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아크레프 제국의 위기 (1)
“고마워요, 드레이크 공작님. 공작님 말씀이 맞아요. 이렇게 울고 있어봤자 나아지는 것은 없죠.”
칼슨의 말에 그녀가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린 듯하였다.
소녀 같은 여린 마음에도 불구하고 감정을 잘 추슬렀다. 역시 제국의 황녀답게 상황 판단이 빠르고 이성적이었다.
굳은 의지가 담긴 그녀의 눈빛.
그녀는 칼슨을 바라보며 간곡한 어조로 부탁하였다.
“드레이크 공작님, 비록 염치없지만 저를…, 저희를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미세한 떨림이 느껴지는 그녀의 음성.
그 울림에서 그녀의 감정이 그대로 느껴졌다.
두려움과 미안함, 그리고 간절함까지.
칼슨은 살짝 고민하였지만 이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답해주었다.
“예, 물론이지요, 황녀님.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 드레이크 공작님….”
칼슨의 호의에 감격한 나머지 나이아는 말을 잇지 못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그가 거절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생각하였다.
큰 전쟁을 치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여력이 없는 것은 둘째 치고 냉정하게 봐도 그가 자신들을 도울 이유는 없었다. 그저 내세울 거라고는 짧은 인연을 내세운 간곡한 호소뿐.
그것으로 그에게 일말의 동정을 기대하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게 주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참으로 고맙고, 미안하고 또 부끄러웠다.
“정말 고마워요. 공작님. 이 은혜는 꼭 갚을게요. 반드시요.”
어느새 떨림이 가시고 또렷해진 그녀의 목소리.
확신에 찬 음성에서 그녀의 의지가 분명하게 느껴졌다.
칼슨은 딱히 대가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저 흑마법사 놈들을 없애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을 뿐. 거기에 겸사겸사 상대에게 빚을 얻는 것이었으니 딱히 수고스럽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는 자신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하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아니어도 흑마법사들이라면 눈에 불을 켜며 달려드는 이들이 있지 않은가?
‘어서 파울러님에게 연락을 해봐야겠군.’
섀도우즈.
대륙을 수호하는 비밀스러운 단체.
그들에게 흑마법사들이 있다고 알려준다면 본인들이 앞장서서 나설 것이 분명하였다. 자신도 물론 나설 것이지만 8서클의 마법사가 함께한다면 모르긴 몰라도 굉장히 큰 힘이 될 것이다.
칼슨은 나이아에게 도와줄 것을 약속한 후 곧장 섀도우즈에게 서찰을 보내었다. 그쪽에서 준비해주었던 전령새가 있었기에 그들에게 연락이 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사흘 후.
파울러를 비롯해 섀도우즈의 멤버 몇 명이 영지로 찾아왔다. 그 인원이 5명에 불과하였지만 한 명 한 명이 범상치 않은 이들이었다.
칼슨은 그들을 환대하였다.
각각의 사람들과 통성명도 하며 이야기도 나누었다. 어차피 함께 흑마법사들과 싸워야 할 전우이니 서로를 알고 친해지는 것이 좋았다. 그들 또한 같은 생각이었는지 칼슨 쪽 사람들과도 안면을 트면서 대화도 나누며 제법 친근하게 대하였다. 다행히 서로 모난 사람이 없던 터라 반목하는 일은 없어 보였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칼슨은 그들과 함께 제국으로 길을 떠났다.
* * *
제국 동쪽에 위치한 드호프 백작령에 있는 도시 팍스갠더.
그곳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고 이야기되는 포를레아 여관.
팍스갠더에서 몇 안 되는 특급 여관인 이곳에 오늘 십수 명의 인원들이 묵으러 왔었다. 얼핏 차림새로만 보다면 평범해 보이는 이들로 보였지만 그들은 이곳에서 제법 큰 숙소를 잡은 귀빈들이었다.
보통 이런 큰 손님들은 진상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자잘한 요구 따윈 하지 않았다. 거기다 비록 그들이 원해서였지만 외진 숙소를 제공하고도 오히려 요금은 원래 가격보다 3할이나 더 챙겨주었다.
예상외의 수입에 여관 주인 토마스는 입이 찢어지고 말았다.
