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결선(6)
칼슨이 경기장에 들어서자 관중들의 함성 소리가 그곳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드레이크 백작이 나타났다! 우와아아아!”
“드레이크! 드레이크! 드레이크!”
“와아아아아아아!”
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여기저기 크게 소리가 들렸지만 칼슨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손을 흔들며 그들에게 화답해주었다. 이윽고 상대인 이베르센 백작 또한 등장. 자신이 나올 때보다 몇 배는 더 큰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베르센 백작님께서 나오셨어!”
“역시 우승은 우리 제국의 차지지! 암 그렇고말고.”
“대륙 10강이신데 여유롭게 이기실 수 있겠지? 난 전 재산을 걸었다고!”
“제국의 자랑이자 대륙의 지존이신 이베르센 백작님 만세!”
“이베르센! 이베르센! 이베르센! 이베르센!”
“와아아아아아아!”
주변을 가득 채운 관중 소리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칼슨은 진중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마치 하늘과도 같은 옅은 푸른 머릿결에 이목구비가 선명한 중년의 미남. 정돈된 수염으로 인해 꽤나 분위기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런 외관적인 것은 지금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막강한 기운.
필시 소드 마스터를 넘어선 그랜드 마스터의 강대한 오러가 분명하였다. 그것도 이전에 싸웠던 휴미스턴 백작보다 월등히 강한.
“흐읍….”
호흡을 가다듬으며 곧 이어질 대결에 만전을 기하였다.
분명 쉽지 않은 싸움이 될 터.
상대도 그것을 느꼈는지 자신을 바라보며 굳은 표정을 하였다.
“리로이 이베르센이다. 좋은 승부를 기대하겠네.”
“칼슨 드레이크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검을 바로 들며 서로에 대한 예를 표하는 두 사람.
다소 정중하고도 점잖은 태도. 그 분위기만 봐서는 굉장히 조심스럽게 대결을 벌일 것 같았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랐다.
두 사람 모두 검을 내리자마자 서로에게 전속력으로 달려들기 시작. 이미 그들에 검에는 오러 블레이드가 진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맞붙은 둘은 전력으로 상대에게 일격을 날린다.
콰아아앙─── 콰과과광!
그랜드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라 그런지 충돌만으로도 땅이 흔들린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 같은 진동에 관중들은 당황하였지만 그래도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에 이내 환호하기 시작하였다.
관중들의 태도와는 상관없이 경기장에 있는 두 사람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베르센 백작의 검술. 무겁게 내리치는데도 불구하고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게 마치 폭풍과도 같았다. 그러나 칼슨 또한 효율적으로 그것을 받아치며 틈틈이 보이는 허점을 공격.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정말이지 자네 대단하군! 이 정도면 나와 맞먹을 정도의 수준이야!”
검을 맞대면서 진심으로 감탄하는 이베르센 백작. 대륙 10강이 된 이후 자신과 이렇게 경합을 벌인 이는 처음이었다. 물론 이전에 상대했던 에드가 까다로웠긴 했지만 엄연히 그의 기량은 자신보다 아래. 하지만 눈앞에 있는 칼슨은 달랐다. 엄연히 자신과 동수라고 볼 수 있었다.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겸연쩍은 말을 하지만 칼슨 또한 느끼고 있었다. 상대와 자신과의 차이는 거의 없다는 것을. 물론 그와 검을 부딪칠 때마다 손이 저릿해지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런 것은 부수적인 거에 불과하였다. 그런 것쯤 하루 종일이라도 참아낼 수 있었으니까. 중요한 것은 결정타. 지금 당장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는 파괴적인 검술이었다.
물론 당장 쓸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이렇게 공방이 격해지면 써야 할 타이밍조차 잡기 힘들다. 그리고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
타앙! 콰앙! 쾅! 탕! 콰앙!
계속되는 접전에 섬광이 번뜩이며 땅이 들썩이고 강풍이 요동친다. 마치 신들이 싸우는 듯한 그 모습. 그것을 보는 사람들 또한 바짝 타오르는 긴장감에 두 손을 꽉 쥐게 만들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검을 부딪치며 상대의 허점을 노리던 두 사람. 마치 두 마리의 맹수가 치열하게 싸우는 듯한 모습이었다.
