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벤투스 왕국으로
서걱─
뭔가 베는 감촉이 들었지만 검은 그림자가 흩어짐과 동시에 놈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그곳에는 팔 한쪽이 잘린 채 놓여 있을 뿐이었다.
마족을 비롯해 모든 흑마법사 무리들이 처리되자 숨어있던 귀족들은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이제 살았다는 것을 깨닫고 안도감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 감정은 그것을 이뤄준 이들에게 고마움으로 바뀌었고 그리고 곧 환호로 변해갔다.
그때 박수 소리와 함께 누군가 다가왔다.
짝! 짝! 짝!
“정말 대단하오! 드레이크 백작!”
그는 1 황자인 가레트였다.
마수가 나타난 시점부터 한쪽 구석에서 몸을 피하고 있었는데 칼슨을 비롯한 벤투스 왕국의 인원들이 그들을 모두 정리하자 그때서야 몸을 움직인 것. 그 말고도 그의 측근 황족들 또한 모두 무사해 보였다. 그는 잔뜩 상기된 채 재차 칼슨에게 말을 하였다.
“마수는 물론 흑마법사들과 마족마저 물리친 그대에게 경의를 표하오.”
“……감사합니다. 1 황자 전하.”
그동안 숨어있다가 이제야 나온 그가 칼슨은 썩 맘에 들진 않았지만 이리 대놓고 자신을 칭찬하니 화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그가 나섰다고 해도 뭐 하나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혹시 어디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아, 괜찮네.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네. 정말이지 참으로 고마워.”
“아닙니다. 그런데 혹시 다른 분들은…?”
이곳에는 그 말고도 다른 황족들도 있었다. 그중 3 황자 에르시오도 있었고 말이다. 칼슨이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자 어느새 이쪽으로 다가오는 에르시오와 몇몇의 황족들. 그들 또한 잘 숨어있어서인지 상당히 말끔한 모습이었다.
환한 미소를 짓고 있던 에르시오. 그는 칼슨을 보며 기쁜 듯이 말을 하였다.
“정말 고맙네, 드레이크 백작. 자네 덕분에 살았어! 아, 형님도 살아계셨군요. 다행입니다, 정말.”
“흐음, 그래. 너도 무사해 보여서 다행이구나. 그런데 다른 황족들이 보이지 않는구나. 설마…….”
“네, 아마도…….”
에르시오가 굳은 표정을 짓자 가레트 또한 수심이 깊은 얼굴을 한다. 하긴 그렇게 많은 이들이 죽었는데 그중 황족 몇이 포함되지 않는 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분위기가 무거워질 때 나이아가 나서며 밝게 풀어보려 하였다.
“다른 분들이 희생된 것은 안타깝지만 그래도 저희들은 무사하잖아요. 솔직히 전 그 마족이 나왔을 때만 해도 여기서 죽겠거니 했어요. 다행히 여기 계신 드레이크 백작님을 비롯해 벤투스 왕국 여러분이 나서줘서 이렇게 무사할 수 있게 되었지요. 정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아, 아닙니다. 황녀님. 그리고 다른 황족분들이 희생된 것은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아니에요.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상황이 그렇게 된 걸 누구에게 따지겠어요. 안 그런가요, 아버지?”
나이아가 옆에 있는 에르시오에게 넌지시 말을 건네자 그는 헛기침을 하며 처져있던 분위기를 풀었다.
“흐음, 이거 우리를 구해준 은인을 앞에 두고 괜히 우중충한 분위기를 만들었구먼. 심려를 끼치게 해서 정말 미안하네, 드레이크 백작.”
“괜찮습니다. 다 이해합니다, 3 황자 전하.”
칼슨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에르시오는 고개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참으로 고맙네. 역시 새로운 대륙 10강은 배포가 남다르구먼. 하하하.”
그가 그렇게 웃으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려할 때.
입구 쪽에서 많은 병사들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마도 황실 근위대로 보였는데 그 중 가장 앞장 서있던 자가 다가오며 무릎을 꿇고 말을 하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황자 전하.”
“흐음, 근위대장이로군. 그래, 도대체 뭐 때문에 이제야 기어 나오는 건가, 응!”