이런 호구, 아니 우량 고객은 자주 오지 않았다. 비록 하루를 묵는다지만 서비스를 잘해준다면 단골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토마스는 그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모두 후드를 쓰고 있어서인지 정확한 인상착의를 알 수 없었다.
그들을 지켜본 토마스는 그들의 정체가 조금 궁금하였다. 하지만 여관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그저 요금만 확실히 받으면 되었기에 일말의 호기심은 바로 접어두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오늘은 돼지를 잡기로 하였다. 그는 곧장 주방으로 가서 요리사에게 돼지 통구이를 준비시키게 하였다.
토마스의 주문에 요리사는 문제없다고 말하며 오전에 해체해놓은 돼지를 꺼내왔다.
오랜만에 만찬을 준비하게 된 주방에서는 활기가 넘치기 시작하였다. 요리사의 성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주방 식구들. 그들도 간만에 고기 요리를 맛볼 수 있게 되어 한껏 들떠 있었다.
그렇게 주방에서 저녁 준비가 한 창일 때 귀한 손님들은 숙소에서 짐을 풀고 있었다.
다들 정신없이 짐을 풀고 빨래를 옮기며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 한 남성은 거실 테이블에 앉아 쉬고 있었다.
“후우…….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제국을 벗어날 수 있겠군. 하아…하아…….”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하는 남성. 후드를 쓰고 있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드러나는 하관을 보건대 대략 중년 정도의 사내로 보였다.
홀로 편히 앉아 있는 걸로 봐서는 그가 제일 높은 사람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의 호흡이 매우 거칠었다. 게다가 몸을 떠는 걸로 봐서는 분명 어딘가 아픈 게 분명했다.
그가 그렇게 쉬고 있을 때 짐을 정리한 한 사내가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건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표정을 보니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품속에 유리병을 꺼내더니 아파 보이는 상대에게 건네주었다.
“고맙네, 비즐리 경.”
그것을 받은 남성은 감사를 표하며 후드를 걷었다. 그러자 그의 은발 머릿결이 조명에 비치며 은은하게 빛이 났다.
그런 빛나는 은발 머리에 전하라고 칭할만한 사람은 제국에서도 손에 꼽았다.
바로 3명의 황태자 후보자들.
그 3명의 황자들 중 그는 바로 3 황자 에르시오였다.
그는 비즐리 경에게 받은 유리병의 마개를 열고 단숨에 들이켰다. 최상급 포션이 목을 타고 넘어가면서 몸을 괴롭히던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후우……. 이제 좀 살 것 같군. 그런데 이게 마지막 병인가?”
“예,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전하.”
“하아…. 그럼 어쩔 수 없지. 이곳을 벗어날 때까지 참는 수밖에.”
“죄송합니다. 전하.”
“후우…….”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매만지는 에르시오. 그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때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 * *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전.
그날은 유난히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화창한 날씨였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고 바람 또한 시원하여 절로 기분이 좋은 그런 날이었다.
에르시오 또한 상쾌한 기분으로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오전 업무가 생각보다 많지 않아 여유롭게 처리하였다.
차녀인 나이아가 보내오는 드레이크 산 무구 또한 그 품질이 뛰어나 주변인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두 달 전에 칼슨이 북방 야만인들 처리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이아가 그와의 관계에 진전이 있었으면 했지만 아직 그쪽으로는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듣기로는 벤투스 왕국의 왕녀, 아니 이제 여왕인 엘리시아와 염문이 있다고 하던데 나이아의 말로는 터무니없는 소문이라고 하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어느덧 시종들이 와 식사를 가져왔다. 본래 가족들이랑 식사하는 에르시오였지만 최근 그의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있는 상황.
차녀인 나이아는 벤투스 왕국으로 간지 벌써 1년이 다 되었고, 장남인 데이몬은 서쪽에 있는 레스타니아 왕국으로 가 그곳의 정보와 상황을 전해주고 있었다. 장녀인 비앙카는 남쪽의 에롬 왕국의 왕세자와 결혼하고 지금은 왕세자빈이 되었다.
‘흐음, 오늘은 왠지 식욕이 없군…….’
이렇게 혼자 식사를 할 때면 유독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가 생각났다. 젊은 시절 서로 첫눈에 반해 결혼한 두 사람.
