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반역이 아닌 구국 (10)
쾅!
거칠게 문이 열리며 어전 안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곳을 보니 이 사태의 원흉인 국왕 데로스가 보였다.
그는 왕좌에 앉아있었는데 그 몰골이 이상했다.
피골이 상접한 얼굴로 입을 벌린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모든 생명력을 잃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 녀석은 이미 죽었다. 아마도 흑마법사가 그를 죽인 듯했다. 시야를 돌리자 근처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바로 세르보였다. 그는 이쪽을 보고 반가운 표정을 한 채 기뻐하며 말하였다.
“오오! 오셨군요. 드레이크 백작님. 이제 살았습니다.”
마치 구원이라도 받은 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감사를 표하는 세르보. 이전 측근이었던 엘리시아도 그를 보며 반가워하였다. 예전에 혼자 왕성을 나왔을 때 그를 놔두고 온 것이 마음에 걸렸었는데 이렇게 무사한 모습을 보게 되어 상당히 반가웠다.
“체스터 백작님, 살아계셨군요. 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요?”
“왕녀님, 그것이…. 크으윽!”
“체스터 백작님!”
갑자기 말을 하다 만 세르보가 고통스런 표정을 하며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본 엘리시아가 깜짝 놀라며 다가가려 하자 칼슨이 손으로 막았다. 그의 행동에 엘리시아는 왜 그러느냐는 얼굴로 말하였다.
“드레이크 백작님? 왜….”
“아니,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서 그렇습니다. 왕녀님.”
“예? 뭐가 말인가요? 도대체 뭐가 이상하다는 거죠?”
“흑마법사들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죽어있는데 체스터 백작만 살아 있잖습니까?”
칼슨의 던진 의문에 엘리시아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하였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어떻게 이곳에서 혼자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인지. 생각을 좁혀가자 답이 한가지로 귀결되며 엘리시아는 경악하고 말았다.
“서, 설마? 체스터 백작님이…….”
“네, 아무래도 흑마법사들과 동조 혹은 협력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어, 어떻게 그런…! 정말 드레이크 백작님이 하신 말이 사실인가요, 체스터 백작님?”
엘리시아의 물음에 세르보는 순간 말을 하지 못하였다. 허나 이내 해맑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하하, 드레이크 백작님이 오해하시는 겁니다. 제가 흑마법사들이랑 협력한다니요. 어떻게 저를 그렇게 볼 수 있습니까? 지금 농담하시는 거지요?”
“…….”
태연한 그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칼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냉소적인 시선으로 세르보를 바라보았다.
확신에 찬 그의 눈을 바라본 세르보. 그 또한 입을 굳게 다문 채 점점 표정이 굳어갔다. 그리고 이내 큰소리로 웃으며 말을 하였다.
“하하하하하하하! 이런 도저히 안 통하는군요. 과연 드레이크 백작님이십니다.”
결국 시인하고 마는 세르보. 이에 엘리시아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며 입을 열었다.
“체, 체스터 백작님! 어떻게 당신이 이럴 수 있나요? 몇 대째 우리 왕실에 충성하던 가문의 사람이었던 당신이 어찌….”
“크크큭, 그래, 그랬었지. 나의 가문은 말이야. 대대로 왕실에 꼬리치며 흔들거리던 강아지 같았어. 허나 나는 아니야. 내 야망을 채우기에는 그것으론 턱없이 부족했거든.”
“뭐라고요? 야망? 그것 때문에 배신한 건가요? 데로스 오라버니, 그리고 나도 당신을 믿었는데 어떻게….”
“뭐,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배신이니 뭐니 하는 거 진부하지 않아?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이쯤 접어두자고. 그리고 드레이크 백작.”
“…….”
“혹시 내가 이렇게 순순히 정체를 밝히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아?”
“뭐?”
순간 세르보는 입꼬리를 잔뜩 끌어올리며 이를 드러냈다.
이에 뭔가 섬뜩한 느낌을 받은 칼슨. 왠지 모를 불안감에 오러 블레이드를 끌어 올리며 달려들었다. 허나 세르보는 이미 만반의 준비가 되었었다.
“%##%튁#&*%$#핅^#!”
