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제국으로 가는 길(1)
사절단이 출발한 지 나흘째.
그들은 이제 막 국경을 벗어나 이웃 나라인 슬로페 왕국을 지나고 있었다.
슬로페 왕국 또한 벤투스 왕국과 마찬가지로 몬스터 웨이브의 영향을 국가 중 하나. 하지만 칼슨이 해결한 벤투스 왕국과는 달리 이곳은 몬스터 웨이브로 받은 피해가 막심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그들의 터전이 망가졌다. 결국 그들은 제국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막대한 보상금을 지불하며 몬스터들을 해결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까지 복구가 안 돼 있는 곳이 많았다.
지금 지나가고 있는 이곳처럼 말이다.
“크음, 생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라델리안 공작님?”
부서진 건물 잔해와 여기저기 널브러진 시체들을 본 바스테르 후작이 인상을 쓰며 말을 하였다. 이에 라델리안 공작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하였다.
“그러게 말일세. 우리 영지도 드레이크 백작이 아니었다면 이와 다를 바가 없었을 테지.”
그렇게 말하며 칼슨을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낀 칼슨은 멋쩍은 표정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저 계약대로 했을 뿐입니다. 약속대로 보상금도 받았고 몬스터들의 부산물도 모두 가져갔으니까요.”
“그렇지, 계약. 하지만 그것으로 우리의 영지는 지켜질 수 있었다네. 그건 정말 감사할 일이지.”
“…그렇게 감사를 받을 일은 아닙니다. 계속 이러시면 제가 정말 민망합니다.”
어떻게든 감사함을 표하고 싶었는지 운을 띄우며 부드러운 미소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겸양을 떠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저렇게 대놓고 추켜세우니 다소 부담스러웠다.
“알았네,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더 이상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겠네.”
“예, 감사합니다. 라델리안 공작님.”
그렇게 막 대화를 마쳤을 때였다.
“나리들, 제발 저희 좀 도와주십시오.”
“며칠 동안 굶었습니다. 제발 자비를 부탁드립니다.”
“귀족 나리, 이 아이에게 부디 먹을 것을….”
폐허가 된 건물 더미에서 한두 명씩 나오던 빈민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구걸을 하였다. 그러자 병사들이 나와 그들을 막으며 소리쳤다.
“물러나라! 감히 너희가 쳐다볼 분들이 아니다!”
“천한 놈들이 어디 말을 붙이느냐!”
그들이 무기를 들이밀며 위협적인 태도를 취하자 모두들 겁을 먹고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섰다.
그 모습을 보며 엘리시아가 한마디 하려 하자 칼슨이 가로막으며 말하였다.
“그만두시길 바랍니다, 엘시라아 왕녀님. 왕녀님의 자비로운 마음은 알겠지만 저들을 일일이 상대하다가는 끝이 없습니다. 게다가 이곳은 벤투스 왕국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어쭙잖은 동정심으로 자발적 호구가 되려는 엘리시아를 제지하자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나 칼슨의 태도는 단호하였다.
“지금 우리는 구명 활동을 하러 여기에 온 것이 아닙니다. 이곳은 엄연히 슬로페 왕국입니다. 저들을 책임져야 할 이들은 따로 있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드레이크 백작님.”
안쓰러운 마음이 밀려들었지만 결국 칼슨의 말을 이해하며 수긍하였다. 그렇게 그들은 빈민들을 내치며 계속해서 갈 길을 갔다. 그곳을 지나 며칠을 더 지난 끝에 어느덧 슬로페 왕국의 수도인 루리드에 도착하게 되었다.
비록 이곳이 타국이었지만 엘리시아의 첫째 언니인 사르데나가 이곳 왕세자에게 시집을 갔었다. 즉 이곳 슬로페 왕국과 벤투스 왕국의 왕가는 사돈지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엘리시아와 일행은 이곳에 들르기로 예정을 잡았었다.
“어서 와, 엘리시아!”
“오랜만이야, 언니.”
몇 년 만에 만난 자매의 상봉. 엘리시아의 언니인 사르데나는 밝은 갈색 머리의 단아한 여성이었다. 인형같이 생긴 엘리시아와는 다르게 조금 기품이 돋보이는 성숙한 여인의 느낌.
“그런데 여기 이분들은…? 어? 혹시 라델리안 공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르데나 공주님. 아, 이제는 왕세자빈 마마라고 불러드려야 하겠군요.”
“호호호, 그 공주라는 호칭 되게 오랜만이네요. 간만에 들으니 기분이 묘한걸요? 정말이지 반갑습니다, 라델리안 공작님.”
“예, 환영에 감사드립니다.”
