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제안
웅성웅성.
무슨 일인가 하고 시선을 돌려보니 제법 익숙한 인상의 무리들이 회장에 들어섰다.
은발 머리가 유난히 돋보이며 고귀해 보이는 이들.
바로 황족들이었다.
그중 일단의 무리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칼슨을 둘러싸고 있던 이들이 눈치를 보고 서서히 뒤로 물러서며 자리를 피하였다. 그러자 황족들과 자신 사이에 아무도 없이 그대로 마주 보게 되었다.
그들 중 중앙에 있는 이가 자신에게 다가오며 말을 하였다.
“그대가 바로 드레이크 백작인가?”
제법 익숙한 인상을 가진 장년 남성.
분명 이전 수여식 때 황제 옆에 자리했었던 남성이었다.
“예, 그렇습니다. 1 황자 전하. 이렇게 직접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싱긋 웃으며 예를 취하는 칼슨.
상대는 다름 아닌 1 황자 가레트였다.
“나야말로 이번 검술 대회의 우승자이자 새로운 대륙 10강을 이리 보게 되어 영광일세. 그래, 이번 사절단 행사 기간 동안 불편한 것은 없고?”
“예, 제집보다 편하고 너무나 안락하게 지냈습니다. 과연 제국은 다르더군요.”
“하하, 그리 생각한다니 다행일세. 대륙의 새로운 영웅을 불편하게 하면 안 되지.”
“하하하, 이리 저를 띄어주시니 참 부끄럽습니다.”
“뭐? 하하하하!”
그렇게 제법 훈훈한 분위기가 되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무렵 또 어디선가 소란스런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곳을 보니 일단의 무리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그들의 외관을 보아하니 분명 이들 또한 황족들이 분명해 보였다.
그중 제일 앞장서 있던 중년의 사내가 입을 열며 말하였다.
“여기 계셨구려, 가레트 형님. 방금 전에 서둘러 자리를 비우시더니 어디 갔나 했소.”
“에르시오….”
자신의 배다른 동생을 보더니 표정을 구기며 침음을 삼키는 가레트. 비록 3 황자에 불과하였지만 그의 세력이나 위세는 만만치가 않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은 놈의 뱀 같은 간계.
놈의 세 치 혀에 얼마나 많은 이권을 빼앗겼는지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이 시건방진 녀석이 지금 이곳에 온 목적 또한 뻔하였다.
눈앞의 드레이크 백작을 자신이 접수할까 봐 그걸 훼방 놓으러 온 것일 터. 혹은 그대로 드레이크 백작을 본인이 채가든가.
그 뻔한 수에 그대로 당할 수 없었던 가레트는 상대가 선수 치기 전에 대놓고 칼슨에게 제안을 하였다.
“여기서 이런 말을 하기 그렇지만, 듣자 하니 자네 아직 혼인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혹여 마음에 두고 있는 여인이 있는가? 그게 아니라면 내가 주선해주고 싶은데….”
“예?”
갑작스런 혼담 제안에 당황해하는 칼슨. 그 말고도 그곳에 있는 이들 또한 당혹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특히 3 황자 에르시오는 심기가 불편했는지 미간이 살짝 접혀있었다.
그는 본래 자신의 딸인 나이아와 있었던 인연을 빌미로 혼담을 진행시키려 했었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1 황자 가레트가 선수를 쳐버렸으니 속으로 짜증이 밀려왔다.
“제의에 감사하지만 저는 아직 혼인 생각이 없습니다.”
“흐음, 그렇군. 알겠소. 그럼 더 이상 그 이야기는 하지 않겠소.”
조금 굳은 표정으로 말을 하였지만 가레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어차피 그의 슬하에 미혼인 자식은 없었다. 그에게 고위 작위를 주지 않는 한 옭아맬 방법은 혈연으로 묶는 것뿐이었기에 이렇게 미리 거절을 받아두면 에르시오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진다. 그 때문인지 에르시오 녀석의 얼굴은 꼭 똥이라도 씹은 표정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가레트가 나름 흡족해하고 있을 때 에르시오의 차녀인 나이아가 칼슨에게 말을 걸었다.
“우승을 축하드려요. 드레이크 백작님. 지난 연회 이후에 처음 뵙네요.”
