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연회(1)
‘이런 젠장!’
예상 못 한 엘리시아의 등장에 황녀가 자신을 인식하고 말았다. 칼슨은 당황하였지만, 곧 마음을 진정시켰다. 굳이 그녀와 척을 졌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빚을 달아 두었으니 거리낄 것은 없었다. 다만 쓸데없는 오해를 사기가 싫어서 피한 것뿐이었으니까.
그 말은 곧 그녀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거리낄 것이 없다는 것. 칼슨을 본 그녀는 곧장 아는 체를 하며 이리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 혹시 드레이크 백작님 아니신가요?”
황녀인 그녀가 그의 이름을 말하며 다가오자 함께 있던 사람들은 놀란 눈을 하며 칼슨을 쳐다보았다. 자신에게 시선이 몰리자 조금 부담되는 듯 겸연쩍은 표정을 하였지만 이내 가벼운 미소를 띠며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였다.
“또 뵙게 되었습니다. 나이아 베라 콘 아크레프 황녀님.”
“호오? 이제 제 정체는 알았나 보네요? 사흘 전에 봤을 때는 모르셨던 거 같았는데. 그리고 그냥 나이아라고 불러주세요. 어쨌든 다시 만나보게 되어 반가워요, 드레이크 백작님.”
“예, 저도 보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나이아 황녀님.”
칼슨이 그녀와 안면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라델리안 공작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안녕하십니까? 황녀님. 저는 벤투스 왕국의 공작인 루이스 라델리안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 라델리안 공작님이시군요. 안녕하세요. 저도 만나 뵈어 영광이에요.”
칼슨을 보고 대화하러 왔는데 그 일행이 말을 걸자 떨떠름한 표정이 된 그녀. 하지만 이내 웃는 얼굴로 화답해주었다. 말문이 이어지자 라델리안 공작은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내 든다.
“하하하, 그런데 제가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런데 혹시 저희 드레이크 백작을 전에 만나신 적이 있었던 겁니까? 아까 대화를 들어보니 구면이신 것 같으신데….”
그 말에 그곳에 있던 다른 이들 또한 궁금해하며 귀를 기울였다. 그중 엘리시아와 카텔로 후작이 유독 크게 관심을 보였다.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조금 당황스러워하는 나이아. 칼슨을 살짝 본 후 이내 말을 이어 나갔다.
“그냥 단순히 용무 중에 마주쳤던 것뿐이에요. 그때 당시 드레이크 백작님은 제가 황녀인 것도 몰랐고요.”
“아…. 그렇습니까? 그럼 혹시 그 당시 어떤 용무….”
“잠시 죄송합니다만. 라델리안 공작님, 계속 그렇게 질문하시면 황녀님께서 곤란해하십니다.”
집요하게 물어보려 하는 라델리안 공작의 말을 칼슨이 중간에 끊었다. 지켜보고 있자니 나이아의 안색이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 칼슨에 의해 말이 막히자 라델리안 공작은 조금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그, 그런가? 듣고 보니 내가 좀 무례했던 것 같군. 정말 죄송합니다, 황녀님. 이 늙은이가 그만 주제넘은 행동을 하였습니다. 넓은 아량으로 부디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아니에요. 그러실 수도 있지요. 그럼 전 이만 다른 용무가 있어서 가볼게요. 아무튼 반가웠습니다, 벤투스 왕국 여러분.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또 뵙도록 하지요.”
그 말과 함께 칼슨을 보며 의미 모를 미소를 짓는다. 그것을 본 칼슨은 의아해했지만 아마 그녀가 진 빚을 갚기 위해 다시 보자는 의미로 해석하며 흘려 넘겼다. 그렇게 그녀가 자리를 떠나자 이제 표적은 순식간에 칼슨에게로 옮겨졌다. 그중 라델리안 공작이 눈을 지그시 뜬 채로 질문을 던진다.
“자네, 정말 나이아 황녀랑 아무런 일이 없던 것이 확실한가? 이 늙은이의 촉으로는 아무래도 뭔가 있는 거 같은데 말이야….”
