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제국으로 가는 길(3)
“뭐? 위급한 상황에 처했다고?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다짜고짜 도움을 요청하더니 이제는 루겐이 곤경에 빠졌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자 수행원에게 묻자 그는 침을 크게 삼키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로즈닌 백작님이 주점에서 술을 마시다 어떤 놈들이랑 시비가 붙었습니다. 그런데 그놈들이 보통이 아닌지라 저와 다른 수행원은 물론 로즈닌 백작님마저 제압당하시고 말았습니다.”
그놈 참 성격이 거지 같아서 언젠가 사고 한 번 칠 거 같았지만 그게 지금일 줄이야. 칼슨은 골치가 아파왔다.
수행원의 표정을 보니 상황이 심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 카텔로 후작님이나 아니면 다른 슬로페 왕국의 사절단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왜 나한테 왔느냐?”
“그, 그게 카텔로 후작님은 라델리안 공작님이랑 같이 자리를 비우셨고 나머지 두 분은….”
뭔가 곤란한 듯 뜸을 들이는 수행원. 그 모습이 답답했던 칼슨이 추궁하듯 물어보았다.
“두 분은 뭐? 왜 말을 하다 말아?”
“죄, 죄송합니다. 그 두 분도 그곳에서 같이…. 계셨습니다.”
“뭐?”
같이 있다는 말은 곧 셋 다 당해서 잡혔다는 이야기.
진짜 가지가지 했다. 그래도 기사나 되는 놈들이 한 놈도 빠짐없이 전부 당했다는 건데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 사실을 카텔로 후작이 안다면 목 뒤를 잡을 게 뻔하였다.
“어서 그곳으로 안내해라.”
“예, 예? 아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드레이크 백작님!”
놈을 그다지 도와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그냥 대놓고 무시한다면 슬로페 왕국에서 별로 좋게 보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소드 마스터는 아니지만 루겐도 상당한 강자 축에 속한다. 그런 그가 같이 온 사절단들과 함께 당했다는 말은 상대가 만만찮다는 이야기. 어떤 놈들인지 한 번 면상이라도 구경하고 싶어졌다. 물론 루겐의 꼴사나운 모습을 보는 것도 덤이고 말이다.
“우터!”
“예, 영주님.”
“어서 에드를 불러와라!”
“예!”
칼슨의 명에 즉각 움직이는 우터. 그런 그를 보며 칼슨은 살짝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고로 이런 좋은 구경은 혼자보다도 여럿이서 보는 게 제맛이었다.
* * *
퍼억!
“커허억!”
한 공터에서 누군가가 한 남성을 구타하고 있었다.
얻어맞고 있는 자는 바로 루겐. 슬로페 왕국의 사절단 중 한 명이었다.
사내의 발길질에 그대로 면상을 맞아 나가떨어지는 루겐. 꽤나 얻어맞아서인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크으윽! 네 이놈들! 네들이 감히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우리들이 누구인 줄 알고 이러는 것이더냐!”
“아, 아 그럼 알고말고. 병신 같은 슬로페 왕국의 떨거지들 아니야? 이제까지 네놈들이 그렇게나 이야기했는데 당연히 알지.”
“그렇다면 어서…. 쿨럭!”
퍼어억─!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다시 한 번 그의 복부에 발길질이 들어왔다. 소리가 제법 묵직하게 나는 것이 꽤 충격이 클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고통스러워하며 토악질을 하는 루겐. 이미 토사물은 물론이고 피까지 나오는 걸로 봐서 내상까지 입은 듯 했다.
“아, 이 새끼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여긴 슬로페 왕국이 아니야. 이 병신 같은 새끼야!
퍼억─! 퍽! 퍼억!
“커억! 컥!”
무차별적인 구타에 루겐은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머지 인원들은 두려움에 몸서리치며 덜덜 떨 뿐이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한 남성이 말한다.
“크크, 동료가 저리 떡이 되 가고 있는데 그저 떨고만 있을 뿐이라니. 슬로페 왕국 놈들은 죄다 이런 겁쟁이들뿐인가?”
“이봐 태오. 이제 슬슬 끝내자고. 이곳이 슬로페 왕국도 아니지만 우리 델루프 왕국도 아니라고. 누가 죽어서 문제라도 생기면 꽤나 골치 아플 거야.”