그를 보며 잔뜩 으름장을 피우는 가레트. 표정이나 말투로 봐서는 제법 기분이 언짢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소란이 났는데도 불구하고 지금에야 나타났으니 그로서는 화가 나는 게 당연하였다. 눈앞에 1 황자의 표정이 안 좋다는 것을 느낀 근위대장은 침음을 삼키며 말을 이어갔다.
“크윽…. 저 그것이…. 습격을 당한 곳이 여기뿐이 아니었습니다.”
“뭐?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여기뿐이 아니라니? 그럼 다른 곳들도 흑마법사나 마수들이 들이닥쳤단 말이냐?”
“……예 그렇습니다. 게다가 황제 폐하와 2 황자 전하께서 크게 다치셨습니다.”
“뭐라? 폐하께서 다치셨다고! 거기다 마르코스까지?”
근위대장의 말에 가레트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아무리 흉악하고도 강한 흑마법사들이었지만 이곳은 제국의 황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놈들의 침입을 허락한 것을 넘어 황제까지 다치게 했다는 것을 알자 그는 너무나 어처구니없었다.
“제국의 위신이 정말 말이 아니로군. 그래, 폐하께서는 얼마나 다치셨는가? 설마 많이 중하신가?”
“다행히 크게 다치시진 않았습니다. 다만 연세가 있으셔서 제법 충격을 받으신 듯합니다. 지금은 병상에 누우셨습니다.”
“크윽, 이 씹어 먹을 흑마법사 놈들. 감히 황제 폐하의 옥체를 상하게 하다니……. 폐하께서 그리되실 동안 네놈들은 뭐 했느냐! 수천 명이 넘는 근위병들은 도대체 뭣을 했느냐 말이다! 내 이일을 그냥 넘기지 않겠다. 반드시 엄히 벌을 내릴 것이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전하. 폐하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불충의 벌이라면 신은 달게 받겠습니다.”
황제의 상태가 안 좋다는 것을 알자 가레트는 크게 분노하며 근위대장을 윽박질렀다. 이에 근위대장은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용서를 빌 따름이었다. 그의 진심이 어느 정도 느껴지자 한층 누그러진 가레트.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아마 그쪽 상황도 이와 같았으면 불가항력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황제의 목숨을 지켰다는 거를 다행으로 여겨야 할 터. 가레트는 한층 가라앉는 목소리로 다시 말문을 이어갔다.
“그래, 그리고 마르코스는? 2 황자의 상태는 어떠한가?”
“……2 황자 전하는 팔 하나를 잃으셨습니다.”
“뭐? 이런! 그래서…….”
“그래도 치료사들이 열심히 치료한 결과. 다행히 생명에는 큰 지장이 없습니다.”
“후, 그렇단 말이지. 그것참 다행이로군….”
한숨을 쉬며 얼굴을 펴는 가레트. 표정을 보니 안도해서인지 아쉬워서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미묘하였다.
제법 착잡한 표정을 한 그는 칼슨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오늘 우리를 구해줘서 정말 고맙소, 드레이크 백작. 그대 덕분에 나는 물론이고 이곳에 있던 모든 이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소. 내 이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도록 하겠소. 물론 황실에서도 그대에게 큰 보상을 할 것이오.”
“괜찮습니다. 저는 그저 당연한 일을 한 것뿐입니다, 전하.”
“아니오. 이것을 그냥 넘긴다면 도저히 우리 아크레프 황실의 체통이 서질 않소. 그러니 그대는 부디 사양하지 않길 바라오.”
“네, 전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칼슨의 수락에 가레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에르시오도 끼어들며 말을 하였다.
“나 또한 그 사례를 할 터이니 그리 알도록 하게. 생명의 은인인데 그냥 넘어갈 수 없지.”
“아…. 예, 그러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보답을 하겠다는데 더 이상 사양하면 상대방의 호의를 무시하는 거다. 자신이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알아서 주겠다는데, 굳이 거절할 필요가 있겠는가, 당연히 받아야 정상이다. 그리 생각한 칼슨은 만족스러워하며 제법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 *
황궁에 끔찍한 혈사가 있은 지 한 달.
그동안 벤투스 왕국의 사절단은 제국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많은 보상을 받았다.
검술 대회 부상으로 받은 목걸이 외 아티펙트도 추가로 하나 더 받았고 제국의 건축 기술자 스무 명을 벤투스 왕국으로 데려가 건축 기술을 이전받기로 하였다. 거기다 제국만이 거래를 해왔던 대수림의 엘프와의 거래에 물꼬를 터주기로 하였다.