공방이 계속해서 길어지자 관중들 또한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칼슨 또한 강자를 꺾고 올라온 실력자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의 상대는 대륙 10강 중 한 사람. 그런 그에게 한 치도 밀리지 않는 모습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
심각하게 보다가도 고개를 절로 흔드는 사람들. 그럴 리가 없었다. 이베르센 백작의 상대는 이제 고작 20대 중반. 그렇게 어린 나이에 대륙 10강에 버금간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일반사람들과는 달리 몇몇 이들의 눈에는 놀라움이 서려 있었다.
특히 귀빈석에서 보고 있던 황족들은 당장 벌어지고 있는 저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 중 1 황자인 가레트의 표정은 경악 그 자체. 현재 50대 중반인 그는 이때까지 살아가면서 여러 강자들을 봐왔었다. 그중 대륙 10강을 반 이상은 보았으며 이베르센 백작 또한 그가 기사단장이 되었을 때부터 지켜보았던 사람이었다.
이베르센 백작이 살짝 입꼬리를 올리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가레트가 알고 있는 그는 저런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상당히 진심이라는 것.
그렇다면 상대의 실력은 요행이 아닌 진짜배기였다. 그 말은 곧 그가 대륙 10강이랑 동등한 실력자란 이야기.
어떻게 저런 이가 나타났는지 모를 정도.
그야말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얼핏 듣기로 벤투스라는 변방 소국의 영주라고만 들었는데 이 정도의 실력자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그렇게까지 생각하자 그가 너무나도 탐이 났다.
현재 1 황자인 자신이 다음 황위가 유력하다고는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황태자 직위를 받은 것이 아니었다.
거기다 다른 형제들 또한 언제든지 비집고 들어와 황위를 차지할 수 있을 정도로 세력이 탄탄하였으니 그는 늘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저 같은 이가 자신의 휘하로 들어와 준다면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일 것이다. 게다가 그의 부하들 또한 꽤나 유능하였다. 듣자 하니 궁술 대회의 우승자인 귀궁 또한 저자의 부하였으며, 전 시합에서 이베르센 백작을 곤란하게 만들었던 기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가 작위를 받은 영주라는 점이 매우 걸리긴 했다.
거기다 자작 이하도 아닌 백작이라는 고위 작위를 받았기에 그 이상의 지위를 주지 않는 한 마음을 돌리기는 힘들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기반도 포기해야 하니 더더욱 어려울 터. 맛있는 음식을 보고만 있는 것처럼 입맛만 다시는 1 황자였다.
1 황자 가레트와 달리 웃는 얼굴로 보는 이도 있었는데 그는 바로 3 황자인 에르시오.
40대 후반인 그는 칼슨의 무위를 보고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었다. 어떻게 저리 젊은 나이에 저토록 고강한 경지에 오를 수 있었는지 절로 탄성이 나올 정도. 얼핏 들은 바로는 자신의 차녀인 나이아랑 안면이 있다고 하였다. 아니 연회장에서 같이 격렬하게 춤까지 췄다고 하였으니 제법 깊은 사이일지도 몰랐다.
에르시오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만약 그와 나이아가 혼인을 하여 자신의 사위가 된다면 앞으로 있을 황위 싸움에서 굉장히 우위에 서게 될 것이다. 만약 현재 대륙 10강에 못 미친다고 해도 아직 나이가 젊으니 대륙 10강은 물론 그 이상으로도 강해질 수 있을 테니까. 어떻게 보면 반드시 잡아야 할 패였다.
아마 다른 형제들 또한 자신과 생각이 다르지 않을 것이 분명. 시합이 끝난다면 물밑으로 접촉을 시도해봐야 할 것 같다.
다른 이들과 달리 매우 곤란한 표정을 하며 보는 이도 있었다. 그는 바로 2 황자의 장남인 라노프였다.
