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반역이 아닌 구국 (4)
살랑.
바람이 불며 에밀리의 청록빛 머릿결이 물결치듯 휘날렸다. 거기다 한층 더 파랗게 변한 그녀의 눈이 보석처럼 빛이 났다. 아마도 스카디엘라의 계약으로 인해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듯해 보였다.
이제 10대 후반에 다다른 그녀는 어엿한 숙녀가 되었다.
순수한 마나로 인해 청순하고 매우 아름답게 변한 그녀. 많은 이들이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저 일방적인 애정이었을 뿐 에밀리는 그에 관심조차 없었다.
칼슨의 명을 받은 그녀는 전쟁을 선포하기 전부터 라델리안 공작을 지원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최대한 빨리 도착하기 위해 적은 병력만을 대동한 채 이동하였는데 모두 드레이크 영지의 순찰대원들이었다. 물론 순찰대장인 우터 또한 그녀와 함께하였다. 그 때문에 그들은 사흘 만에 그곳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들을 공격한 이들이 저들인 것을 안 국왕군의 지휘관. 그는 이제 2천도 안 남은 병력들에게 포효하듯 명령하였다.
“저기 저놈들을 찢어 죽여라!”
“크아아아아!”
“케하아아!”
그의 명에 대부분의 괴물 병사들이 그들을 향해 다가간다. 거기다 녹황색 불을 뿜어내는 괴물 기사 또한 그들과 같이 목표를 향해 움직였다.
그렇게 일제히 달려드는 모습을 보니 마치 지옥에서 악마들이 뛰쳐나오는 것 같았다. 그 흉포하고 끔찍한 모습에 겁을 먹을 만했지만, 우터와 순찰대원들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으며 차가운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스윽.
우터가 손을 들어 올리자 순찰대원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당기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활대가 급격하게 휘며 탱탱하게 당겨진 줄이 파르르 떨려온다. 그들이 들고 있던 활은 일반 장궁병들이 들고 있는 큰 장궁이 아닌 복합궁.
몬스터 부산물로 장인들이 만든 순찰대원 전용 활이었다.
어느새 국왕군의 괴물들이 수백 보 앞까지 다가왔다.
꽤나 먼 거리였지만 활의 사거리는 그 이상이었다. 게다가 지형상 이점도 있었기에 우터는 망설이지 그대로 손을 내렸다.
그 신호에 맞춰 일제히 쏟아지는 화살비.
500개의 화살이 하늘을 덮으며 날아왔지만 놈들은 인성이 없는 괴물. 게다가 이 정도쯤이야 그들에게 그다지 타격도 없을 것이기에 무시하고 계속해서 돌진하였다.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화살에 꽂혀 고슴도치처럼 변해갔지만 놈들의 걸음은 전혀 늦어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일반 화살로는 피해를 주기 힘들어 보였다. 그러나 잠시 후.
“키에에엑?”
“카햐아아아악!”
철퍼덕─!
선두의 몇 놈이 중심을 잃으며 그대로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숫자는 더욱 늘어나며 순식간에 그들의 걸음이 멈추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던 적 지휘관은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몰랐다. 변한 자신들은 화살 공격 따윈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는다. 그런데도 저렇게 맥없이 쓰러지는 것이 이해가 안 되었다. 그가 그렇게 당황하고 있을 때 또다시 하늘에서 화살비가 쏟아졌다.
푹! 푹! 푹! 푹! 푹! 푹! 푹!
무수히 내리는 화살에 의해 많은 괴물들이 과녁 신세가 되고 말았다.
많은 화살이 꽂혔지만 그들이 움직이는 것은 아무 문제 없었다. 하지만 이내 서서히 그것이 둔해지더니 다시 중심을 잃으며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을 본 지휘관은 쓰러진 괴물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그 샛노란 눈이 커지며 놀라고 말았다.
부글부글.
화살이 꽂혀있는 부위가 시퍼렇게 변하며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처음엔 그것을 보고 이해가 안 갔지만 곧 뭔가가 떠오르며 깨닫고 말았다.
“서, 설마 독인가?”
분명 이것은 독이다. 그것이 아니면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렇게까지 극렬한 반응을 보일 정도면 상당한 맹독.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또다시 화살이 하늘을 뒤덮었다.
“이런 씨발…!”
순간적으로 내뱉은 욕지거리. 그리고 그의 머리에 화살이 박혀버리고 말았다.
푸욱!
“크아아아아악!”
