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새로운 국면 (3)
솔직히 칼슨은 이름 따위야 뭐라 부르든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철갑 거인 같은 것으로 불리는 것보다 확실히 괜찮아 보였고 달리 생각나는 것도 없었기에 그렇게 명명하도록 하였다.
아무튼 그렇게 지어진 기간테스의 추가 생산도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자원이 많이 소모되었고 시간 또한 굉장히 오래 걸렸다. 영지 개발인력을 총동원해서 몇 개월 후에나 한 기가 더 만들어질 듯했다.
비록 양산이 어려웠지만 어차피 운용할 수 있는 기준이 최소 소드 마스터이기 때문에 기간테스를 외부에 반출하지 않는 이상 큰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한 가지 좋은 일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유적의 기계들을 추가로 가동시킬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에밀리의 마나가 증가하여 가능하게 된 일이었는데 그동안 잊고 있다가 이번에 여유가 되어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어찌 되었든 그로 인해 드레이크 영지의 병장기들 생산이 대폭 증가하였고 외부로 수출하는 물량 또한 늘어나 영지의 재정이 더욱 풍족하게 되었다.
그렇게 다시 영지가 바쁘게 돌아가고 있을 무렵 왕실에서 새로운 소식이 전해져왔다.
그것은 바로 엘리시아가 벤투스 왕국의 새로운 여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바로 즉위식이 거행되는 날.
* * *
로버데인에 있는 왕성.
흑마법사들에 의해 끔찍하게 유린당하였던 이곳도 어느덧 안정이 되어갔다. 한때 적막했던 성의 로비도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릴 정도로 활기가 넘치게 되었다.
대관식을 위해 몸단장을 하고 있던 엘리시아. 주변에 시녀들이 그녀에게 옷을 입혀주고 장식을 달아주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머리 장식을 달아주던 시녀장이 뭔가가 이상한 듯 엘리시아에게 물었다.
“여왕 폐하,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있으십니까? 표정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아, 아니야. 그저 왕위에 오르게 되니 조금 긴장했을 뿐이야.”
시녀장의 말에 손을 저으며 괜찮다는 시늉을 하였지만 사실 그녀는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였다.
자신도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왕위에 오르기로 결정하면서부터 쭉 이런 기분이 지속되었다.
“후우…….”
답답함에 절로 한숨을 내쉬자 단장을 도와주고 있던 시녀들이 자신들이 뭔가 잘못이라도 저질렀는가 싶어 화들짝 놀라며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죄, 죄송합니다. 여왕 폐하. 저희가 미숙하여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렸습니다. 부디 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덜덜덜.
두려움에 몸을 떨며 자비를 구하는 시녀들. 그녀들이 그러는 것도 당연했다. 전대 국왕의 무자비한 학살로 인해 왕실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있었다. 그 여파가 아직까지 몸에 배어있는지 몸이 굳어진 채 바들바들 떨기만 할 뿐. 그런 그들을 보며 엘리시아는 머리를 매만지며 조용히 입을 연다.
“그만 일어나거라. 내 너희들 때문에 그런 게 아니니 그리 겁먹을 필요 없다.”
“아, 아닙니다. 여왕 폐하.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제, 제발 살려주십시오. 흑흑흑.”
이미 잔뜩 겁을 집어먹어서인지 엘리시아의 말에도 불구하고 울고불고하며 살려달라며 빈다. 그 상황을 지켜본 시녀장이 답답한지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근처에 있던 여성 근위병들에게 눈짓을 하자 고개를 끄덕인 그들이 울고 있는 시녀들을 끌고 나갔다.
밖으로 나가면서도 연신 살려 달라 외치는 시녀들. 그 모습을 본 엘리시아는 미간을 접은 채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이윽고 새로운 시녀들이 들어오며 다시 몸단장이 시작되었고 엘리시아는 불편한 마음을 숨긴 채 그저 묵묵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아직 즉위식이 거행되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왕성 중앙 홀이 꽤나 북적거렸다.
많은 이들이 그곳에 모여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새로운 국왕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 대부분 왕국의 유력한 귀족들이었으며 그 중 제국의 황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흐음, 결국 엘리시아 왕녀가 이 왕국의 주인이 되고 말았네요. 세상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요. 왕위 서열상 최하위였던 그녀가 이렇게 여왕이 되다니…. 안 그런가요, 드레이크 공작님?”