구면인 둘 또한 오랜만에 해후해서 그런지 상당히 반가워하였다. 그리고 곧 이어진 세르데나의 질문.
“라델리안 공작님, 그럼 나머지 두 분은 누구신가요? 제가 처음 뵙는 것 같아서요.”
“아, 이 두 사람은 바스테르 후작과 드레이크 백작입니다. 우리 벤투스 왕국의 자랑스러운 소드 마스터들이지요.”
“와, 정말요? 그럼 혹시 이분이 드레이크 백작님이신가요?”
라델리안 공작의 말에 두 눈이 커지며 화색이 도는 그녀. 곧장 칼슨을 보며 물어본다.
“예, 그가 바로 드레이크 백작입니다. 이번 몬스터 웨이브 당시 우리 벤투스 왕국을 구해준 영웅입니다.”
“꺄아아아! 정말 반가워요. 드레이크 백작님. 처음 뵙지만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이렇게 실물로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마치 아이돌을 본 팬처럼 호들갑을 떠는 세르데나. 그 높은 텐션에 칼슨은 당황하며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하였다.
“하하,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아름답다고 소문이 자자하신 왕세자빈 마마를 만나 무척이나 영광입니다.”
“호호, 정말이지 듣기 좋은 말만 하시는군요~ 빈말이긴 하지만 기분이 좋아지네요. 감사해요.”
“하하, 빈말이 아닙니다. 아무튼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왕세자빈 마마.”
“예, 드레이크 백작님. 저도요. 아 그리고 바스테르 후작님도 반갑습니다.”
“예, 세르데나 왕세자빈 마마.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호호, 네~”
칼슨에 비해 조금 다운된 반응이었지만 워낙 하이 텐션이라 톤이 높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왕세자 전하께서는 어디 계셔?”
“아, 전하께서는 요즘 많이 바쁘셔. 몬스터 웨이브 때문에 여러 영지가 상황이 안 좋거든. 게다가 제국에 보상금 문제도 있고 해서 요즘 정신이 없으셔.”
“아, 미안. 우리 왕국에서 도와주었어야 했는데…. 우리 쪽 사정도 그렇게 좋지 않아서. 그나마 드레이크 백작님이 아니었다면 이곳보다 상황이 더 안 좋았을 거야.”
여기까지 오며 슬로페 왕국의 참상을 봤기에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드는 엘리시아. 그녀의 표정을 본 세르데나는 미소를 띠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였다.
“아니야, 그쪽도 몬스터 웨이브 때문에 힘들었다는 거 잘 알고 있어. 다만 우리 왕국엔 드레이크 백작님 같은 분이 안 계셨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지.”
“세르데나 언니….”
살짝 울먹인 엘리시아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끌어 앉는다. 나름 감동적인 장면이었지만 칼슨에겐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저 빨리 쉬고 싶을 뿐.
그때 어디선가 분주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왕세자 전하께서 오십니다.”
세르데나 옆에 있던 시녀가 넌지시 이야기하였다.
그 말에 시선을 돌린 세르데나. 그곳에는 십수 명의 사람들이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전하.”
세르데나가 한발 앞장서며 말을 한다. 그러자 그녀에게 다가가는 한 남성. 그는 슬로페 왕국의 왕세자인 브랜데르였다.
브랜데르 론 라노르겐.
그는 짙은 갈색 머리에 푸른 눈을 한 장신의 미남이었다. 푸른색 정복을 입고 있던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소, 몸은 어떠시오? 이제 홑몸도 아닌데 이리 돌아다녀도 되시오?”
“아니 괜찮습니다, 전하. 아직 배가 부른 것도 아닌데요.”
“그래도 조심해야 하오. 아 그런데 이분들은 누구시오?”
일행을 바라본 그가 묻는다. 이에 엘리시아가 궁중 예법으로 인사를 하며 말을 하였다.
“안녕하세요. 왕세자 전하. 저는 드레이크 왕국에서 온 엘리시아라고 합니다. 전에 뵌 적이 있으시지요?”
“엘리시아? 아! 기억나오. 드레이크 왕국의 공주가 오셨군요. 아니 이제는 왕녀님이겠군.”
“예, 역시 기억하시는군요. 맞습니다. 데로스 오라버니가 새 국왕이 되었기에 이제 공주가 아닌 왕녀 신분이 되었지요.”
“하하하, 정말 몇 년 전에 봤을 때 앳되셨는데 이제는 어엿한 숙녀가 되셨소.”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조금 전 얼핏 들었는데 홑몸이 아니라니요? 설마 언니가 회임을 한 건가요?”
“그렇소. 이제 나도 곧 아버지가 된다오.”