“아, 감사합니다. 황녀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자신의 딸이 대화의 물꼬를 트자 에르시오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나이아, 혹시 드레이크 백작이랑 안면이 있는 게냐?”
“아, 그게…. 이전에 제가 신세를 진 게 있어서요. 거기다 첫날 연회 때 같이 춤도 추었고요.”
“그래? 하하, 정말이지 이런 연이 다 있구려. 그에 대해 내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소이다.”
“아니, 그런 이야기를 뭐 하러 해요!”
“뭐, 어떠냐? 안 그렇소? 드레이크 백작.”
자연스레 대화를 시도하는 에르시오. 딱히 대화를 거부할 명분이 없던 칼슨은 흔쾌히 그에 응하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뭐? 그런 일이 있었어? 하하하! 나이아, 그때 네가 무사한 것이 신기할 정도구나?”
“후우, 그래도 별문제 없이 끝났어요. 그 당시 드레이크 백작님께서 보상을 해달라고 하셨는데 아직 말씀이 없으시네요.”
“그래? 그럼 안 되지. 기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어서 말을 해보게나, 드레이크 백작. 원하는 보상이 뭔가? 내 들어 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해주겠네. 하하하!”
자신만만한 그의 태도에 칼슨은 잠시 생각을 하였다.
그동안 잊고 있었는데 저쪽에서 따로 보상 이야기를 하니 지금 말해두어 한 몫 챙기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는 조금 고민한 뒤 생각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제가 무구 제조업을 하고 있는데 혹시 이곳에도 납품이 가능하겠습니까?”
“무구 제조? 오 그런 사업을 하고 있었군. 그런데 납품이라…. 상태만 괜찮다면야 문제없을 것이네. 내 병참 담당자에게 말을 해 놓겠네. 혹시 수량은 어찌 되는가?”
“창검 같은 무기는 한 달에 5만, 전신 갑옷은 5천 정도 가능합니다.”
“호오, 그렇단 말인가? 꽤 크게 사업을 하고 있구먼, 자네.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 드레이크산 무구가 그렇게 품질이 좋다 들었는데 그게 자네의 영지에서 만든 거였군. 그래 어디 한 번 잘해보시게나.”
“예, 감사합니다. 3 황자님.”
“하하하, 뭘 이런 거 가지고 그러는가? 아무튼 내 특별히 신경 쓰도록 하겠네. 하하.”
잔뜩 너스레를 떠는 에르시오의 모습에 가레트는 인상을 찌푸렸다. 혼담 자체를 훼방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놈이 계속해서 치근대는 것이 영 못마땅한 눈치.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녀석의 의도대로 될 것 같기에 가레트는 다시 대화에 끼어들려 하였다.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섬뜩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악! 괴물이다! 살려줘!”
소란이 일어난 곳은 연회장 출입구 부분.
그곳에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뭔가에 쫓기듯 도망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로 이리 소란이더냐?”
1 황자 가레트가 도망가는 사람을 붙잡고 그 연유를 묻자. 그는 겁먹은 표정을 하며 입을 열었다.
“괴, 괴물입니다! 황궁에 웬 괴물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있습니다.”
“뭐? 괴물?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뜬금없이 괴물이 나왔다는 소리에 어처구니없어하는 가레트. 하지만 이내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말한 괴물이 막 연회장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진한 보랏빛의 매끈한 피부를 가진 4족 보행의 괴생명체. 눈은 없고 날카로운 이빨이 빼곡하게 드러난 큰 입이 도드라진 괴물.
이미 몇 명을 먹어 치웠는지 입가에 붉은 피가 철철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가레트는 사색이 된 채 소리를 질렀다.
“저, 저것은 무엇이냐! 어서 저 괴물을 없애버려라!”
“예, 황자님!”
그의 명령에 황실 근위 기사 5명이 그 괴물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가니 생각보다 덩치가 컸다. 그 크기만은 가히 오거랑 맞먹을 정도. 하지만 그것에 겁먹을 황실 근위 기사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검에 오러 블레이드를 끌어 올리며 괴물에게 일격을 가하였다. 하지만
미끄덩─ 출렁─
피부의 점액질로 인해 검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고 미끄러져 버리고 말았다.
“허억!”
그로 인해 자세가 무너져 버린 근위 기사들. 그런 그들의 눈앞에 괴물이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콰직!
