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영지가 제일 강함-144화 (144/162)

143화 아크레프 제국의 위기 (4)

화마는 순식간에 그 주변을 잠식하며 어둠을 환하게 밝혔다.

그리고 이내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

“반역자들이 여기 있다! 모두 저들을 잡아라!”

그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병사들의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에르시오와 그의 호위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분명 여관을 나와 도시를 빠져나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모든 게 순조로워 보였다. 그러나 현 상황은 잔인하게도 그 순간을 한낮 꿈처럼 만들어버렸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사방에서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대로 가만있다가는 꼼짝없이 포위당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제퍼슨은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줄을 단숨에 끊어버렸다.

그리고 기사들에게 말하였다.

“말을 잃은 기사들은 각자도생하도록 해라! 그리고 나머지는 전하를 모시며 이곳을 재빨리 벗어난다!”

비정한 명령에 기사들은 동요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안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료들에게 짐이 되고 전하께 폐를 끼치는 것보다는 자신이 희생하는 것이 백번 나아 보였다. 그리고 지금 같이 포위하며 덮쳐오는 형국에서는 오히려 흩어져서 적의 이목을 흐리는 것이 살아남을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결심을 한 기사들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각오를 다지면서 마음을 굳게 먹었다.

늘 목숨 바쳐 주군에게 충성할 것을 다짐해 왔던 기사들.

그것은 본분이었고 목표였으며 자신을 대표하는 신념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것을 증명할 순간이 다가왔다.

타다다닥!

한 기사가 먼저 발걸음을 떼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연이어 움직이는 나머지 기사들.

그들은 최대한 기척을 드러내면서 이동하였다.

그래야 자신의 주군에게 조금이라도 적들의 이목을 줄일 수 있었기에.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지자 그들은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하였다.

“아크레프 제국에…!”

한 기사의 구령 같은 포효. 그것을 들은 나머지 기사들이 따라서 목소리를 높였다.

“…무한한 영광을!”

그들의 비장한 음성이 제퍼슨의 심장을 관통하였다.

굳은 표정이었지만 얼굴에 미세한 떨림이 보였다.

그도 사람이었기에 이것이 얼마나 비정한 명령이었는지 잘 알았다. 하지만 이것이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

자신의 주군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한 일이라도 할 수 있었다.

“…나머지 기사들은 전하를 모시며 나를 따른다!”

그 말과 동시에 박차를 가하며 달려 나갔다. 그의 심정을 느낀 기사들 또한 불편한 마음을 억누르며 뒤따라갔다.

그들의 호위를 받고 있던 에르시오 또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무리 그들이 기사라고 하지만 자신을 위해 희생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속으로만 남겨두어야 했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를 잘 알기에 더더욱 자신의 목숨을 중히 여겨야 했다. 자신의 어설픈 양심 따위보다 그들의 희생이 훨씬 더 무겁고 고귀하였으니까 말이다.

말을 타고 달리는 와중에도 병사들의 발걸음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이제는 곳곳에 횃불이 들어섰기에 칠흑 같은 어둠은 더 이상 그들을 지켜주지 못하였다.

“이럇!”

다시 한번 박차를 가하였다.

지금은 그저 그들이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있는 힘껏 달릴 수밖에 없었다.

휘이익─ 휘익─ 휘익─

푹!

히이이이이잉~

쏟아지는 화살에 한 기사가 타고 있던 말이 맞았다. 갑작스런 통증에 말은 달리다 말고 울부짖으며 발광을 하였다.

기사는 애써 진정시키려 하였지만 말의 흥분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고삐를 끌어당기며 혼신의 힘을 다하였지만 얌전해지기는커녕 점점 더 날뛰며 기사를 곤혹스럽게 했다.

“이런, 씨발!”

뜻대로 말이 움직이지 않자 욕이 튀어나았다.

전방을 바라보니 점점 멀어지는 자신의 일행들이 보였다. 몇몇 동료들이 뒤돌아 자신을 보았지만 속도를 멈추지는 않았다.

제퍼슨 또한 그가 뒤처진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 상황에 그를 챙겨줄 순 없었다.

“…티모시는 포기한다.”

