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혼란스런 왕국의 정세
“예? 지금 국왕폐하께서 형제분들을 모두 처형하셨다고 하셨습니까? 제가 방금 들은 말이 정말 사실입니까?”
“네, 들은 대로에요. 우리가 제국에서 복귀한 그때 데로스 오라버니가 다른 오라버니를 만난다고 했었잖아요. 사실 그때 일을 벌였다고 하더군요.”
“허, 어떻게 그럴 수가…. 도대체 왜 그런 일을 벌인 겁니까? 대체 그들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처형을 한 겁이냐 말입니다?”
칼슨이 어처구니없어하며 묻자 엘리시아는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반역이라고 하더군요.”
“예? 반역이라고요? 그게 정말입니까?”
“예, 명분은 그래요. 하지만 사실 그건 말이 안 되지요. 두 오라버니는 현재 지지기반이 몽땅 없어져 왕위를 노리기는커녕 제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들거든요. 그런 상황인데 반역이라니요. 그게 가당키나 한가요?”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는 얼굴로 한껏 토로하는 엘리시아. 그 말을 들은 칼슨 또한 매우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엘리시아의 말.
“아무래도 데로스 오라버니가 변한 거 같아요. 이전 생애에 스반 오라버니가 그랬던 것처럼요. 아니 지금 생각해보니 그 행보가 아주 똑같아요.”
“네? 설마 그런……. 혹시 폐하를 만나보셨습니까?”
“아니요,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서둘러 궁을 빠져나왔어요. 혹시나 예전 스반 오라버니처럼 저에게 반역죄를 씌어 제거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렇군요.”
엘리시아의 말에 칼슨은 어안이 벙벙하였다.
물론 사람이 갑자기 변할 수는 있다. 하지만 각기 다른 이가 왕이 되자 똑같이 변한다고 하니 아무래도 의구심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왕이 되면 미쳐버리는 유전 인자나 저주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하지만 칼슨은 이내 고개를 젓는다. 그런 말이 있다는 것은 들어보지도 못했고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되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답은 한가지였다.
누군가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무슨 목적인지, 또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나마 제일 유력한 가설을 꼽자면 이것이라 봐야 했다. 생각을 정리한 칼슨은 엘리시아에게 질문하였다.
“혹시 최근 폐하의 주변에 수상한 이가 접근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왜 물어보시는 거죠? 아, 혹시 누군가 오라버니를 그렇게 만든 것이라 보시는 군요.”
“예, 아무래도 그게 제일 합당한 추론이라 보입니다.”
“흐음, 그러고 보니 우리가 사절단에 가 있는 동안 왕실에서 일하는 사람이 너무 많이 바뀌었어요. 듣자 하니 오라버니가 효율적인 국정운영을 한다는 명목으로 대대적인 인사개혁을 단행했더라고요. 기존에 있던 늙은 대신이나 관료들은 대거 퇴출시키거나 쓸데없는 죄목을 붙여 감옥에 보내버렸어요. 거기다 몇몇은 처형까지 당했지요. 그리고 이제까지 잘 모르는 인물들로 그 자리를 채워버렸어요.”
“잘 모르는 인물들이요? 그게 사실입니까?”
“예, 분명 처음 들어보는 이들이었어요. 그래서 따로 조사를 하였는데 대부분 지방 귀족들의 자제들이더라고요.”
“흐음…….”
대규모 인사개혁.
파격적인 그 행보가 이상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왕이 되면 누구든지 자기 측근들을 주변에 앉히고 싶어 하니까. 하지만 엘리시아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도저히 국왕의 측근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출신이 불분명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폐하께 접근하는 수상한 이는 딱히 특정하기 힘들겠군요.”
“네, 아무래도요.”
파고들어 갈수록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머리를 맞대어보아도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둘이 그 문제에 대해 골치아파하고 있을 때 문밖에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영주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목소리를 들어보니 에드윈이었다.
분명 왕녀와의 대화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았다는 것은 필시 어떤 급한 일이 생겼다는 것이다.
“들어와.”
드르르륵
칼슨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에드윈. 서둘러 왔는지 얼굴이 제법 붉어져있었다.
“그래, 무슨 일이지?”
“네, 그것이….”