그는 일전 연회장에서 칼슨과 신경전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엘리시아와 춤을 추며 그의 신경을 긁은 적이 있었다. 그 뒤로 그가 압도적인 춤 실력을 보여주어 자신의 꼴이 우습게 됐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그때 자신의 의도를 모를 리가 없었다.
이렇게 그가 고강할 줄 알았다면 엘리시아가 아닌 그에게 공을 들였어야 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무척이나 큰 실수를 해버리고 말았다.
라노프가 손톱을 깨물며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을 때 그 근처에 있던 나이아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칼슨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회 때 자신과 멋진 춤을 추어서 굉장히 호감이 있었는데 저렇게 검술 또한 고강하니 또 다른 매력을 느낀다.
연회 이후에 따로 볼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 시합이 끝난다면 예전에 줄 보상을 핑계로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고위 귀족들은 물론 황족들의 눈에도 들어온 칼슨. 이런 사실을 모른 채 그는 이베르센 백작과의 대결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공방.
이윽고 이베르센 백작이 그 팽팽하던 균형을 깨기 위해 검의 흐름을 바꾸었다.
갑작스레 상대의 검격이 변화하자 칼슨 또한 경계하며 대비를 하였다. 그로 인해 잠시 벌어진 틈. 그러자 바로 이베르센 백작이 비전 검술을 사용하였다.
응축된 오러 블레이드를 단숨에 휘둘러 모조리 베어버리는 그의 검술. 그 절대적인 절삭력이 칼슨을 향해 쏟아졌다.
하지만 이베르센 백작에게도 비전 검술을 쓸 여유가 있었다면 칼쓴 또한 마찬가지. 그도 새로운 비전 검술인 ‘칠흑’을 써 상대의 공격에 맞섰다.
그의 오러 블레이드가 순식간에 검게 변하며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공허의 어둠을 만들어 내었다.
상대가 절대적인 절삭력을 보여주었지만, 그조차도 그것에 먹히며 상대의 공격은 그대로 무위로 돌아가 버렸다.
자신의 비전 검술이 허무하게 막히자 눈을 크게 뜬 이베르센 백작. 큰 기술을 써서 오러가 급격히 빠져 기진맥진한 상태일 때 칼슨이 재빠르게 다가와 그에게 일격을 먹인다.
콰직─!
견갑 일부가 뜯어지며 알싸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베르센 백작은 그 공격에 상당히 놀랬다. 분명 자신은 상대의 공격을 확실히 피했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를 입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대로 당했다면 팔 하나는 날아갔을 것이다.
놀란 것은 칼슨도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확실하게 들어간 검격인 줄 알았는데 상대방이 어떻게 파악했는지 순간적으로 몸을 틀어버려 비껴 맞아버렸다.
어쨌든 공격이 빗맞자 이제 오히려 자신이 틈이 생겨버렸다. 상대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매섭게 공격해 들어왔다.
팅! 텅! 깡!
다시 시작된 이베르센 백작의 공세. 그 물 흐르듯 쉴 새 없는 검공에 다시 칼슨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게다가 검이 굉장히 무거웠기에 흘려보내기조차 매우 까다로웠다.
그렇다고 이대로 계속 방어만 할 순 없는 법.
이 흐름을 깨야만 하였다.
콰아앙!
“크으윽!”
오러 바디를 일으켜 상대의 검을 그대로 맞부딪혔다. 온몸이 찢기는 듯한 충격에 정신이 아찔했지만 오러 바디와 그의 미스릴 갑옷이 버티어 주었다.
칼슨이 몸으로 검의 흐름을 끊어내자 황당할 수밖에 없는 이베르센 백작. 마치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상대의 행동에 절로 소름이 돋았다. 이윽고 자신을 향해 파고드는 상대방의 검.
서걱─!
“크으윽!”
허벅지를 감싼 갑주가 뜯어지며 붉은 피가 솟구쳐 올랐다.
상처가 꽤나 깊었는지 고통스런 표정과 함께 무릎을 꿇고 말았다.
다시 찾아온 공격의 기회. 칼슨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