이렇다 할 힘이 없던 자작가의 영애였기에 주변의 반대가 굉장히 심하였다. 하지만 그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에르시오는 꿋꿋이 그들을 설득하여 결국 그녀와 혼인을 맺었다.
그래서 그녀와 결혼한 지 불과 5년 만에 둘은 세 명의 자녀를 둘 수 있게 되었다.
1남 2녀.
자신과 그녀의 사랑의 결실과도 같은 아이들이었다.
하루하루 아이들이 커가면서 자신의 행복 또한 점점 커갔다. 그렇게 계속 이런 행복이 지속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어느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원인을 알 수 없던 병에 걸려버린 아내.
싱그러운 그 미소는 어느새 사라졌고 아름답던 얼굴 또한 피골을 상접한 몰골이 되고 말았다.
마치 저주와도 같은 병마. 제국의 내로라하는 치료사들이 달려들었지만 차도를 보이기는커녕 상태가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갔다.
모두가 손을 놓았지만 에르시오는 포기하지 않았다.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서 치료법을 찾았으며 몸에 좋은 영약을 구해다 그녀에게 먹였다.
하지만 그의 그런 간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내는 어느 날 힘없이 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마지막 숨을 내쉴 때 그녀는 웃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던 그 미소.
그녀는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이에게 웃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 그녀를 떠나보낸 에르시오는 한동안 절망하였다.
자신의 심장이 타들어 가는 것만 고통에 울부짖었다.
식음을 전폐하며 시름시름 앓아갔다.
그렇게 앓다가 죽어 그녀를 따라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아이들이었다.
누워있던 자신을 보며 흐느끼던 아이들.
어린, 아들과 딸들의 눈에서 슬픔이 느껴졌다.
특히 막내인 나이아의 눈은 아내와 닮은 보랏빛이었다.
그렇게 보고 있자니 마치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그는 일어섰다.
그녀와의 사랑의 결실인 그들을 위해서라도 일어서야만 했다.
그리고 그렇게 15년이 지났다.
탁.
아직 음식이 많이 남았지만 식욕이 없는지 그대로 포크를 놓았다. 지금은 많이 퇴색되었지만 그때 느껴졌던 슬픔의 잔향이 어렴풋이 피어올랐다.
이렇게 마음이 어지러울 때는 일에 몰두하였다.
정신없이 일을 하다 보면 어느덧 감정에 무감각해졌으니까.
식사를 마친 그는 곧장 업무를 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그의 호위 기사들이 움직였다.
그들과 함께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가보았다.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검은 마수들.
이전에 있던 혈사에서 봤던 마수들이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다. 왕실 근위병들과 기사들이 달려들어 싸웠지만 그것들의 기세는 더욱 커져만 갔다.
게다가 적은 마수뿐이 아니었다.
온몸이 뒤틀어져 있는 병사들. 머리에 녹색 불을 뿜고 있던 기사까지. 이전에 나이아의 보고에서 보았던 괴물들 또한 여기저기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에르시오는 그들의 무서움을 알고 있던 터라 맞서 싸우기보다는 도주를 택하였다. 다행히 지금 황실에는 그의 자녀들이 없었다. 에르시오의 호위 기사들과 근위병들은 그와 함께 도주하면서 목숨 바쳐 적들을 막아내었다.
그러다 도중에 2 황자를 보았다.
팔이 잘려 외팔이가 된 마르코스. 하나 남은 그의 손에 익숙한 이의 머리가 들려있었다.
“폐…하……?”
그것은 황제의 머리였다.
마르코스는 해맑은 미소를 보이며 자신의 머리에 왕관을 썼다. 그리고는 크게 웃으며 소리쳤다.
“이제 내가 이 나라의 황제다! 제국의 황제! 크하하하하하!”
그 모습을 본 에르시오는 말문이 막혔다.
언제나 과묵하고 나서길 꺼려했던 자신의 형제인 마르코스가 저렇게 미친놈일 줄은 상상을 하지 못하였다.
그렇게 어이없이 그를 보고 있을 때.
마르코스의 시선이 에르시오를 향하였다.
그러고는 환하게 웃었다. 마치 맛있는 먹잇감을 발견한 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