아름다운 은발에 자수정 같은 보랏빛 눈을 하고 있는 미녀가 칼슨의 옆에 서서 말을 하였다.
그녀는 바로 제국의 황녀인 나이아였다. 본래 드레이크 무구를 수입, 유통하는 담당으로 드레이크 영지에 있었는데, 이번 즉위식을 핑계로 칼슨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이곳까지 그를 따라왔다. 칼슨 또한 그녀가 옆에 있으니 귀찮은 이들이 들러붙지 않았기에 흔쾌히 허락하였던 것.
다소 빈정거림이 섞인 그녀의 말에 칼슨은 차분한 목소리로 답해주었다.
“여왕 폐하께서는 일국의 국왕이 되기에 그 역량이 부족하지 않으십니다. 저는 폐하께서 훌륭한 여왕이 되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으음, 그런가요? 저는 잘 모르겠던데요. 드레이크 공작님은 엘리시아 왕녀를 너무 높게 평가하는 것 같으세요.”
“황녀님, 이제 왕녀가 아니라 여왕 폐하입니다. 부디 호칭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아, 그렇군요. 이전 호칭이 너무 익숙해져 버려 제가 그만 실수를 했네요. 미안해요.”
“예,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시 그런 결례를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의 부탁드립니다.”
“쳇, 알았어요. 아직 정식 즉위도 하지 않았는데 실수할 수도 있지. 따지고 보면 아직 여왕은 아니지 않나요? 공작님은 너무 각박하시네요. 흥!”
칼슨의 계속되는 당부에 조금 심통이 난 그녀는 콧방귀를 끼면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조금 철없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칼슨은 피식 웃었다. 하긴 그녀의 나이는 이제 막 스무 살. 한창 혈기 왕성할 때였다.
칼슨의 나이도 아직 25살이어서 차이가 별로 안 날 것 같지만 전생의 나이까지 더하면 60이 넘는다. 물론 겪지 않은 칼슨의 성장기 때의 삶을 제외하더라도 중년에 가깝다. 그러니 어린 그녀의 모습이 얼마나 귀엽게 보이겠는가.
거기다 제국의 황녀이기에 일국의 왕녀를 어느 정도 낮춰보는 것 또한 이해가 되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사리분별 못할 정도로 어리석지도 않았다.
지금 태도는 당장 저래 보여도 엘리시아가 즉위식을 거쳐 정식으로 여왕이 되면 눈치껏 알아서 예의를 차릴 것이다.
칼슨이 그렇게 생각 있을 때 누군가 그들 곁으로 다가오며 인사를 하였다.
“오랜만일세, 드레이크 공작. 나이아 황녀님도 그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금발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건장한 체격의 장년. 바로 라델리안 공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라델리안 공작님. 몸은 어떠십니까?”
“안녕하세요. 라델리안 공작님. 네, 저는 별일 없었어요. 흑마법사들과의 싸움에서 다치셨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신가요?”
그를 본 두 사람은 인사를 하며 안부를 물었다. 이에 라델리안 공작은 활짝 웃은 채 가슴을 두드리며 말하였다.
“하하,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늙은이가 이래 봬도 소드 마스터입니다. 그깟 부상쯤이야 금방 낫습니다. 하지만 그때 당시 만약 드레이크 공작이 해독제를 내어주지 않았다면 아마 죽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하하하.”
허심탄회하게 웃으며 말하는 그는 다시 칼슨을 바라보며 진중하게 이야기하였다.
“정말이지 고맙네. 드레이크 공작. 그때 입었던 은혜는 내 기필코 꼭 갚도록 하겠네.”
두 손을 잡으며 진심 어린 눈빛으로 칼슨을 바라보는 라델리안 공작. 그 시선이 부담스러운 칼슨은 머쓱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라델리안 공작님. 함께 싸운 전우를 챙기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그러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하, 전우라…. 그래 자네 말이 맞네. 그리고 그 전우에게서 목숨을 빚졌으니 갚아야 하는 것도 맞고 말이야.”
“아니,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무튼 조만간 내가 큰 선물을 줄 테니 그때 가서 사양하지 말게나.”
“라델리안 공작님…….”
아무래도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인 것 같았다.
