간을 빼먹는 짓이나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칼슨은 일찌감치 그것에 대한 기대를 접었었다.
어쨌든 간에 왕실에서 그들을 이동을 위해 최대한 편의를 제공하였다. 이동하는 각 영지에 서찰을 보내 그들에게 최대한 협조하도록 공문을 내렸고, 슬로페 왕국에도 협조문을 보내서 왕국을 지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해주었다.
그로 인해 아직 출발한 지 닷새밖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슬로페 왕국 서쪽 국경 근처까지 올 수 있게 되었던 것이었다.
한데 이곳까지 오는 중 일행은 이상한 소식을 하나 전해 들었다. 그것은 바로 3 황자 에르시오가 황제를 시해한 반역자라 하였다. 게다가 그는 황제뿐만 아니라 1 황자인 가레트마저 살해하고 많은 황족들을 죽음에 몰았다고 하였다.
그 위기의 순간에 2 황자인 마르코스가 일어서서 그를 물리치고 황실을 구했으며 현재 수배령을 내려 에르시오를 잡으려 하고 있다고 전해졌다.
마른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은 소식.
그 소식을 접한 나이아는 말도 안 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분명 2 황자 마르코스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라 말하였다.
칼슨 또한 그녀의 말에 십분 동의하였다.
비록 2 황자인 마르코스는 직접 보지 못해서 어떤 인물인지 파악하지 못했지만 3 황자 에르시오는 결코 이런 일을 벌일만한 인물이 못되었다. 아니 만약 일을 벌였다고 하더라도 성공했으면 했지, 이렇게 실패해서 도망자 신세가 될 만큼 어수룩한 사람은 절대 아니다.
결코 그가 선한 인물이라 볼 순 없었지만 그래도 무모한 일을 벌일 만큼 막 나가는 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칼슨은 꼭 나이아의 말이 아니어도 그 소식이 이상하다는 것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나이아에게 위로하듯 말하였다.
“네, 나이아 황녀님. 에르시오님이 그러실 분이 아니라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심려치 마시길 바랍니다.”
“흐흑…. 폐하를 시해하고 황실을 어지럽혔으면서 반성을 하지 못할망정. 그걸 아버지에게 누명까지 씌우다니…!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는 걸까요? 크윽…….”
현재 부친의 안위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쓰며 하루아침에 대역죄인이 되었으니 감정이 북받치는 것이 당연하였다.
결국 그녀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자수정 같은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며 한 방울씩 바닥을 적셨다. 그녀는 그렇게 한동안 흐느끼다가 이내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답답함과 억울함이 사무치며 가슴이 먹먹하였지만 이렇게 운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때 누군가 그녀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며 말하였다.
“기운 내세요, 황녀님. 이럴 때일수록 더 힘을 내고 독해지셔야 합니다.”
“아, 레일리님….”
나이아는 고개를 돌리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위로 묶어 올린 긴 붉은 머리가 유난히 돋보이는 여성이 머쓱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레일리.
에르미온과 같은 섀도우즈의 멤버였으며 상급 드루이드였다.
본래 숲과 평원에서 자연을 벗 삼으며 지내고 있던 그녀를 아드리안이 7년 전에 영입했다고 하였다.
그녀는 자연의 조화와 균형을 중히 여겼으며 그 때문인지 뒤틀린 힘을 사용해 세상의 균형을 깨뜨리는 흑마법사들을 무척이나 싫어하였다.
그녀가 나이아에게 위로하고 있을 때, 다른 남성이 넌지시 말을 하였다.
“그나저나 큰일이군요. 당장 흑마법사 놈들만 해도 골치가 아픈데, 제국 황실까지 점령당했으니…. 이거 참 상황이 정말 난감하게 되었습니다.”
잘 정돈된 머리와 수염이 눈에 띄는 흑발 남성.
그는 꽤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이었으며 등에는 커다란 대검을 둘러매고 있었다.
한쪽 눈에는 자상으로 인한 기다란 흉터가 있었으며 그 때문인지 평범한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수컷 냄새를 풍기는 야성미가 느껴졌다.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뭐 어쩌겠어? 그렇다고 놈들을 내버려 둘 것도 아니잖아. 안 그래, 조셉?”
“뭐, 그렇긴 하지요. 크큭.”
레일리가 한 말에 조셉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하였다.
조셉은 전직 용병으로 이미 10년 전에 소드 마스터에 올랐던 이였다. 그 당시 섀도우즈에 들어온 이였는데 그는 어릴 적 습관으로 인해 누구에게나 늘 존댓말을 하였다.
둘 말고도 섀도우즈의 멤버는 셋이 더 있었다.
그들은 7서클 마법사와 엑스 마스터, 그리고 트래져 헌터였다.
7서클 마법사는 헤론이라는 남성이었다. 과묵한 성격인지 평소에 늘 말이 없이 조용하였다. 하지만 그런 성격에도 불구하고 꾸밈에는 관심이 많아서 매일 새로운 옷을 입고 액세서리를 차는 등의 일을 번거롭게 여기지 않았다.