그는 엘리시아를 슬쩍 쳐다보더니 잠시 말을 하기 주저하였다. 칼슨이 괜찮다고 손짓을 하자 에드윈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왕실에서 왕명을 가져왔습니다.”
“뭐, 왕명?”
“예, 지금 왕실에서 온 자가 내성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허…. 정말인가 보군.”
어이없는 표정을 한 칼슨은 이내 엘리시아를 보며 말하였다.
“혹시 뭐 짚이는 거라도 있습니까?”
“아, 아니요. 저도 왜 갑자기 왕명이 내려졌는지 알 수가 없네요.”
보아하니 꽤 당혹스러워하는 표정. 아무래도 그녀 또한 예상하지 못한 일인 듯하였다. 아무래도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칼슨은 에드윈의 안내에 따라 왕이 보낸 자를 보러 갔다.
그는 20대의 젊은 귀족으로 이번에 새롭게 뽑힌 사람으로 보였다. 인상을 쓰며 제법 근엄한 모습을 흉내 내고 있었지만 칼슨이 보기엔 아직 신출 티를 벗어내지 못한 애송이에 불과하였다. 그는 5명의 기사와 서른 명의 병사를 이끌고 왔는데 그들 모두 기세가 흉흉한 것이 분위기가 좋지 않아 보였다. 그는 칼슨이 다가오는 것을 보자 매서운 눈빛을 보이며 큰 소리로 말하였다.
“드레이크 백작은 왕명을 받들라!”
“…….”
듣도 보도 못한 놈이 자신을 향해 호통을 치자 조금 짜증이 밀려오는 칼슨. 하지만 왕명을 들고 왔다고 하니 그 내용이라도 들어보기 위해 절차를 따랐다.
“신 칼슨 드레이크 왕명을 받듭니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자세를 취하였다.
그러자 그자는 제법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서찰을 펼쳤다.
그리고 큰 소리로 그것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칼슨 드레이크 그대는 이번 제국으로 가는 사절단에 합류해 그곳에서 큰 활약을 하여 왕국의 명성을 드높였으니 짐이 큰 상을 내리도록 하겠다. 그러니 이 명을 받는 즉시 곧장 왕성으로 오도록 하여라.”
예상외로 호의 가득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칼슨은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꼈다. 그것은 엘리시아도 마찬가지.
상을 내리는 것은 좋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떠나야 한다니. 칼슨은 아무래도 그것이 걸렸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왕명을 가져온 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지금 당장 가야 하는 겁니까?”
“그렇다. 폐하께서 곧장 오라고 하셨으니까. 물론 호위나 시종들은 필요 없다. 그것은 이쪽에서 준비했으니까 말이다.”
그 말과 함께 그는 자신과 함께 온 기사와 병사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마도 저들이 호위할 인원인 것 같았다.
이미 준비를 단단히 한 듯 그대로 자신을 끌고 갈 태세. 조금 고민한 칼슨은 왕명을 가져온 이에게 다시 말을 하였다.
“송구하지만 지금은 너무 갑작스럽기에 차후에 준비를 한 후 가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뭐? 지금 왕명을 거역하는 것이냐?”
거절의 의사를 비치자 그는 다시 흉흉한 기세를 더욱 가세하여 소리를 높였다. 그가 그렇게 성을 내도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상을 준다고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레 왕성으로 출두하라는 것은 조금 이상하였다. 아니 솔직히 많이 수상하였다. 그런 상황에 무작정 따라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되었다.
“아닙니다. 다만 시간을 좀 달라는 겁니다. 아량을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닥쳐라! 감히 왕명을 거역하다니, 당장 네놈의 죄를 물어야겠다. 여봐라. 당장 이 죄인을 잡아라!”
그의 거침없는 언사에 칼슨은 어이가 없었지만 이미 이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곳은 엄연히 자신의 영지인데 무슨 자신감으로 저럴 수 있는지 의문이긴 하였지만 지금 그들이 하는 모양새를 보니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 듯하였다.
스릉─
검을 뽑으며 자신에게 다가가는 기사들. 그들의 눈에서 광기가 번뜩이는 듯했다. 병사들 또한 창을 앞세우며 위협하였다.