알 수 없는 언어를 내뱉자 그의 바닥에 커다란 마법진이 발동하였다. 그리고 그의 생명력이 그곳에 빨려 들어가면서 실시간으로 그의 생기가 사라져갔다. 끔찍한 몰골이 되어가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녀석. 광기가 가득한 눈으로 칼슨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미친놈이 대체 무슨 짓을 벌이는 거야!”
불길하고도 음습한 기운이 칼슨의 피부를 사정없이 찔러 들어갔다. 이것은 분명 마족에서 느꼈던 기운. 허나 전에 황궁에서 겪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하였다.
털썩
마침내 모든 생명력을 소진한 세르보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버렸다. 그는 생명을 다하는 그 순간까지 눈을 번뜩이며 웃고 있었다.
사아아아아아아아────
마법진이 그려진 그 바닥에 검은 원이 생성되었다. 대략 반경 10미터는 넘어 보이는 시커먼 바닥. 그곳에 느껴지는 강대한 힘에 칼슨은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하였다.
이윽고 그곳에서 커다란 팔 하나가 뻗어 나왔다.
쿠웅!
뻗어 나온 팔이 바닥을 짚고 몸을 끌어 올리자 그것의 상체가 드러났다.
슈우우욱───
머리 크기만 1미터 가까이 되는 그것. 암녹색의 피부를 가진 놈은 이마에서부터 길게 이어진 뿔이 달려있었다. 머리카락을 물론 눈썹 털도 없었고, 깊이 들어간 이목구비는 사람과 닮았지만 동시에 이질감이 들 만큼 차이도 있었다.
스륵
상체를 온전히 드러낸 그것은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검은자위 안에 붉은 눈이다.
확실한 마족의 특징.
허나 마족치고는 뭔가 느낌이 달랐다.
그보다 좀 더 절대자에 가까운 느낌이랄까?
놈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자 칼슨은 꼼짝할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무형의 힘 때문에 온몸이 구속되어버린 것 같았다.
“이건 도대체 어떻게….”
갑자기 신체를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칼슨은 당혹스러웠다.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없었다. 게다가 그 같은 처지가 된 이는 칼슨만이 아니었다.
“허억! 드레이크 백작님! 왜 몸이 안 움직이는 거지요?”
“여, 영주님!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엘리시아를 비롯해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꼼짝 못 한 채 그대로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거대한 괴물은 꽤나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곧장 시선을 돌려 세르보의 시체를 보았다. 그리고는 미간을 접으며 곤란한 표정을 하였다.
【이런 소환자가 죽어버렸군.】
머릿속을 울리는 소리.
언어를 초월한 의념으로 하는 의사소통 방식.
칼슨을 비롯한 몇몇은 이 같은 현상을 겪은 적이 있었다.
그들도 놀랐지만 처음 겪는 이들은 더더욱 놀랐다.
아무튼 그 거대한 녀석은 소환자인 세르보가 죽어버려서 매우 난감해하였다. 소환한 대가로 그의 부탁을 들어줘야 했지만 소환자가 죽어버렸으니 어찌해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때 세르보가 가지고 있던 뼈로 된 조각에서 회색빛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며 시체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 회색빛 기운은 세르보의 몸을 둘러싸며 서서히 흡수되어 갔다. 그것이 전부 흡수되자 세르보의 눈이 떠졌다.
그리고 조금씩 움직이더니 쓰러진 몸을 세우며 일어섰다.
분명 죽었는데 다시 살아 움직이는 세르보. 되살아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에는 생기 하나 없었다. 마치 시체와도 같은 모습. 눈에는 푸르스름한 안광을 뿜어내며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그 모습을 본 거대한 녀석은 조금 놀란 표정을 하며 말을 하였다.
【이런, 언데드로 되살아났군. 몸의 상태를 보아하니 리치인가?】
“만나보게 되어 영광입니다. 비겁의 론도이시여.”
마치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 그 거슬리는 소음에도 불구하고 론도는 미소를 띤 채 묻는다.
【그래. 나를 소환한 이유가 무엇이냐? 원하는 바를 말하라.】
이에 세르보는 안광을 밝히며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였다.
“눈앞의 저자들의 죽음을 원합니다.”
【그렇군. 알겠다. 그건 어렵지 않지. 그런데 말이야…….】
갑자기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끄는 론도. 그의 태도에 세르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의문스러워 하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론도의 답변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네놈이 나를 소환할 때 쓰인 생명력이 사실 많이 부족하였다. 그렇기에 온전히 너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 그러니 너에게 내 힘 일부를 나눠 줄 테니 네가 저놈들을 처리하라.】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 말에 화들짝 놀란 세르보. 기껏 소환하였건만 자신보고 처리하라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란 말인가. 비겁의 론도. 말 그대로 비겁한 놈이었다.