엑스 마스터인 자는 애나라는 여성이었는데 짧은 금발 머리에 근육질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큰 전투 도끼를 주무기로 하기에 소드 마스터 대신 엑스 마스터라고 부르지만 그 경지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람한 모습과는 상반되게 그녀에게는 소녀 같은 취미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독서와 자수.
늘 몸을 단련하였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책을 읽거나 손수건에 수를 놓았다. 그럴 때마다 레일리가 어울리지도 않는 짓 하지 말라고 타박하였지만 깔끔히 무시하며 꿋꿋이 자신의 취미활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트래져 헌터인 로툰.
그는 깡마른 체구의 사내였는데 차가울 것 같은 인상과는 달리 제법 수다스러운 자였다. 그는 이것저것 잡다한 지식도 많이 알고 있었는데 대화를 할수록 상당히 유쾌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칼슨 측에서도 6명의 사람이 합류하였다.
기사단장인 에드와 순찰대장인 우터. 그리고 마법 단장인 아르모와 정령사 에밀리, 에르미온의 제자인 레이나, 마지막으로 황녀인 나이아까지.
칼슨과 아드리안까지 포함하니 총 일행은 13명이 되었다.
다만 신속한 이동을 위해 수발들 병사들이나 하인들은 데려가지 않았다. 그렇기에 전체 인원 자체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대신 식사 준비나 야영 준비도 직접 해야만 했다. 최대한 여관을 이용하기 위해 도시나 마을을 들렸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노숙을 하게 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대장 격인 칼슨과 아드리안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이 각자 역할을 맡아서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섀도우즈의 사람들은 이런 일이 빈번한 듯 능숙하게 야영을 준비하였다. 그들의 주도하에 드레이크 영지의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텐트를 치고 음식을 준비할 수 있었는데 만약 그들이 없었다면 굉장히 힘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닷새 동안 이동한 끝에 그들은 간신히 이곳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조금만 가면 국경이 나타난다.
곧 국경을 넘게 될 그들은 조금 긴장을 하였다. 왜냐하면 여태까지는 슬로페 왕국에서 편의를 봐주어서 제법 편안한 이동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이 각 영지에 공문을 보내주어서 분쟁이나 제재가 가해지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것.
하지만 국경을 넘어서면 바로 글래툰 왕국이었다.
그곳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벤투스 왕국에 친분이 있는 곳이 아니었다. 물론 적대적이지도 않았지만 슬로페 왕국처럼 협조적일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전투나 분쟁을 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야 할 문제. 지금은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여야 할 때였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말을 타고 가고 있을 때 어디선가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병장기 소리와 함께 간간이 들리는 폭음.
소리가 미세하게 들리는 것이 상당히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가 분명하였다.
소리를 들어보니 어디선가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그것을 들은 아드리안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흠, 어디에서 싸움이라도 벌어지고 있는가 보군.”
“네, 파울러 님.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칼슨이 끄덕이며 답하였다. 그리고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제법 큰 숲이 보였다. 자신들이 진행 방향이랑은 조금 다른 방향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제국에 가야 했지만 그곳을 바라본 칼슨은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느껴졌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해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국경 근처에서 싸움이라니 뭔가 예감이 안 좋습니다.”
“그런가? 자네가 그리 생각한다면 한 번 확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예, 그리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드리안의 허락을 받은 칼슨은 자신이 앞장서 일행을 이끌고 그쪽으로 향하였다. 말을 타고 달려가니 숲 초입까지 단숨에 다가갈 수 있었다.
숲 안에 들어서니 소리가 더더욱 커졌다.
소리에서 비명 소리가 간간이 들리는 것을 보아 싸움이 점점 격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점점 안쪽을 향해 들어가자 어느새 나무들이 줄어들면서 공터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일단의 무리가 보였다.
검은 복장에 후드를 쓴 무리들과 기사들로 보이는 이들이 싸우고 있었다.
전투의 양상을 보니 검은 복장의 무리들이 가사들을 공격하고 기사들은 방어하는 양상으로 보였다.
기사들은 누군가를 지키면서 싸우고 있었는데 그는 뭔가 몸이 불편한 듯이 보였다. 그 때문인지 그를 지키는 기사들은 제대로 도망치지도 못하며 굉장히 힘들게 적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때 그들을 본 나이아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아, 아버지?”
그녀의 말에 칼슨 또한 눈을 크게 뜨며 놀라고 만다.
그녀의 아버지라니…. 그건 바로 3 황자가 아닌가.
그렇다면 저기 저 호위를 받고있는 사람이 3 황자라는 이야기였다.
그렇다. 복장이 단출해서 잘 몰라봤는데 안력을 높여 자세히 보니까 확실히 3 황자가 맞았다.
그렇다면 그들과 싸우는 이들은 대체 누군가?
“이런, 흑마법사들이로군!”
아드리안이 인상을 쓰며 말하였다. 그러고는 곧장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