다른 괴물들과는 달리 지능이 제법 높았던 지휘관은 화살이 자신의 머리에 꽂히자마자 타오르는 통증을 느꼈다.
확실히 이것은 독이 분명하였다.
일반적인 화살이면 절대 이렇지 않았다.
그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우와, 생각보다 독의 효과가 좋네요, 순찰대장님?”
속절없이 쓰러지는 괴물들을 보며 에밀리가 말하였다.
이에 우터는 살며시 웃으며 대답하였다.
“그럼, 영주님이 거금을 들여 특별히 제조한 독이니까.”
“그렇긴 하지요.”
우터의 말대로 이 독은 일반적인 독이 아니었다.
독을 보유했던 몬스터들에게 추출한 극독 중의 극독.
독 한 병을 정제하기 위해 몬스터의 독낭을 수백 개를 사용하였다. 한 병의 가치로만 따져도 대략 금화 3천 개가 훌쩍 넘는다. 그런걸 500개를 만들었으니 들어간 돈은 자그마치 금화 150만 개. 어지간한 영지는 절대 운용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그렇게 많은 비용을 쏟은 만큼 보시다시피 효과는 확실했다. 역시 뭐든 비싼 만큼 좋은 법이었다.
그러나 모든 괴물들이 독에 통한 것은 아니었다.
기사가 변이한 녹황색 불꽃을 뿜어내는 놈은 화살에 꽂히고도 꿋꿋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말이다.
화살 공격이 더 이상 통하지는 않았지만 이곳에는 순찰대원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드레이크 영지 최강 전력 중 하나인 에밀리. 그녀는 지그시 손을 내밀며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와 동시에 뿜어져 나오는 극한의 냉기.
그 혹한의 기운을 그대로 맞아버린 놈들은 그 날랜 발이 서서히 굳어지더니 종국에는 그대로 얼어버렸다.
그것을 본 에밀리는 이번엔 땅에다 마나를 불어 넣었다.
그러자 솟구쳐 오르는 근육질의 남성. 아니 땅의 중급 정령인 노에스였다.
노에스의 몸은 어느덧 암석화가 되어 단단한 돌덩이처럼 변하였다. 그리고 곧 얼어버린 괴물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콰아아앙─────! 퍼어억!
후드드드득
충돌과 함께 그대로 산산조각이 되어버린 괴물의 몸체.
얼음조각이 되어버린 그것들은 여기저기 비산되며 땅에 떨어졌다.
그렇게 달려들던 괴물들을 모두 처치한 드레이크의 지원군은 라델리안 공작의 군대와 싸우고 있던 괴물들의 후방을 공격하였다.
휙─ 휙─ 휙─
푹! 푹! 푹! 푹!
일제사격이 아닌 조준 사격으로 차분히 놈들의 뒤통수를 친 그들. 맞을 당시 무감각하다가 화살에 묻은 독으로 인해 계속해서 쓰러지는 괴물들.
어느새 서 있는 놈들이 아무도 없어지자 그제야 라델리안 공작도 그들을 발견하곤 놀란 눈이 되었다.
“저, 저들은 대체 누구지? 아니, 저기 저자는 하인츠 경이 아닌가?
“하인츠? 아, 혹시 그 귀궁이라 불리는 사내 말입니까? 그렇다면 저들은 분명 드레이크 백작이 보낸 지원군이겠군요!”
“그래, 그렇다면 아까 그 거대한 폭풍과 한파도 혹시 이들이…….”
노스데일 백작과 대화를 하던 중 말을 끊는 라델리안 공작. 왜 그런지 노스데일 백작이 의아해했지만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느덧 우터와 에밀리 등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
“괜찮으십니까, 라델리안 공작님?”
서로 눈앞에 다다르자 우터가 예를 갖춰 인사를 하였다.
이에 라델리안 공작 또한 정중한 태도를 취하며 인사를 하였다.
“물론 괜찮다네.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어. 정말이지 고맙네. 하인츠 경.
“아닙니다. 저는 그저 영주님의 명에 따를 뿐입니다.”
“그래, 내 드레이크 백작에겐 따로 감사의 말을 전하도록 하겠네. 그래도 고마운 건 마찬가지니 너무 그리 겸연한 태도를 취할 필요는 없네.”
“예, 알겠습니다. 라델리안 공작님.”
그렇게 훈훈하게 대화를 하던 중 라델리안 공작의 눈에 에밀리가 눈에 들어왔다. 신비로운 청록빛 머릿결에 사파이어를 박은 듯한 눈동자. 마치 요정 같은 모습의 아름다운 숙녀였다.