“쳇, 알았다. 울베이. 네놈들은 운 좋은 줄 알아라. 너희들이 사절단만 아니었다면 이대로 보내주지는 않았을 거야. 그러니 감사하게 여기고 썩 꺼져버리라고! 꺄아아악 퉤!”
걸쭉한 가래침이 루겐의 얼굴에 떨어졌다. 보기만 해도 역겨웠지만 루겐은 이미 의식을 잃어서인지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야, 이 병신 같은 놈들아. 더 볼일 있어? 엉! 어서 이 쓰레기 같은 새끼 데리고 썩 꺼지라고 이 새끼들아!”
“허걱, 아, 알았다. 크윽!”
그들이 허겁지겁 몸을 일으키며 루겐을 부축하려 할 때였다.
“여, 여깁니다! 드레이크 백작님.”
아까 도움을 요청하러 갔단 수행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그와 함께 3명의 남성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뭐야? 그새 못 참고 달려가 줄줄이 데리고 왔어? 크크크, 이거 뭐 애새끼들도 아니고 참.”
태오라고 불리는 남성이 비릿한 미소를 하며 이죽거렸다. 그리고는 칼스 일행을 보더니 다시 한마디를 하였다.
“어이, 네놈들도 괜히 덤비다 다치지 말고 어서 이 새끼들 데리고 꺼져.”
귀찮은 듯이 손을 휘젓는 태오. 그 모습을 본 우터가 즉각 놈에게 화살을 날린다.
푸욱!
“으아아악! 씨발, 이 미친놈들이 화살을 날려?”
태오는 다리에 화살이 박히자 욕을 내뱉으며 우터를 노려보았다. 그 매서운 눈초리에도 우터는 얼굴에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성을 내며 윽박지른다.
“이런 무례한 놈 같으니! 감히 영주님께 그따위 망발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알았느냐!”
“이 새끼가! 뭔 헛소리야?”
푸욱!
“크아아악!”
반대편 다리에도 화살이 박힌 녀석은 다시 한번 비명을 지른다.
‘젠장,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활 솜씨야?’
타오르는 통증에도 그는 상황을 냉정히 봤다. 처음에는 방심했다 쳐도 두 번째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척조차 못 느끼고 그대로 당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그의 옆에 있던 울베이가 나섰다.
“그쯤하고 그만두시오. 비록 다툼이 있었다고 하나 정당하게 승부를 해 우리가 이겼고, 지금 막 그들을 풀어주려고 하였소. 그러니 더 이상 서로 피를 볼 필요가 있소이까? 모두 이쯤하고 그냥 돌아들 가시오.”
정중한 태도로 중재를 하려던 울베이. 하지만 우터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활시위를 놓지 않았다.
쉬이이익─── 팅!
“크읏!”
가까스로 그의 화살을 쳐냈다. 하지만 손에 전해지는 반탄력이 상당해서인지 저릿저릿하였다. 그때 태오가 다급히 말하였다.
“조심해라, 울베이! 저놈 활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쳇! 그건 나도 알아. 여기 이놈들이랑은 차원이 다른 녀석이다.”
그들이 그렇게 잔뜩 경계하며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을 때 어느새 에드가 울베이에게 다가왔다.
“허억! 뭐야? 언제 왔…. 커헉!”
퍼억!
그에 복부에 에드의 주먹이 꽂히며 상체가 새우처럼 휘어버렸다. 순간 숨을 못 쉬며 그대로 주저앉아버린 울베이. 그 모습을 본 태오는 식은땀을 흘리며 검을 뽑아 들었다.
“시발! 너 도대체 뭐야! 엉!”
본능적으로 피어오르는 녀석의 푸른 오러. 비록 소드 마스터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 수준은 상당해 보였다. 당연히 루겐보다 월등히 높은 경지. 하지만 에드에게는 그저 어린애 장난 같아 보일 뿐이었다.
“검을 거두는 게 좋을 걸? 더 이상 피를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개소리! 네놈들이 먼저 화살을 쏘지 않았느냐! 그러면서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몸이 떨려오고 있었지만 고래고래 악을 쓰며 저항해본다. 하지만 그래봐야 에드에게 털끝만큼의 긴장감도 주지 못하였다.