어처구니없어하는 세르보의 의사는 제쳐둔 채 론도는 자신의 말대로 그에게 힘 일부를 나눠주었다. 그리고는 입꼬리를 올리며 작별을 고한다.
【그럼 난 이만 가보도록 하겠다. 원하는 바를 꼭 이루길 기원하마.】
“비, 비겁의 론도시여! 이대로 가면 저는 어쩌란 말입니까!”
세르보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검은 원안으로 들어가 버린 론도. 그리고 곧 그 검은 원마저 사라지며 석재로 된 바닥이 드러났다.
론도가 사라지자 칼슨을 비롯한 그곳에 있던 이들의 속박했던 무형의 힘이 사라졌다. 그로 인해 운신이 자유로워진 일행들. 호흡을 가다듬으며 자세를 잡았다.
“하아…하아.”
정신을 차리며 전방을 바라보니 거대한 괴물은 온데간데없고 이제 그곳에 세르보만 서 있었다. 칼슨은 놈을 처치하기 위해 단숨에 도약 오러 블레이드를 끌어 올리며 검을 휘둘렀다.
치이이이이익─── 콰앙!
“크으윽!”
완숙한 오러 블레이드로 내리쳤건만 칼슨은 세르보에게 흠집 하나 주지 못하였다. 그의 몸을 둘러싼 무형의 힘에 가로막혀 더 이상 검이 다가가질 못하였다.
상대의 매서운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세르보 또한 놀란 눈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는 사라진 론도가 주고 간 힘을 살펴보았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이 힘은 가히 가공할 만큼 압도적이었다.
과연 비겁의 론도. 비록 말석이었지만 게다가 일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준 마왕의 힘은 실로 대단하였다.
그것을 확인한 세르보는 그 힘을 펼쳐보았다.
“시발!”
뭔가 섬뜩한 느낌에 칼슨이 욕을 내뱉으며 몸을 피하였다.
콰과과과과광! 콰직 우드득! 콰드득!
“크어어어억!”
“으아아악!”
단 한 번 손을 뻗쳤을 뿐인데 폭발과 함께 십수 명의 사람들이 날아가 버렸다. 그 위력을 체감한 세르보의 얼굴에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고 큰소리로 외쳤다.
“하하하하! 감히 오랫동안 준비했던 내 계획을 망쳐놓은 놈들! 내 손수 그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다!”
“모두 피해!”
놈의 손짓에 주변에 폭발이 일어났다. 그 여파에 휩쓸리는 기사와 마법사들. 그 엄청난 위력에 모두 혼란에 휩싸였다.
마왕의 힘에 한껏 취하며 의기양양해진 세르보. 그는 그 힘을 이용하여 흑마법을 사용하였다.
《생명력 흡수》
“크허어어억!”
“캬아아악!”
그의 손길에서 뻗어 나온 검은 기운이 다섯 명의 기사들의 생기를 빨아들였다.
마왕의 힘을 빌어 사용한 흑마법 치고는 실망스런 위력이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였다. 다시 흑마법을 쓰려던 찰나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그의 몸에 꽂혔다.
푸욱!
“아아앗!”
이미 죽어서 통증은 없었지만 갑작스런 피해에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내었다. 분명 마왕의 힘으로 주변 공격을 무위로 돌리고 있었는데 어떻게 저 화살은 그것을 뚫고 들어왔는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고작 화살 한 발이었다. 세르보는 자신을 공격한 이를 바로 찾아내었다.
그리고 그를 향해 마왕의 힘을 발현. 그곳에 큰 폭발이 발생하였다.
콰아아아아아앙!
“크윽!”
신속하게 움직였지만 폭발의 범위가 커서 벗어나지 못하며 큰 충격을 받고 날아가 버린 우터. 매우 강한 정신력을 가진 그였지만 제법 큰 타격을 입었는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비틀거렸다.
상대가 죽지 않은 것을 본 세르보는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힘을 쓰려하였다. 하지만 어느새 그에게 접근한 칼슨과 에드가 오러 블레이드를 뿜어내며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