단호한 제퍼슨의 목소리.

그것은 동료를 향한 일말의 동정심마저 끊어버리고 말았다. 지금 같은 상황에는 이런 감정의 파편마저 사치에 가까웠으니까.

동료들이 멀어지면서 사라지자 티모시는 자신이 버려졌다는 것을 알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현실이 달가운 것은 아니었다. 문득 가슴 한편으로 외로움과 서러움이 밀려 들어왔다.

거기에 야속함과 섭섭함이 버무려지면서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굳게 먹었다.

자신이 기사라는 사실을 주지시키면서 사명감으로 자신을 무장시켰다. 그러자 거짓말같이 사라지는 부정적인 감정들.

이윽고 들썩였던 호흡이 가라앉으며 혼란스러웠던 정신에 평온이 깃들었다.

그런 그의 심정이 전해졌는지 뜰썩이던 말이 어느새 잠잠해졌다. 말을 다시 뜻대로 다룰 수 있게 되자 티모시는 일행을 뒤쫓아 가려 하였다. 그러나 이내 적들이 그곳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그가 만약 일행들을 따라간다면 주군에게 큰 위협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티모시는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일행이 간 방향이랑 다른 방향을 향해 달려 나갔다.

일부러 소리를 내어 그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 행동에 수많은 추적병들이 그를 향해 쫓아갔다.

슬쩍 뒤를 보니 수백 개의 횃불들이 보였다. 성난 고함 소리와 거친 함성 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다.

마치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위태위태한 모습.

하지만 그는 두렵지 않았다. 자신이 이들에게 이목을 남길수록 주군을 비롯한 일행이 더욱 안전해질 테니까.

어느새 그의 입가엔 미소가 서려 있었다.

* * *

다그닥다그닥─

정신없이 달리고 있는 에르시오와 호위들. 뜻하지 않은 추적에 몇몇이 낙오하였지만 그래도 그들은 무사히 그곳을 빠져나온 듯 보였다.

어느덧 날이 밝아오는지 하늘 한 구석에 여명이 깃드는 게 보였다. 어두웠던 시야가 트이면서 저 멀리까지 시선이 닿았다.

제퍼슨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적의 기척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 안전히 확보되어 보이자 현재 자신들이 어디쯤 왔는지 궁금하였다.

떠오르는 햇살을 방향 삼아 보건대 이쪽이 동쪽임에 틀림이 없었다. 방위를 확인한 제퍼슨은 지도를 펼쳐서 자신들의 위치를 확인해보았다.

그는 주변의 지형지물을 일일이 살펴보았다. 그리고 지도와 대조해 보았다. 저 멀리 위치한 산등성이와 드문드문 눈에 보이는 숲, 그리고 넓게 펼쳐진 평지 등등. 지도에 표시된 것을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어 가며 위치를 가늠해 보았다. 그러기를 한참.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국경을 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엄한 방향으로 가진 않았다.

밤새 정신없이 달리느라 허튼 곳으로 갈 줄 알았는데 다행히 맞게 길을 가고 있었던 것.

이대로 몇 시간만 말을 타고 달리면 국경을 넘는다.

국경 너머에는 글래툰 왕국이 있었다.

글래툰 왕국은 대륙에서 제국과 사이가 좋지 않은 몇 안 되는 왕국 중 하나였다.

모르긴 몰라도 그곳으로 넘어가면 더 이상 제국의 추적이 들어오기는 힘들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리 생각한 제퍼슨은 에르시오에게 상황을 이야기하였다.

그의 말을 들은 에르시오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글래툰 왕국에 간다고 해도 제국의 위협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걸세.”

“예에? 어째서 그렇습니까?”

에르시오의 말에 이해가 가지 않았던 제퍼슨이 반문하였다. 그의 물음에 에르시오가 쓴웃음을 지으며 답해주었다.

“아무리 제국과 사이가 안 좋다지만 그들은 제국과 인접해 있네. 그런데 반역자인 우리가 그곳으로 간다면 어떻게 되겠나?”

“흐음, 저희를 환영하지 않겠습니까? 적의 적은 동지이니 말입니다.”