“축하드려요, 왕세자 전하. 언니,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를 나한테 하지 않았어?”
살짝 삐친 표정으로 세르데나를 보는 그녀. 이에 세르데나는 멋쩍은 표정을 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 그게 처음에 너무 반가워서 말할 새가 없었어. 게다가 아직 초기니까 완전히 자랄 때까지 조용히 지나가려 했지.”
“아무리 그래도! 정말 섭섭해, 언니.”
“하하하, 엘리시아 왕녀.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시오. 본래 슬로페 왕국에서는 아이가 나올 때까지 주변에 잘 알리지 않는 풍습이 있소. 혹시 모를 부정한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렇소. 그러니 진정하고 마음 푸시기 바라오.”
살짝 땀까지 흘리며 세르데나를 변호해주는 브랜데르. 자신의 언니를 감싸주는 모습에 엘리시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저으며 말하였다.
“예, 왕세자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잘 알겠어요. 그래도 조금 섭섭한 것은 어쩔 수 없네요.”
“그 마음을 어찌 모르겠소. 그래도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되었지 않소. 하하하. 그런데 혹시 옆에 이분들은 어떻게 되시는지…?”
말을 돌리듯 던지는 질문에 엘리시아 대신 세르데나가 말을 하였다.
“전하, 이분은 바로 라델리안 공작님이세요. 그리고 이 젊은 분은 요즘 명성이 자자한 드레이크 백작님이시구요. 저분은 소드 마스터이신 바스테르 후작님이십니다.”
“아, 그러시군요. 만나 뵙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이거 벤투스 왕국의 기둥들이 모두 오셨군요.”
“저도 반갑습니다. 왕세자 전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왕세자 전하를 뵙습니다.”
브랜데르가 반갑게 인사하자 일행들 모두 일제히 답하였다. 그 모습에 그는 미소 띤 얼굴로 입을 연다.
“여러분, 혹시 이번에 제국으로 가시는 사절단이십니까?”
“예, 왕세자 전하.”
브랜데르의 질문에 엘리시아가 대답하였다.
고개를 끄덕인 그는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시군요. 때마침 우리 슬로페 왕국도 초청을 받아 사절단을 보내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출발일이 바로 내일입니다. 이왕 이렇게 오신 거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어떠신지요?”
갑작스런 그의 제안에 당황한 엘리시아. 그녀는 고민을 한 후 일행을 쳐다보았다. 이에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표시를 하자 엘리시아는 답을 해주었다.
“예, 어차피 저희도 오늘 하루 쉬었다 가려고 하였습니다. 같이 가는 데는 지장은 없습니다.”
“그렇군요. 그러면 그렇게 하시는 걸로 알고 말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하루는 이 왕성에서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왕성에서 하루를 보낸 그들은 다음날 슬로페 왕국의 사절단과 함께 길을 떠났다.
* * *
슬로페 왕국의 사절단.
순탄할 것만 같았던 그들과의 동행은 불과 하루 만에 불협화음을 일으켰다.
“자네가 그 소문이 자자한 드레이크 백작인가? 최근에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는?”
앉아서 쉬고 있던 칼슨을 내려다보며 말을 거는 남성. 정중한 듯 보였지만 그 어조가 상당히 공격적이었다.
‘뭐야 이 새낀?’
딱 봐도 자신에게 시비 털러 온 모양새. 칼슨은 일어서서 그를 마주 보았다.
그의 이름은 루겐 로즈닌.
슬로페 왕국의 젊은 백작으로 이제 막 서른 살에 접어든 자였다. 그는 자신의 밝은 적발을 쓸어 넘기며 거만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맞소, 그런데 내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소이까?”
칼슨 또한 두 눈을 치켜세우며 날을 세운 듯이 말하였다.
그의 태도에 기분이 언짢은 듯 표정이 구겨진 상대. 이를 드러내며 다시 한번 말을 이어 나갔다.
“자네 정말 소드 마스터가 맞는가? 겉모습만 봐서는 잘 모르겠는데?”
칼슨의 실력을 의심하는 확연한 시비.
순식간에 냉랭한 기운이 퍼지며 주변을 감쌌다.
자신에게 대놓고 적의를 보이자 칼슨은 비릿한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뭘 그리 말이 많소? 그냥 한 번 붙어보면 알 거 아니오?”
“뭐? 갑자기 무슨…?”
대뜸 싸워보자는 그의 말에 놈은 당혹스러워했다. 그 모습을 본 칼슨은 재차 말을 이어갔다.
“왜? 겁나시오? 그러면 어쩔 수 없고….”
그 말에 놈의 표정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