이쯤 되니 확실히 오해를 산 거 같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럴 때는 그냥 확실히 말해주는 것이 깔끔하니까.
“예,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궁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라델리안 공작님.”
“아…. 알았네. 자네가 그리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내가 너무 주책없이 행동하였군.”
단호한 태도에 조금 서운해 보였지만 그래도 쓸데없이 오해를 키우는 것보다 이게 낫다. 그런데 다소 안심하는 카텔로 후작과는 달리 엘리시아의 표정이 그리 좋지 못하였다. 마치 뭔가 기분 나쁜 일이라도 겪은 듯한 얼굴. 그런 얼굴을 한 채 자신을 한 번 바라보더니 눈을 감으며 냉큼 고개를 돌려버린다.
‘뭐지? 쟤는 또 왜 저래?’
그런 그녀의 모습에 칼슨은 그저 머리를 긁적일 뿐 왜 그러는지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연회가 무르익어갈 무렵 연주되는 음악이 바뀌며 여기저기서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춤을 추는 시간인 것 같아 보였다. 칼슨은 별생각 없이 그 모습을 보고 있었는데 그때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은발에 장신인 미남이었는데 문뜩 엘리시아 쪽으로 향하더니 손을 내밀며 말한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랑 춤을 추시지 않겠습니까? 엘리시아 왕녀님.”
“아, 저 말씀이신가요?”
대뜸 남성이 춤을 신청하자 놀란 눈이 되어버린 그녀. 주변을 힐끗 쳐다보며 마치 곤란하다는 표정을 하였다. 그녀가 주저하자 남성은 다시 한번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하였다.
“예, 그러고 보니 제 소개를 하지 않았군요. 저는 라노프 베라 콘 아크레프라고 합니다.”
이름을 들어보니 영락없는 제국의 황족이었다. 중간 미들네임에 ‘콘’이 붙은 것을 보니 확실한 직계 황족이었다. 이름을 들은 엘리시아도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라노프 베라 콘 라크레프.
2 황자의 장남이며 황제의 3번째 손자였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춤을 청하니 엘리시아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황자님이시군요. 그런데 그게…….”
그녀가 곤란한 듯 보이자 칼슨이 다가가 라노프에게 말을 걸었다.
“죄송하지만, 엘리시아 왕녀님은 저랑 먼저 춤을 추기로 하였습니다. 황자님. 안 그렇습니까, 왕녀님?”
그러면서 그녀만 볼 수 있게 한쪽 눈을 찡긋하였다. 잠시 멍하니 있던 그녀는 그 의미를 눈치채고 칼슨의 장난에 맞춰주었다.
“네, 드레이크 백작님이 먼저 신청하셔서 어쩔 수 없네요. 황자님, 죄송하지만 정중히 거절할게요.”
그렇게 말하며 칼슨이 내민 손을 잡는다.
그러자 갑자기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 버린 라노프. 그는 멀뚱멀뚱 그것을 지켜보며 얼빠진 표정을 하였다.
그를 등에 지고 나온 둘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라노프는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감히 황자인 나를 놔두고 저따위 귀족 나부랭이랑 춤을 추러 가다니.’
그녀가 벤투스 왕국의 실권자라고 해서 접근을 하였는데 매몰차게 거절당하였다. 하늘같이 높던 그의 콧대가 무참히 꺾여버리며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고 말았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칼슨을 노려보는 라노프. 그의 마음속에서 칼슨을 향한 적의가 자라나기 시작하였다. 그가 그렇게 이를 갈고 있을 때 칼슨과 엘리시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춤을 추고 있었다. 따로 춤을 배운 적은 없었지만 이미 칼슨이 어렸을 때 배운 기억이 있기에 음악에 맞춰 추는 것 정도는 딱히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춤이 아니었다.
‘젠장, 곤란해 보여서 나서긴 했는데 이건 너무 가깝잖아.’