에르시오의 질문에 제퍼슨은 곧장 대답하였다. 딱히 틀린 말로 보이진 않았지만 에르시오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어갔다.

“우리가 단순히 좀도둑이나 산적이라면 경의 생각이 맞네. 허나 우리는 그런 잡범들이 아니라네. 바로 대역죄인이란 말일세. 아, 물론 정말 죄인은 아니지. 하지만 제국 곳곳에서는 우리를 그렇게 알고 있으니까 반역자라고 봐야겠지. 그래, 그래서 이런 대역죄인들이 자신들의 왕국에 들어온다면 상황이 어찌 흘러가겠는가?”

“…글쎄요. 저는 아둔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답을 하지 못하는 제퍼슨. 이윽고 에르시오가 웃으며 답을 해주었다.

“아마 우리가 글래툰 왕국에 들어선다면 그쪽에서는 사력을 다해 우리를 사로잡으려 할 걸세. 어지간하면 생포하겠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죽여서라도 우리의 신병을 확보할 걸세. 그리고 그대로 제국에 갖다 바치겠지.”

“예? 글래툰 왕국에서 우리를 사로잡아 제국에 바친다는 말씀입니까? 글래툰 왕국이 왜 그런 짓을 합니까? 거기는 우리 제국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에르시오의 말에 제퍼슨은 놀란 눈을 하며 되물었다. 자신의 상식으로는 그의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에 에르시오가 그에게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자네 말대로 글래툰 왕국은 우리 아크레프 제국을 싫어하지. 허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네.

핵심은 두 나라 간의 힘의 차이가 너무 크다는 거지. 세부적인 것은 제하더라도 단순히 군사력만 따진다면 글래툰 왕국은 제국의 1할도 안 되니까.

그런데 그런 강대한 제국의 반역자들이 자신들의 왕국에 들어온다? 이건 대놓고 제국에 명분을 주는 일이 아니겠는가. 제국의 병력이 글래툰 왕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명분 말이야. 물론 글래툰 왕국은 그것을 결코 원하지 않을 것이야. 그러니 우리 신병만 확보해서 제국에게 넘길 테지. 굳이 전쟁을 할 게 아니라면 말이야. 그것도 패배가 확실한 전쟁을 말이야.”

“아…. 정말 그렇겠습니다.”

이유를 알게 된 제퍼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하였다.

그렇다면 글래툰 왕국 말고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일단 글래툰 왕국 쪽으로 이동했으면 좋겠군.”

“전하, 하지만 방금 글래툰 왕국으로 가면 안 된다고….”

또다시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을 한 제퍼슨. 이에 에르시오는 다시 웃으며 말을 하였다.

“국경을 넘지는 않을 걸세, 다만 그쪽으로 흔적을 남기기만 하면 된다네. 제국의 추적에 혼선을 주자는 거지. 그렇게 시간을 벌고 우리는 국경선을 따라 이동하면 되네. 그리고 이곳으로 가는 거지.”

그렇게 말하고는 지도에 한 곳을 가리켰다. 제퍼슨 또한 눈을 가늘게 뜨며 그곳에 있는 글씨를 읽어보았다.

그곳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슬로페 왕국.

글래툰 왕국 넘어서 위치한 이 왕국은 대륙에서 제법 유서 깊은 왕국 중 하나였다. 현재 제국에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곳 왕실이 벤투스 왕국이랑 혈맹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벤투스 왕국에는 자신의 딸인 나이아가 있었다.

그녀에게 전령을 보냈으니 이미 상황을 잘 파악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미 자신을 돕기 위해 어떠한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가 머물고 있는 드레이크 영지였다.

그곳의 영주인 드레이크 공작에게도 분명 이야기를 전했을 터. 흑마법사와 싸웠던 그라면 현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도움을 줄 것이다.

물론 국경선을 타고 가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였다.

까딱하다간 제국의 추적과 글래툰 왕국의 공격을 동시에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가야 할 길을 정하였다. 그리고 곧장 말에 박차를 가하며 움직였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그들.

그렇게 에르시오와 호위 기사들이 그곳을 떠났다.

그 후 몇 시간 뒤.

어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곳에 나타났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