나이도 있으신 양반이 보기와는 다르게 고집이 있다. 이렇게까지 주겠다고 하는데 이 이상 거절하는 것도 실례였다. 칼슨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제야 만족스런 얼굴이 된 라델리안 공작. 저렇게까지 하는 것을 보면 그래도 상당히 값나가는 것을 선물해줄 모양이다. 칼슨에게 호의적인 것도 있었지만 본인의 체면도 걸려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라델리안 공작과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벌이고 있던 동안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한쪽에 있던 문이 열리며 누군가 큰 목소리로 말하였다.
“엘리시아 던 카르시아 전하께서 납십니다.”
궁정 의전관의 외침에 많은 이들이 그곳을 주목하였다.
그곳에는 여러 사람이 걸어 나오고 있었는데 그 한 가운데 엘리시아가 서 있었다. 화려한 예복을 갖춘 모습이었다.
국왕이 되는 순간이었지만 표정은 조금 어두웠는데 칼슨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그 얼굴에 더욱 그늘이 졌다. 하지만 이내 입을 굳게 다물며 엄숙한 표정을 짓더니 경건한 자세로 준비된 상석에 앉아 자리를 잡았다.
그녀가 준비되어 보이자 그것을 확인한 의전관은 곧장 즉위식을 진행하였다.
그의 입에서 형식적인 연설문이 읽혀 나왔다. 제법 긴 연설이 끝나고 즉위를 선포하자 왕관을 가져오는 시종들.
왕관이 자신의 앞에 들어서자 엘리시아는 두 손으로 그것을 집어 자신의 머리에 올린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새로운 여왕의 탄생이었다.
짝짝짝짝짝────
여기저기서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홀의 분위기가 조금 흥분된 모습이자 엘리시아가 손을 들면서 진정시켰다.
소리가 잦아들자 그녀는 곧장 즉위 선서를 하였다.
즉위 선서의 내용 또한 딱히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저 선대 국왕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흑마법사들의 잔혹함을 이야기하였으며 나라를 구한 칼슨과 다른 이들이 행한 공적에 대해 찬사를 하였다. 한 참 열변을 토하던 그녀는 진심으로 왕국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제법 길었던 선서를 마무리하였다.
짝짝짝짝짝짝────
그녀의 선서가 끝나자 그곳에 있던 이들이 다시 한번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여왕 폐하 만세!”
“벤투스 왕국이여 영원하라!”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와 함성 소리가 홀 안을 가득 메웠지만 엘리시아는 좀 전처럼 제지를 하지 않았다. 이미 자신이 할 말은 끝났으니까. 그저 살며시 미소를 띤 채 손을 흔들며 화답을 취할 뿐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조용히 퇴장하는 그녀. 그것을 끝으로 새 여왕의 탄생을 알린 즉위식은 성공적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 * *
즉위식이 끝나고 한 계절이 지났다.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는 무더위 속에 사람들은 잠시나마 찾아온 평화를 만끽하고 있었다.
혹독한 전쟁의 여파가 아직 조금 남아있기는 하였지만 이제 대부분 회복되어갔으며 오히려 이전보다 분주해지며 활기로 가득 찬 곳도 있었다.
바로 이곳 드레이크 영지처럼 말이다.
드레이크 영지 내 중심 도시 네트비아.
최근 이곳은 늘어난 인구로 인해 도시 규모를 더욱 확장하면서 대규모 공사를 하고 있었다.
전반적인 설계는 제국에서 함께 온 스테파노가 맡았는데 그의 소망대로 혁신적인 건축물을 지었다.
그것은 바로 30층이 넘는 고층 건물.
칼슨이 원래 살던 곳에서는 흔히 볼 수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었다.
건축은 제국에서 데려온 기술자들을 중심으로 드레이크 건설의 핵심 인재와 영지의 마법사들까지 몽땅 지원하였다.
이전이라면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시도.
물론 그 건물뿐이 아니었다.
그 건물을 중심으로 6개의 중심 도로가 뻗어나가고 거기에 맞춰 10층 이상의 고층 건물들이 들어선다.
특히 모든 건물들은 마력석을 이용하여 승강기를 만들었으며 실내 조명 또한 마력석을 사용해 만들었다.
추가로 난방 시스템에 관해서는 칼슨이 제안을 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보일러였다. 생각보다 겨울이 춥지 않은 이곳에 굳이 바닥 난방을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수도관을 만들면서 온수를 사용하기 위해 스테파노에게 넌지시 이야기했는데, 역시나 새롭고 혁신적인 것을 좋아하는 그답게 극찬하며 그에 맞는 설계를 진행하였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신도시 사업.
어느덧 네트비아는 거대한 공사판이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