툭─!
“헉!”
철퍼덕!
어느새 태오의 다리를 쳐서 그의 중심을 잃게 만들었다. 자신이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르며 그대로 바닥에 처박히는 녀석. 그런 놈을 내려다보며 에드가 말하였다.
“긴 말하지 않겠다. 어서 검을 버려라.”
“크으윽! 시발!”
비록 욕을 하였지만 상대는 자신보다 월등히 강하였다. 이를 악문 태오는 그대로 손에서 검을 놓는다.
그렇게 단숨에 놈들이 제압되자 에드는 칼슨에게 부복을 하며 입을 열었다.
“이제 이놈들을 어떻게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명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영주님.”
칼같이 절도 있는 자세. 마치 기사의 표본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에 흡족해진 칼슨은 말을 이어갔다.
“뭐, 됐어. 약해빠진 놈들 상대로 굳이 피를 볼 필요가 있겠어? 어서 저들이나 구해오자.”
“예, 영주님.”
그러고 나서 천천히 루겐의 무리에 다가가는 그들. 어느새 정신이 든 루겐이 그 모습을 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딴 놈들을 이겼다고 건방떨지 마라! 네놈들 도움 없어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어!”
기껏 도와줬더니 한다는 소리가 아주 가관이었다. 그의 망발로 인해 그를 부축하던 수행원들과 같이 있던 사절단들까지 모두 사색이 되고 말았다.
“여보게, 로즈닌 백작. 이게 지금 무슨 무례한 행동인가!”
“하하, 미안하오. 드레이크 백작. 이 친구가 머리를 맞았는지 제정신이 아닌가 보오. 그러니까 부디 못 들은 것으로 해주시오.”
어떻게든 루겐의 만행을 얼버무리려 애쓰는 그들. 하지만 루겐은 그 바람을 무참히 깨버리고 말았다.
“지금 다들 뭐 하는 겐가! 제정신이 아닌 건 자네들이지! 어찌 저 시건방진 애송이에게 머리를 숙인단 말인가! 도대체 자네들은 일말의 자존심도 없단 말인가!”
그 말을 들은 칼슨이 어느새 그의 앞에 다가가 말을 하였다.
“이거 뭐가 이리 심보가 단단히 틀어졌을까? 그대의 수행원이 간곡히 부탁해서 한걸음에 달려왔건만 고맙다는 말을 못 들을망정 이런 거지 같은 취급을 당할 줄이야…. 슬로페 왕국의 귀족들은 다 이렇게 배은망덕한 사람들인가? 아니면 당신만 그런 건가?”
“뭐! 네가 감히 슬로페 왕국을 업신여기는 것이냐! 자네들 이거 놔보게! 내 당장 저놈과 결판을 내야겠네.”
이제 말리는 것도 포기했는지 그냥 손을 놓으며 뒤로 물러서는 그들. 루겐은 아직 성치 않은 몸을 일으키며 칼슨을 노려보았다. 그런 놈을 본 칼슨은 어이가 없다 못해 신기할 정도로 보였다. 이건 성격보다도 지능의 문제였다. 도대체 어떻게 인생을 살아왔기에 이렇게 병신일 수 있는지 참으로 궁금하였다.
퍽!
그러는 와중에 놈이 자신의 몸을 주먹으로 쳤다. 물론 일부러 맞아주었다.
“으윽!”
간지럽지도 않았지만 상당히 충격을 받은 것처럼 인상을 쓰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 장면을 본 주변 사람들은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 밤중 한걸음에 달려와 도움을 준 이를 모욕하고 심지어 주먹까지 날릴 줄이야. 그들의 눈에 비친 루겐의 모습은 인간쓰레기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런 주변의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루겐. 오히려 놈은 어깨에 힘이 들어가며 의기양양해지기 시작했다. 그저 자신이 눈앞의 건방진 애송이를 혼내줬다는 인식만 또렷하게 박힌 채. 이제 곧 뒈질 줄도 모르고 말이다.
퍼억─!
“꾸웨에엑!”
놈의 복부에 가볍게 주먹을 넣어줬다. 그러자 돼지 멱따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고꾸라지는 녀석. 하지만 응징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