절로 시선이 가게 만드는 외모. 라델리안 공작은 그녀가 누군지 궁금해졌다. 그 미모도 그렇지만 이 같은 흉흉한 전장에 연약해 보이는 여성이 있다는 게 무엇보다 특이했기 때문.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우터는 그에게 에밀리를 소개해주었다.
“이쪽은 에밀리라고 합니다. 드레이크 영지의 정령사지요.”
“아, 그 말로만 듣던 정령사가 바로 이 아가씨였군. 이거 만나보게 되어 영광이오. 에밀리 양.”
환한 미소로 그녀에게 인사를 하는 라델리안 공작. 난생처음 보는 정령사가 신기한지 눈이 제법 초롱초롱한 느낌이었다. 그 시선이 제법 부담스러웠지만 그래도 상대가 호의적으로 다가오자 에밀리 또한 싱긋 웃으며 인사를 하였다.
“왕국에 위명이 자자하신 공작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예법은 잘 모르지만 그래도 나름 정중한 태도를 취하며 인사를 하였다. 아름다운 그녀의 화사한 미소가 그녀를 본 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라델리안 공작 또한 햇살 같은 그 모습에 잠시 멍하고 있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어갔다.
“크흠, 아니오. 그렇다면 방금 그 재해, 아니 폭풍과 한파를 일으킨 이가 그대였겠군. 정말이지 엄청난 광경이었소. 내 평생 그런 이적은 여태까지 본 적이 없었소이다.”
“과분한 칭찬 감사합니다. 라델리안 공작님.”
“하하하, 정말이지 드레이크 영지의 사람들은 죄다 겸손하다니까. 아무튼 그대로 인해 우리가 무사할 수 있었소. 다시 한번 감사드리오.”
그렇게 다시 감사의 인사를 한 라델리안 공작은 부상자들을 챙기며 부대를 정비한 후. 드레이크의 지원군과 함께 왕성이 있는 로버데인으로 향하였다.
* * *
그 시각 칼슨이 이끄는 드레이크 본대는 국왕군의 본대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콰아앙! 콰앙! 콰과광! 콰아앙!
“키에에에엑!”
“카르르륵!”
드레이크의 포격에 한껏 유린당하고 있는 국왕군의 괴물들. 하지만 생각 외로 동요하지 않으며 포격을 맞으면서도 무리하게 진격해온다.
그렇게 포격을 무시하며 강행한 대가로 병력의 3분의 1 정도가 날아갔지만 그래도 나머지 놈들은 무사히 접근하며 드레이크 군을 위협하였다.
달려드는 수천 마리의 괴물들을 막아내기 위해 방패병들이 커다란 방패를 앞세우며 전열을 세웠다.
쾅! 콰앙! 콰직! 콰앙!
“크으으윽! 이거 왜 이렇게 쎄?”
“미친! 씨발, 버텨!”
기마로 부딪혀오는 것보다 더욱 강한 힘을 느끼자 순간 욕이 튀어나오는 방패병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흐트러짐 없이 잘 막아내고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든든히 버티어주고 있을 때 드레이크의 마법사들이 놈들에게 마법을 시전하였다.
《화염구》
《화염구》
《화염구》
농익은 화염을 품고 있는 불의 구슬들이 놈들에게 날아가 폭발.
콰아앙! 콰앙! 퍼어엉! 퍼엉!
화르르르르
뜨거운 화염에 뒤덮이며 참혹한 모습으로 타들어 갔다.
“키에에에엑!”
“꾸어어우어!”
인성이 상실한 놈들이었지만 불에 타들어 가는 통증은 고통스러웠는지 끔찍한 비명 소리를 토해내며 죽어 나갔다.
눈앞에서 제법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지만, 안쪽에 오거 가죽을 덧대어 단열 처리를 해놨기에 방패병들은 예전과 달리 수월하게 버티어내었다.
순조롭게 적들을 막아내며 차분히 숫자를 줄이고 있던 그때 어디선가 이질적인 괴성이 들려왔다.
섬뜩하고도 어디선가 들어보았던 그 소리.
칼슨은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한 그의 표정이 심히 구겨졌다.
“이런 젠장!”
진한 보랏빛의 4족 보행 괴생명체. 매끈한 점액질 피부가 유난히 돋보이는 그놈은 게걸스럽게 이를 드러내며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