그 외에 많은 재물을 받았는데 어차피 돈이 많은 칼슨에게는 앞서 받은 보상에 비해 큰 가치는 없었다.
부상을 당했던 황제와 2 황자는 다행히 회복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황제는 이제 너무 나이가 들어서 예전처럼 국정을 돌보지 못하였다. 그 때문인지 세 황자들이 대신 국정에 개입하는 일이 많았는데 특히 1 황자와 3 황자가 주도적으로 그 일을 처리하였다.
아무래도 2 황자는 부상을 입고 몸져누워서인지 그사이 입지가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다른 형제에 비해 좀 쳐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달여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 대부분 상황이 정리되었기에 벤투스 왕국의 사람들은 다시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이미 다른 왕국은 한참 전에 모두 떠났기에 서둘러 갈 길을 준비하였다.
돌아가는 인원은 기존에 인원보다 두 사람이 늘었는데 한 명은 칼슨이 포섭을 하였던 건축가 스테파노였고 다른 한 명은 바로 나이아 황녀였다.
그녀는 명목상으로 수출할 무구의 품질을 확인하고 그곳에서 유통을 담당하기 위해 가는 거라고는 하지만 사실 이것은 에르시오가 시킨 일.
한동안 그곳에 있으면서 칼슨과 그녀를 엮어보려는 수작이었다.
하지만 칼슨은 딱히 그것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기에 그대로 수락하며 그녀를 일행에 합류시켰다.
그들이 길을 나설 때 제국의 사람들이 나와 성대에게 배웅을 해주었다. 그들은 대회의 우승자들이자 황실을 구한 영웅들이었으니 그러는 것은 당연하였다.
특히 검술 대회 우승자이자 대륙 10강인 칼슨의 인기는 무척이나 좋았다. 잘생긴 얼굴에 명성 또한 높았기에 많은 여인이 그를 보며 연정을 품었다. 칼슨은 딱히 그런 거에 신경 쓰진 않았지만 말이다.
어쨌든 많은 제국의 사람들이 그들을 환호하며 가는 길을 축복해주었다.
칼슨뿐이 아닌 다른 사람들 또한 많은 찬사를 받았다.
그들은 제국 사람들의 성원을 받으며 길을 나설 때 제법 감개무량한 느낌마저 받았다.
그렇게 환대를 받은 사절단 일행은 제국을 떠나 벤투스 왕국으로 향하였다.
가는 길은 왔던 길로 그대로 돌아갔다. 한 번쯤 도적이나 몬스터 같은 것들이 나타날 법도 하였지만, 딱히 아무 일 없는 평화로운 여정이었다.
중간에 슬로페 왕국도 들렀다.
거기서 엘리시아는 자신의 언니인 세르데나와 해후를 하였다. 이미 먼저 도착했던 슬로페 왕국의 사절단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해주었기에 벤투스 왕국의 사절단들이 오길 잔뜩 기대하고 있던 세르데나. 이제는 제법 무거워진 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밤새도록 엘리시아와 함께하였다.
그렇게 하룻밤을 보낸 사절단들은 다시 벤투스 왕국을 향해 이동하였다.
보름. 제국에서 로버데인까지 딱 보름이 걸렸다.
두 달 만에 왕성에 들어서니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였다. 못 보던 이들도 제법 있는 것 같고 전반적으로 냉랭한 기운이 느껴졌다. 칼슨은 온 김에 누나인 세레나를 보려 했지만 용무로 인해 자리에 없다고 하였다.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딱히 의구심을 품진 않았다. 원래 여기저기 파견을 가느라 바쁜 왕실 기사단이 아닌가.
국왕인 데로스 또한 용무로 인해 외부에 나갔다고 하였다. 세르보에게 무슨 일로 나가셨냐고 물었더니 폐하께서는 전 왕자였던 형님들을 보러 가셨다고 말한다.
하긴 정무를 보느라 한동안 못 보고 지냈을 터, 한 번쯤 얼굴을 보러 갔을 수도 있었다.
그에 대수롭지 않게 여긴 사절단 일행들.
그래서 결국 국왕은 차후에 만나 인사하기로 하고 엘리시아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후 갑작스레 엘리시아가 영지로 찾아왔다. 그리고는 그녀는 놀랍게도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