그녀를 딱히 이성으로 생각하진 않았지만, 손을 잡고 이렇게나 붙어 있으니 엄청나게 신경 쓰였다. 게다가 그의 신체는 이미 건강한 20대의 남성. 정신력이 워낙 높으니 흥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심장이 제법 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물론 그것은 칼슨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엘리시아 또한 춤을 리드하는 칼슨을 보며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사교적으로 여러 번 춤을 춰보긴 했지만 대부분 어린 시절 부친이나 오라버니들이랑 한 것이 전부. 그 외 젊은 남성이랑 춤을 추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최대한 춤에 집중해보려 하지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아름다운 선율이 귀에 부딪히며 더욱 분위기가 고조. 이제는 제법 거친 숨마저 나올 지경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춤을 추고 있던 와중 마침내 음악이 멈추었다.
“하아, 수고하셨습니다. 엘리시아 왕녀님.”
크게 숨을 내쉰 칼슨이 그녀에게 말하자 그녀 또한 싱긋 웃으며 대답하였다.
“고생하셨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드레이크 백작님.”
서로 예법으로 인사를 하며 춤을 마친 그들. 그렇게 쉬는 시간이 되며 둘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라델리안 공작이 놀란 얼굴을 하며 말을 하였다.
“오호 자네 춤도 제법 추는군. 아까 보니 왕녀님이랑 추는 모습을 보니 마치 한 쌍의 백조 같은 모습이었다네.”
‘한 쌍의 백조? 그거 좋은 뜻인가?’
해맑게 웃는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칭찬인 것 같긴 하였다. 그래서 칼슨도 웃는 얼굴로 화답해주었다.
“하하, 감사합니다. 너무 오래돼서 그런지 잘 될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몸이 잘 움직였습니다.”
“하하하, 그렇게 겸양 떨 필요는 없다네. 그러고 보니 왕녀님이랑 언제 그렇게 친밀해졌는가? 아까 황자가 치근거릴 때 몸소 나섰지 않은가? 마치 공주님을 구하러 온 기사처럼 말이야. 그때는 정말 내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다네.”
라델리안 공작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하였다. 아마도 아까처럼 또 혼자 이상한 상상을 하는 것 같았다. 칼슨은 한숨을 쉬며 다시 한번 그의 생각을 바로잡아주었다.
“그저 왕녀님께서 곤란해 보이시기에 제가 나선 것뿐입니다.”
다시 칼슨이 단호한 태도로 말하자 라델리안 공작은 조금 김이 샌 표정을 하며 실망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흐음, 그렇단 말인가. 미안하네, 내가 또 주책없는 짓을 해서. 정말이지 나도 나이가 들었나 보네. 쓸데없이 이런 감정적인 일에 몰두하다니 말이야.”
“…….”
잔뜩 풀이 죽은 듯한 목소리와 태도를 보이는 라델리안 공작. 도대체 뭘 기대했는지 몰라도 자신이 그것을 무참히 깨버린 것 같았다. 아무리 술을 좀 먹었다 해도 나이도 있으신 양반이 저렇게나 주책을 떨 줄이야. 아무래도 갱년기가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아무튼 공작님이 생각하신 그런 것은 아니니까 괜히 오해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알았네, 알았어. 내 젊은 처자들이 함께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아 그런 거지 다른 뜻은 없었다네. 자네가 이해해주게나.”
“예, 꼭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확답받은 칼슨은 슬며시 엘리시아도 흘겨보았다. 그녀는 춤을 추느라 상당히 지쳐 보였는데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손을 부채마냥 흔들며 얼굴을 식히는 그녀는 어디선가 시선을 느꼈는지 갑자기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서로 눈이 마주치자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니, 왜 그래? 너까지.’
저러니 라델리안 공작이 오해를 하지. 전부터 호감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보니 확실해 보였다. 그녀가 딱히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감정이 확실하게 드는 것 또한 아니었다. 괜히 신경을 쓰니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그가 골치 아파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야, 정말 멋진 춤 솜씨였어요. 설마 춤에도 일가견이 있으신 줄 몰랐네요, 드레이크 백작님.”
은발에 보랏빛 눈을 가진 그녀.
황녀인 나이아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한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