전신 갑주를 입었음에도 그대로 상반신을 뜯어 먹어버리는 괴생명체. 놈은 아직 성에 차지 않은 듯 다른 근위기사들 또한 잡아먹으려 하였다. 자신의 동료가 참혹하게 당하자 마음속 동요가 일어난 그들. 그렇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최대한 끌어 올리며 필사적으로 놈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역시 그 특이한 점액질의 피부를 관통하지 못하며 그대로 헛방. 또다시 희생자가 나오게 되었다.
콰드득!
“허어억! 페레로! 커헉!”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며 괴물에게 산채로 뜯어 먹힌 동료의 이름을 부른 근위 기사. 하지만 그 또한 괴물의 먹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콰직! 콰지직! 으그적 으그적─
놈이 기사들을 씹는 소리가 회장 전체에 퍼져나갔다.
사람이 갑옷 채로 짓이겨지는 소리에 모두들 얼굴이 하얗게 질려 나갔다. 하지만 이곳에는 내로라하는 강자들이 많았다. 그중 몇몇 왕국의 소드 마스터들이 나섰지만 그들 또한 근위 기사들과 같은 처지고 되고 말았다.
게다가 그 괴물은 하나가 아니었다.
콰직 우드득─
“꺄아아아악!”
“사, 사람 살려!”
여기저기 하나둘씩 나타나며 사람들을 잡아먹는 괴물들. 그것을 본 에르시오는 무언가 생각나는 듯 말하였다.
“저, 저것은 마수! 마수가 분명하다!”
“네? 마수요?”
부친의 말에 놀라며 되묻는 나이아. 마수라면 그녀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이곳이 아닌 다른 차원인 마계에서 서식하는 생명체. 보통 그것을 이곳에 소환하기 위해서는 흑마법사가 대량의 제물을 써야 가능한데 어찌 황궁에 저렇게 많은 마수가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저 외계 생명체 같이 생긴 건 뭐야?’
그것들을 본 칼슨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금 마수라고 들었는데 그의 눈에는 그것이 꼭 SF 영화에서나 볼법한 외계 생명체와 흡사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놈에게 오러 블레이드가 먹히지 않는다는 것. 절대적인 절삭력을 자랑하는 오러 블레이드가 통하지 않는다니…. 칼슨과 같은 기사들이 그들을 상대하기란 여간 까다롭지 않을 것이 분명. 하지만 이곳에는 기사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화염구》
콰아아아앙─ 화르르르르
어느새 마법사 몇이 날린 불구슬들이 터지며 놈은 화염에 뒤덮여갔다. 오러 블레이드가 먹히지 않은 놈의 피부였지만 마법의 불길은 먹혀 들어갔다. 아니 오히려 활활 타올랐다.
“키에에에에엑!”
고통 속에 울부짖으며 괴로워하는 괴물. 하지만 피부만 상했을 뿐 아직 쓰러지지 않았다. 그렇게 불이 붙은 상태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놈들. 놈들은 자신에게 고통을 준 당사자에게 도약하더니 즉각 응징을 가한다.
콰직─! 으드득─ 으드득─
순간적으로 마법사 몇이 놈에게 뜯어 먹혔다. 놈이 게걸스럽게 마법사들을 먹어 치우자 주변의 마법사들은 사색이 되며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허어어어억!”
“크어어! 괴, 괴물!”
불길이 타오르며 동료들을 씹어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공포에 질려 바지를 지리고 마는 그들. 사람이라면 인상을 쓰며 질색을 했겠지만 놈은 그런 것 따윈 상관하지 않았다.
“키에에에에엑!”
나머지 마법사들마저 먹어 치우려는 그 순간 누군가 녀석에게 다가가 오러 블레이드를 뿜어내며 검을 휘둘렀다.
서걱─
쿠웅!
오러 블레이드에 의해 놈의 거대한 목이 그대로 절단되며 떨어져 나갔다.
피부에 있던 점액질이 사라지자 다행히 오러 블레이드가 먹혀들어 가며 처치할 수 있었다.
“후우…. 뭐 이런 놈들이 다 있어?”
괴물을 단숨에 쓰러뜨린 자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밝은 갈색 머리를 한 그 기사는 바로 에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