제법 살기를 뿜어내며 접근하지만 그래봤자 일개 기사와 병사들. 칼슨에겐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분명 이들도 알 터인데 왜 이러는 지 칼슨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 놈들을 상대하기 위해 검을 뽑는 것조차 아까웠다. 그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어느새 드레이크의 병사들이 나타나더니 그들에게 화살을 날린다.
휘익─ 휘익─ 휙 휙 휘이익─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수십 발의 화살이 그들에게 떨어지더니 그대로 고슴도치처럼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이후 그들의 모습을 본 칼슨은 눈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부아아아아악────
당장 절명해야 정상인 그들은 죽지 않았다.
화살이 꽂힌 그들의 몸이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더니 거대한 살덩이를 가진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이미 인간에서 한참은 벗어나 보이는 모습. 그것들은 광기 가득한 얼굴을 하며 계속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불쾌하고도 음습한 기운이 피부에 전해진다. 칼슨은 이 같은 것을 전에 느꼈던 적이 있었다.
“흑마법인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현재 왕실은 흑마법사들에게 잠식된 듯하였다.
국왕이 변한 것도 아마 그들의 짓인 것 같고.
“흐어어억! 괴, 괴물이다!”
그 흉측한 모습을 본 드레이크의 병사들은 사색이 돼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괴물은 그것들만이 아니었다.
기사들의 투과와 갑옷 틈 속에서 녹황색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그 불길은 제국 참사 때 봤던 마수가 가졌던 불길이랑 유사해 보였다. 그리고 왕명을 가져왔던 그 사람.
그자 또한 이제 인간의 탈을 벗어던지며 그 모습이 흉측하게 변해있었다. 어느새 말끔했던 얼굴에는 털들이 돋아있었고 이마에는 긴 뿔이 말리면서 자라났으며 몸 또한 크게 부풀어 올라 엄청난 덩치가 되었다.
“크오오오오오!”
마치 늑대인간처럼 변하는 느낌? 물론 외관상으로는 늑대인간이랑은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변신을 한 그 녀석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움직임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휘이익─
웬만한 기사 저리 갈 정도의 속도. 일반적이라면 그 엄청난 스피드에 상대가 당황을 해야 했지만 상대는 칼슨이었다.
스윽─ 서걱─! 서걱─!
“케헤에겍!”
순식간에 조각나 버린 놈의 형체. 이런 놈들에게는 비전 검술을 쓸 필요조차 없었다.
“크르르르르르.”
눈앞에 괴물을 처리했지만 후위에 있는 놈들에겐 동요하는 기색이 일말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피를 갈구하는 듯한 광기 어린 모습. 그것을 보니 이미 인성을 상실한 듯 보인다.
어차피 이들을 정상으로 되돌릴 수는 없어보였다. 그나마 빨리 죽여주는 것이 오히려 그들을 위한 것일 터.
결심을 한 칼슨이 그것들을 손수 베려 할 때. 그의 뒤에서 마법이 쏟아졌다.
《화염구》
《화염구》
《화염구》
십여 개의 불구슬이 그것들을 향해 쏟아졌다. 이미 영지 마법사들이 이곳에 도착해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콰아앙! 쾅! 콰광! 콰과과광! 화르르르르─
수많은 폭발과 함께 재가 되어버리는 괴물들. 허나 그 중 기사였던 개체는 그것을 피하며 칼슨에게 달려들었다.
총 5개체가 녹황색 불길을 뿜어내며 그를 위협하였지만.
스윽───
단 칼에 그것들을 잘라내 버리고 말았다.
털썩─ 털썩─ 후드드드득─
바닥에 떨어지는 놈들. 상하체가 잘려나갔음에도 불구하고 파닥파닥 움직이면서 인간 같지 않은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였다.
《소각》
화르르르르────
어느새 칼슨의 옆에 다가온 아르모가 그것들을 향해 불길을 뿜어낸다. 손에서 내뿜는 화염이 흡사 화염방사기를 연상케 하였다.
타닥! 타다닥! 타다다다닥!
마치 장작이 타듯이 마법의 불길에 사그라지는 놈들의 잔해. 그것을 지그시 바라본 칼슨은 살며시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전쟁을 시작할 것이다. 모두 차질 없이 준비하도록 해라.”
전쟁.
칼슨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단어는 이 혼란스런 정국을 바로잡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